천일야화, 천일의 앤…천일의 지엠대우 노동자들…
맞고 쫓겨나고 싸우고 할 수 있는 건 다했지만, 상식조차 통하지 않았다.
3년에서 95일이 빠지는 1000일 동안 세상에는 수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술탄의 독주와 전횡을 막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끊이지 않는 이야기의 피륙을 펼쳤던 시간이 하루를 더한 1000일, 하루살이가 너덧 시간에서 하루 남짓을 살기 위해 애벌레로 꿇어야 하는 나날도 대략 1000일이다. 절대군주 헨리8세를 가톨릭교회와 결별하게 하면서까지 왕비의 자리에 올랐던 앤 불린이 비극적으로 끝난 결혼을 유지했던 날이 약 1000일, 가수 이승환이 가슴을 에는 목소리로 추억한 사랑의 시간도 1000일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000일 동안 세상도 사람도 빠르게 변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오직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뿐이라는 진리를 곱씹어보면 어제와 오늘이 다름을 새삼 개탄할 것도 없다. 오히려 시간이 흘러 모두가 변하는데도 고스란한 일들이 놀랍고 신기할 따름이다.
평일 오후임에도 꽉꽉 막히는 길 때문에 뒤늦게 현장에 도착했을 때 지엠(GM)대우 부평공장 서문 앞에서는 ‘투쟁승리 집중대회’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7월25일이면 투쟁 1000일을 맞는 지엠대우 비정규직 해고노동자들이 후텁지근한 대기 속에 맨바닥에 주저앉아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지엠대우는 원청 사용자성을 인정하라! 해고자를 복직시키라!” 작업복을 입고 스쳐 지나는 다른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그들의 삶은 노동조합의 깃발을 올리는 순간부터 완전히 달라졌다.
지난 1000일 동안 개처럼 두들겨 맞고 공장 밖으로 쫓겨나 길모퉁이에 천막을 쳤고, 철탑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했고, 한강다리에 기어올랐고, 뜨거운 아스팔트에서 삼보일배를 했고, 매일 공장 앞에서 출퇴근 투쟁을 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비인격적 대우와 저임금에 시달리며 권리 없는 책임만 강요당하는 삶, 해고 1순위로 지목되면서도 논의 자격조차 얻지 못하는 현대판 노예로서의 삶을 끊어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동정은 없었다. 상식조차 통하지 않았다. 자기 밥그릇을 지키기에 급급한 사람들은 침묵했고 현실주의자를 자처하는 약빠른 사람들은 비정규직이 늘어나는 것은 세계적 대세라고 말했다. 지엠이 대우를 인수하면서 법인세와 특소세 납부를 7년이나 유예받아 매년 30% 이상 성장을 이루고서도 라인을 재배치하고 노동 강도를 높이고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것을 ‘성공적인 구조조정’이라고 불렀다. 삶은 발밑에서 그렇게 허물어져 갔다.
실례지만 주인들의 허락도 받지 않고 1000일 동안 그들의 살터가 되었던 천막농성장 안으로 가만히 들어갔다. 전혀 희망적이지 않은 ‘희망퇴직’이란 이름하에 지금까지 1000여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해고됐다. 초기에 합류했던 조합원 100여명도 생계 등의 이유로 하나둘 떨어져 나가고 지금 이 천막을 지키는 이는 21명뿐이다. 나의 궁금증은 바로 거기 있었다. 무엇이 그들을 변치 않게 하는가? 무엇 때문에 누군가는 싸우고, 누군가는 타협하고,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떠나지 못하는가?
작은 천막 안에는 있어야 할 것은 다 있고 없을 건 없었다. 텔레비전과 시계와 회의용 탁자와 가스버너 등등이 아기자기하고 맑은 콧물감기/ 목이 많이 붓는 감기/ 감기몸살로 구분한 의약품 상자가 오밀조밀했다. 무슨 요리에 쓰였는지 소금과 설탕그릇 옆에는 참기름 병까지 놓여 있다.
그 모양새를 바라보노라니 명분, 신념, 사상… 그런 말들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고, 독일의 신학자 헤르만 군켈이 말한 ‘삶의 자리’(Sitz im Leben)라는 한마디가 문득 떠올랐다. 그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싸움터에 있다.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알기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안다. ‘삶의 자리’를 안다는 것은 짠맛과 단맛만이 아닌 한 방울 참기름의 풍미를 아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아무러한 고통과 시련도 시고 떫고 맵짜지만은 않다. 스스로 선택한 삶이기에 고소하다. 그 감칠맛을 아는 이들이라면, 그들은 이미 승리한 것이다.
김별아 소설가<2010. 0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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