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원태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물방울 무덤]
(창작과비평, 2007년 2월 10일)
『소읍에 대한 보고』 이후 12년 만에 엄원태의 신작 시집 『물방울 무덤』이 창비에서 출간되었다. 삶의 폐허를 통해 자본주의적 신화의 불모성과 그 현란한 미래의 황폐함을 폭로하는 데에 주력한다는 평가를 받은 전작들에 비해 이번 시집에는 주변의 구체적인 인물들을 통해 육체의 상처와 영혼의 궁핍함을 치유하고 그 대상을 열린 가슴으로 포용하는 온화한 시정신의 발현을 확인할 수 있는 시편들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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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원태
1955년 대구 출생. 1990년 <문학과사회>에 「나무는 왜 죽어서도 쓰러지지 않는가」등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 『침엽수림에서』『소읍에 대한 보고』등이 있다. 1991년 제1회 대구시협상을 수상했다. |
우선 병고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매몰되지 않고 타인들에게 눈을 돌리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체득한 시인의 삶에 대한 긍정을 느낄 수 있다. 병고를 겪지 않았더라면 얼핏 스치고 지났을 인물들에 대한 시인의 따뜻한 시선이 시집 곳곳에서 번뜩이는바, 특히 이번 시집의 제2부를 차지한 대부분의 시편들은 텔레비전 프로그램 「인간극장」의 주인공을 시적 인물로 끌어오고 있다. 시가 될 것 같지 않은, 휴먼 다큐멘터리의 주인공들이 그대로 살아나와 시적 상상력을 통해 새로 태어나 시가 된다.
그들은 거창한 사유나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서 시인에게는 더 유의미한 존재이고, 병상에 누운 시인이 경험할 수 있는 세상의 단면이다. 고속도로변에서 김밥을 팔면서 하루에 오천번 절을 하는 전도섭은 “장좌불와(長坐不臥)에 가까운 수행자의 길”을 가는 이로(「전도섭」), 산업연수생으로 왔다가 뇌종양에 걸린 세네갈인 압둘라는 “육체의 병을 통하여, 이미 그 마음이란 행로, 성자의 길에 들어선” 이로(「세네갈인 압둘라」) 시화된다.
::시인의 말
한동안 「동물의 왕국」을 즐겨보던 시절이 있었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의 서늘한 진실이라 할 만한 모습들을 무거운 공감으로 들여다보던 나이를 지나왔다.
몇년 전부터 야간투석반으로 병원을 옮기면서, 어느덧 「인간극장」을 즐겨보게 되었던 거다. 병상에 누워서 들여다보는 사람들 얘기란 저마다 그 어떤 지극함에 닿아 있는 것들이어서, 마냥 함께 젖곤 했다.
‘존재’라는 구체성과 한계를 동시에 껴안는다는 의미에서, 그 ‘쓸쓸한 긍정’만큼 아름다운 게 또 있을까.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라는 말을 아프게 새긴다. 졸시(拙詩)들은 그저 한참이나 뒤처진 채, 다만 그것을 따라갈 뿐이다.
12년 만에 세번째 시집을 묶는다.
2007년 이른봄
엄원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