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휘민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중력을 달래는 사람」이 걷는사람 시인선 99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세계는 간절함을 배반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릴수록 내게 소원을 걸어 둘 “크리스마스트리”가 없다는 사실이 선연해지듯이, 구원을 소망할수록 “해수면으로부터 너무 멀리”(「수목한계선」) 있어 아무도 오지 못할 거라는 사실만을 깨닫게 되듯이, “간절함의 끝을 붙잡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운명은 번번이 예상치 못한 샛길로 방향을”(「헬리콥터」) 틀고야 마는 것이다. 꿈이 외려 나를 찌르는 파편으로 돌아올 때, 그 안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휘민의 시는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슬픔이라는 말 속에는 너무나 다른 슬픔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휘민의 시를 읽다 보면 나의 슬픔과 당신의 슬픔이 얼마나 다른지를 실감하게 된다. 나와 당신이 다른 슬픔의 존재자이기에, “당신과 나는 서로의 반대편에 머물 뿐 가까워지지 않는다”(「적도」). 그러나 시인은 오히려 이러한 어긋남에서 당신과 내가 ‘우리’로 불릴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해낸다. “제 가슴을 치며 실컷 울고 나서야/서로를 바라볼 수 있었다”(「삭(朔)」)는 진술에서 알 수 있듯, 화자에게 눈물은 그 자신의 슬픔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 타인의 눈물을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된다. 외면하지 않고 나의 슬픔을 마주한다면, 당신에게로 다가가 ‘우리’가 될 수 있다는 믿음 안에서 시인은 슬픔 너머 내일의 가능성을 엿본다.
슬픔은 늘 우리를 초과한다. 눈물은 감정이 존재의 임계점을 넘을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존재를 초과하는 것이 슬픔의 특성이기에, 우리는 눈물의 다른 이름이 된다. “어는점과 녹는점이 같은 온도라면/영도로 낮아진 마음은/액체와 고체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운 것일까”(「나를 지켜보는 나」). 마음이 얼어 버린 인간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을 수 없기에 소멸한다. 어는점은 녹는점에 다르지 않다. 그러나 어는점이 녹는점과 같은 온도라면, 당신이 당신이라는 고체의 형상으로 존재하기를 시인은 바라는 듯하다. 우리의 슬픔이 이토록 다를지언정, “당신 심장의 두근거림으로/오늘도 내가 살아 있”(「살아 있는 동안」)기 때문이다. 어긋난 심장의 만남이 서로가 소멸되지 않도록 건너편에 제 손길을 건네기 때문이다. “슬픔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제2 외국어를 떠올리는 밤」) 반대편의 안부를 묻는 이 미련한 수용성 공동체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눈물에 녹아 사라지지 않도록, 눈물 끝에 볼 수 있는 서로의 얼굴에 희망을 거는 이 마음을, 사랑이라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수 있을까.
어쩌면 도처에 널린 슬픔 속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건너편을 믿어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믿음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신분당선」), 여전히 모르겠다. 그러나 서로 다른 슬픔을 껴안은 당신과 내가 ‘우리’로 존재할 수만 있다면 “바닥까지 내려가는 슬픔은 절벽의 깊이가 아니라/그 끝을 딛고 버티는 발등의 두께로 기억될 것이다”(「제2 외국어를 떠올리는 밤」).
추천사를 쓴 이현호 시인의 표현대로 이 시집은 “슬픔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플롯 연습」)지를 집요하게 캐묻는다. 그 질문들은 섣부른 해답이나 어설픈 위로 같은 “거짓의 마음”(「상고대」)을 버린 이의 표현법이라서 진실하고 또 미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