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회원작품
|
|
제목 |
[은수저] 김박은경 / 앵무조개 무늬는 한 번 더 아름다워지고 외 1편
|
이름 |
사무처
|
앵무조개 무늬는 한 번 더 아름다워지고
김박은경
밤의 진실과 낮의 진실이 다르다면
진실이 아니어도 어쩔 수 없다면
우리는 있었던 적이 없어지는 사람들
단 하나의 비밀이 광장의 단두(斷頭)처럼 내걸렸으니
명백하고 강력한 슬픔으로 몸은 깨지고
입은 지워지기 시작했다
당신이 했던 그 말은
당신의 그녀가 했던 그 말은
그녀의 그가 했던 그 말은
또 누군가 누군가에게 했던 말이라는 바로 그 말은
앵무조개만큼 까마득한 구전(口傳)
다 잊었던 일을 몸이 기억해내듯
차갑고 깜깜한 슬픔을 견디려
애써 외웠던 것뿐이니
황홀하고 불안하고 기어이 아무것도 아니다
알게 된다 돌아간다 옳다 두 번 다시는
모든 것을 천천히 기억해내면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차마 할 수 없을 것 같던 이별을 만들고
우리는 잠시 행복해진다
갑을의 방식
김박은경
내가 칼자루를 잡고 있으니 너희들은 칼날을
잡아야 하잖아 칼날이니 그 마음 철철 흘릴
수밖에 겁먹어 그 끝을 움켜잡을 수밖에 베이며
끊겨나갈 수밖에 이게 바로 갈 때까지 가는 법 갈 데
까지 가는 법 칼이 무뎌질 때까지 칼이 받아낼
끝까지 고통으로 사라질 때까지 무의미한 과거형이
될 때까지 그것으로 마침내 통과하기를 그것으로
한 몸의 눈동자가 되기를 내내 한 방향이기를 보지 않고도
볼 수 있기를 오른발과 왼발처럼 차례로 향하기를
을(乙)이 평생토록 맛볼 수 없을 햄버거와 초콜릿, 제대로
드립한 커피 한 잔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척하는 사이 아무도
진짜 갑(甲)이 아닌 척하는 사이 테이블 밑에 떨어진 동전이
생각난 스크루지들 스스로 쇠사슬을 되묶고 금고 문을 다시
잠그고 사라지는 익숙한 악몽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건데 햄버거
어린이세트 사면 끼워주는 장난감은 빈민국 아이들 눈물의 조립 혀에
닿으면 녹아 사라지는 초콜릿은 아프리카 카카오농장 아이들 땀의
조립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은 커피재배농장 아이들 상처의 조립
조립을 위해 허공의 칼날들 엉성한 난도질을 한다는
건데 지금 내가 칼자루 놓아 버리면 너희들 그 칼날 놓을
수 있니 칼날의 상처들 견딜 수 있니 그나마 한 끼 식사
찾을 수 있니 자못 깊은 시름처럼 근황을 염려하기도
하는 건데, 손을 씻는다 입이 단데 손만 씻는다 하얗다
넌 네가 얼마나 행복한 아이인 줄
아니 넌 네가 얼마나 불행한 아이인 줄 아니,
아니
약력: 2002년 ≪시와반시≫ 등단, 시집『온통 빨강이라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