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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소설] 제7회/ 정혜경-아이고 브리지(1)
이름 관리자



이 소설을 다시 읽는다 제7회

아이고 브리지

정 혜 경

 



 

판다누스와 코코스 야자 사이로 희끄무레한 물체가 스쳐 지나갔다.

"저렇게 방치 된 지 삼 년이 넘었어요. 보상은 다 받은 모양입니다만."

김태우의 손가락 끝에서 생경한 모습으로 번득거리던 콘크리트 구조물은 허리가 잘려진 교각이었다. 잔잔한 코발트빛 바다와 청회색 하늘이 주는 남국의 분위기 때문인지 거대한 갑충 하나가 달려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승재는 굳은 표정으로 외면해버린다. 김태우도 순간 머쓱해진 얼굴로 화제를 돌린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자칫 고집스러워 보일 수 있는 큼직한 턱뼈를 야무지게 간수했다.

"스티브 이치로오씨는 두 시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아마 곧 도착할 겁니다. 한국과 시차가 없으니 편하시죠? 이곳 사람들 약속 하난 잘 지킵니다. 일본이며 미국이 차례로 밟아온 나라지만 좋은 것만 다 배운 셈입니다."

유난히 가늘게 늘어진 입 주위에는 짙은 환대의 표정이 고르게 도색 되어 있다.

그곳 현지에 사는 김태우 말입니다. 무역회사 간판은 달고 있다지만 의심스러운 데가 많아요. 혹, 이중 플레이를 하는 게 아닐까요?

김태우와 거래했던 사람들은 그런 식의 귀띔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심증만 있을 뿐 아직 물증은 없다.

"그래요, 무척 깔끔하군요."

승재는 김태우의 말에 건성으로 대꾸해버린다. 거품처럼 솟아오르는 의구심은 간신히 잠재웠지만 자칫 사납게 느껴질 수 있는 싸늘한 표정만은 쉽사리 지울 수가 없다. 먼 기억의 창고 속에서 끝없이 꿈틀거리는 다양한 군상들이 순식간에 앞을 막아서는 절벽만큼이나 자제력을 잃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안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새의 깃털을 연상케 할 만큼 가볍고 투명하다.

"어떤 사람입니까? 스티브씨는?"

승재는 의도적으로 화제를 스티브 쪽으로 돌려버린다.

"문사장님은 일보다도 사람 쪽으로 관심이 더 가시는 모양입니다. 하긴 사업도 결국은 인간 관계의 연장이니까. 저도 처자식 먹여 살리는 일 아니었으면 이 먼 곳까지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김태우는 특유의 가늘고 긴 웃음을 입가에 지어보인다. 처음 대면했을 때부터 그랬다. 심중을 훤히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과거를 들추어내려는 상대의 말문을 환한 웃음으로 막아버리곤 했다. 김태우가 지어보이는 선한 표정 때문인지 승재가 알고 있는 기억 속의 김상규와 지금의 김태우는 동일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그러나 그와 상대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승재의 뇌리에는 빛깔도 다양한 세월 저 편의 기억들이 자꾸만 떠오르기 시작한다.

"뭐, 꼭 그렇다기보다..., 이곳에는 징용 왔던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으니까요. 제 어머니도 징용 때문에 평생을 불행하게 사신 분이시죠."

어머니 문제만은 굳이 꺼내놓고 싶지 않았지만 김태우의 관심이 사업 쪽으로 치닫는 것을 경계하고 싶은 마음에 승재는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고 만다.

"그럼 팔라우 쪽으로?"

"모르죠. 남양 군도라는 것밖에는......"

"사실 여긴 2차 대전 당시 격전지였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태평양에 떠 있는 산호섬 정도로만 알고 있을 겁니다. 괌처럼 이곳 사람들도 관광 수입으로 먹고사니까요. 일본제국이 점령해서 태평양전쟁의 패배로 미국에게 모든 권한을 양도하는 통에 그야말로 잡종 천국이 되고 말았어요. 이름들 보세요. 스티브 이치로오. 하지만 스티브씨는 예욉니다. 한국에서 입양한 전쟁고아라니까요. 이만하면 궁금증이 좀 풀렸습니까?""뜻밖이군요. 개인적으로 스티브씨와 특별한 친분이라도?"

"뭐, 그렇지는 않아요. 스티브 이치로오씨는 대통령궁을 내 집 드나들듯 하는 팔라우공화국 관료니 유명인사인 셈이지요. 거기다가 우리 일과 아주 밀접한 건설사업 시행자라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라온 토양 때문인지 정서가 많이 달라요. 아마 그의 부모 때문일 겁니다. 그 사람들, 아주 특별한 부류니까요."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점점 더 궁금해지는데요."

승재는 파일 속에 끼워둔 스티브 이치로오의 명함을 내려다본다. 따지고 보면 그의 이름은 상흔과도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승재는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멀리 희미한 풍경화 한 폭이 스쳐지나간다. 부러진 교각과는 아주 대조적인, 낡고 바랜 사진첩 속의 고향 언덕을 연상케 하는 독특한 분위기의 다리 형태를 지닌 구조물이었다.

"시간 나시면 저 곳도 한 번 가보세요. 감회가 새로울 겁니다."

"저게 뭡니까? 다리 같기는 한데, 다시 보면 방파제 같기도 하고."

"궁금하시면 스티브씨에게 물어 보십시오. 제가 얘기 다 해버리면 스티브씨가 할 일이 없을 테니까요. 떠돌이 장돌뱅이 신세인 저보다야 스티브씨 부모님들이 더 상세히 설명해주실 겁니다. 마침 스티브씨의 집도 저 쪽이니까요. 여러 모로 스티브씨와의 만남은 뜻 깊은 일이 되겠군요. 스티브씨 아버지도 징용으로 이곳에 온 사람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문사장님께는 팔라우가 상당히 의미심장한 곳이겠습니다."

"글쎄요."

코로르섬을 돌아올 때까지 승재의 뇌리를 맴도는 생각은 오직 한 가지 뿐이었다. 다시 일어서리라는 의지를 굳히는 일이었다.

스티브 이치로오는 지난 달 시멘트와 철근을 공급해달라는 서신을 보내왔다. 승재가 팔라우로 급히 온 것은 구두계약 문제를 좀 더 확실한 오더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자신의 계획을 비웃기라도 하듯 파일 속의 서류들은 오직 한가지 빛을 발하며 도열해 있다. 희망에 불타던 자신의 의지를 어떻게 무너뜨렸는지 세세히 그려보이고 있는 것이다. 공백 때문이기도 했지만 예전에도 그는 상담에 도움이 될 만한 서류들은 몇 장의 명함을 포함해서 이렇게 파일 속에 모두 넣고 다녔다.

정지화면 속의 그림처럼 색바랜 명함들 속에 묻어있던 시간들이 선명한 몸짓으로 다가온다. 지급 보증을 서준 동료가 배신하고 뉴질랜드로 잠적해버린 일도 있었고, 거래하던 은행이 문을 닫는 통에 차압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요, 환차손으로 인한 피해를 겪은 일도 있다.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일들이 확연하게 제 모습을 드러낼 때의 절망감들은 늑골이 안으로 휘어 박히는 것처럼 생생한 육체적인 통증으로 나타나곤 했다. 그것들은 자신이 빠진 곤경의 늪이 얼마나 깊고 험한 곳인지 뼈 속까지 저리게 만들고서도 결코 무디어지는 법이 없었다.

지난 이십 년의 세월은 파일 속에 고스란히남아 있다. 이것마저도 폐기 처분하려 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벼랑 끝에 선 것만 같은 절망감보다도 더 끈질기게 승재를 괴롭혀온 것은 재기를 향한 미련이었다. 덕분에 수치심 열패감과도 담담하게 악수하며 지낼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극도의 긴장감과는 아직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다.

스티브 이치로오가 팩스로 보내온 일차 선적분의 내용은 한화로 육천만 원 상당의 시멘트였다. 승재에게 주어진 일은 그들이 원하는 시멘트를 원할하게 공급해주는 가교 역할이었다. 그러나 단순해 보이는 그 일이 어처구니없는 일로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한국의 시멘트 회사에서 시멘트를 팔 수 없다는 통보를 해온 것이다. 얼마를 지불해주든지 간에 승재 쪽으로는 한 포대도 팔지 않겠다니. 내막을 알아보기 위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긴 하지만 그런 상대와 거래를 해야 한다면 또다시 과거의 악몽을 되풀이하지 말란 법이 없다. 당면한 사안의 중요성은 언제나 서너 발쯤 뒤로 밀려나고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사소한 일들이 그의 발목을 묶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도 물 속에서 빨리 뛰려고 허우적거리는 것 같은 우스꽝스러운 몰골로 바이어에게 외면당하고 말았던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승재는 파일의 상단에 붙어 있는 스티브 이치로오의 자그마한 명함을 내려다본다. 서울에서 잠시 마주 했을 뿐이지만 그의 얼굴에서 감지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어라고 형언 할 수 없는 낯선 감정이었다. 다시 새겨보는 그의 해맑은 외모에서 풍기는 인상은 팔라우의 분위기와 혼연 일체가 되어 섬의 일부로 잘 스며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문사장님은 팔라우가 초행이시죠?"

"예, 그렇습니다만."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것일까. 흰머리만 약간 늘었을 뿐 실기죽한 입이며 유난히 낮은 톤의 굵은 목소리를 보면 김상규가 분명하다. 사람에게서 풍기는 첫인상이란 선입견을 갖게도 하지만 대부분 그가 취하는 삶의 방식과 무관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고 보면 승재의 직감을 아주 무시 할 일만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지금 김태우의 행동은낯설기 짝이 없다. 김상규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잘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승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김상규는 업무 부서는 달랐지만 분명 같은 회사 직원이었다. 그는 회사의 공금을 유용한 뒤 해고당했다. 그후 일신산업 하청 공장의 전무이사로 옮겨갔지만 무슨 이유인지 이내 그만 두었다는 소문이 사라진지도 벌써 십오 년 전의 일이었다.

김태우는 승재를 깍듯이 대한다. 대충 보아서는 알아보기 힘들만큼 눈꺼풀 수술도 했고 코를 세우기도 했지만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었던 독특한 분위기와 목소리만은 제거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개명이나 성형수술만으로 운명의 족쇄를 풀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분명했다. 말끔하게 도색 된 새 합판 같은 느낌을 주는 김태우의 낯색 아래에서 어지럽게 오가고 있을 과거의 기억들이 김상규라는 이름 너머에서 훤하게 잡혀온다. 쉰이 넘었을 김태우의 얼굴은 달라져 보이기 위한 각고의 노력과는 달리 그다지 변함이 없다. 그런데도 김태우는 완벽한 연기를 해보이고 있는 것이다. 승재 역시 이제 예전의 그는 아니었다. 남의 감정에 쉽게 지배되었고 남이 베푸는 친절에 쉽게 감동하여 금방 목소리가 떨리던 그 시절의 자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삼백 사십 개나 되는 섬으로 형성된 나라다 보니 대부분의 교통 수단은 주로 비행기나 배편을 이용합니다. 무엇보다 여긴 쾌적해서 좋아요. 청소부도 배를 타고 이 섬 저 섬 다니면서 열심히 일을 하죠. 특이하게도 이곳의 바람 속에는 염분이나 습기가 없어요. 마누라 말이 여긴 이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파라다이스랍니다. 그렇게 보는 데엔 또 한가지 이유가 있어요. 여긴 철저한 모계 사횝니다. 이곳 사람들 매 맞는 남자 많아요. 이혼 청구 소송의 내용에 아내의 폭력이 적지 않다는 걸 보면."

김태우는 외벽을 온통 회백색 대리석으로 치장한 테라스가 인상적인 자그마한 단층 건물 앞에서 차를 세웠다. 그의 친척이 경영한다는 레스토랑이었다. 내부 장식은 천정에서 바닥에 이르기까지 모두 유럽풍의 원목 자재로만 꾸며져 있었다. 그는 승재를 대형 페어글라스 옆자리로 안내했다.

"이곳 여자들의 경제력이 남자보다 우세한 모양이죠?"

승재는 마음에도 없는 대꾸를 건넨다. 김태우는 공항에서 처음 대면 할 때부터 같은 표정, 같은 분위기를 고르게 유지하고 있다. 천연덕스러움이 태어날 때부터 갖추어진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웃는 얼굴이 승재에게는 껄끄럽기만 하다. 그의 얼굴에 그려 붙이고 있는 선량과 친절의 표정 저 뒤편 깊숙한 곳에는 필시 침통한 기억들이숨겨져 있을 것이다. 승재의 눈에는 서글프게만 비쳐지는 갑갑한 변화였다. 김태우를 그렇게 밖에 보아주지 못하는 점 역시 승재에게는 일종의 피해 의식 같은 것이기도 했다. 마주 앉은 자리에서 낯뜨거울 만큼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인간일수록 악랄한 수법으로 배반한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입었던 가장 치명적인 상처는 잃어버린 돈이나 밤잠을 설치게 만드는 배신감보다도 상대를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경계의 태세부터 갖추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서글픈 후유증이자 합병증인 셈이다.

"바로 그겁니다. 여기 남자들은 피부색이 까맣고 여자들은 대부분 붉거나 누렇죠. 여자들은 내근, 남자들은 외근을 하니 그래요. 정부 청사에 고용되어서 컴퓨터나 놀리는 여자들의 보수가 남자보다 훨씬 나으니까요. 집사람은 정작 그들과는 전혀 다른 생활을 하면서도 대리 만족이 되는 모양인지 여길 떠나기 싫답니다."

어떤 내용의 대화를 하든 김태우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다. 승재의 등장에도 감정의 수위를 고르게 유지하며 시종 환하게 웃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희로의 절제력이었다. 그러나 승재로서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김태우와 대면하는 일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김태우는 팔라우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친절하게 제공했다. 그는 자로 잰 듯이 정확하게 오후 두 시까지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끝냈다. 그리고는 스티브 이치로오가 곧 올 것이라는 말과 함께 길게 늘어진 웃음을 오래도록 지어 보인 뒤 화장실이 있는 로비의 끝을 향해 유유히 사라졌다.

파일을 정리해서 덮은 채 멍하니 앉아 있던 승재는 자신의 패스포드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든다.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주시하고 있는 누렇게 바랜 흑백의 혼례사진이다. 외국 출장을 갈 때마다 어머니는 그에게 닳아 너덜거리는 이 흑백사진을 쥐어 주었다. 특히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쪽으로 가게 될 때면 사진 속의 젊은 남자에 대한 소식을 알아보라는 은밀한 당부를 잊지 않았다. 어머니의 부채 의식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로서는 떨떠름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열 여섯에 남편의 얼굴도 모른 채 시집 와서 첫날밤을 치르기 무섭게 징용으로 남편을 잃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에 재가를 해서 승재를 낳았다. 유복자였던 형은 간암으로, 승재의 친아버지는 폐암으로 지난 이 년 동안 연이어 세상을 버렸다.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의 얼굴조차 본 적 없이 육십 년 가까운 생을 살다간열 다섯 살 연상의 형은 언제나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승재에게는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 아버지가 늘 곁에 있었지만 그의 의식은 헐벗고 굶주린 고아와 다를 것이 없었다. 형과 평생토록 화해하지 못한 아버지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모든 잘못은 어머니에게 있었다. 어머니의 형에 대한 편애와 과거에 대한 부채 의식은 남은 식구들을 이끼투성이의 비좁은 어항 속에 가득 들어찬 부레옥잠처럼 갑갑하게 만들었다. 병든 아버지가 누운 방에서 다른 남자와의 혼례 사진을 자신에게 몰래 건네며 수소문을 당부하는 어머니와 대면해야하는 일은 언제나 버거운 일이었다. 마흔 중반에 이르른 승재가 보기에도 젊었을 때처럼 맞대거리로 따지고 들기에는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 초라했다. 쌍클한 어조로 차라리 날 죽이라고 엉겨붙던 숱 많은 검은 파마머리의 어머니가 아닌 것이다. 오랜 가난으로 풀기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이 쪼그라진 여든을 바라보는 노파의 얼굴과 삼십오 킬로그램의 체중에서 스며나오는 맥없이 바스라지는 말투가 더 이상의 대꾸를 할 의욕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어머니가 짊어지고 온 전 생애의 고통은 그녀의 반질거리는 머리 위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재가를 했으나 평생 폐를 앓았던 남편과 두 아들을 위해 재첩 행상을 해왔던 어머니였다.

승재가 감당해야만 했던 지난 이년은 자신이 밟아온 매끈하지 못했던 시간들 중에서도 가장 격렬했던, 암갈색으로 채색된 혹독한 세월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승재의 빚보증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승재의 파산 이후 아버지의 병세는 급격히 악화되었고 결국 통증에 시달리던 잠자리에서 눈을 감았다. 그러나 홀로 된 어머니와는 조금도 화해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과거와는 옹이 박힌 나무처럼 배배 꼬여 있었다. 형의 그늘에서 단 한 순간도 제 몫을 갖지 못했다는 피해의식에만 기력을 모두 소진 시켰기 때문이었다. 실지로 형의 죽음 앞에서도 승재는 사별의 아픔보다는 어려운 문제를 풀어낸 후련함 같은 당혹스러운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곤 했다. 구제 할 길 없는 지옥의 풍경이었다. 그는 지난 세월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에게 있어서 과거란 어머니의 의식 속에 뿌리내린 칡넝쿨이거나 질경이처럼 오직 생존을 향해서만 존재하는 집요한 생명력 이상의 그 무엇이 되지 못했다. 어머니의 존재 역시 늘 외면하고만 싶은 혐오와 수치의 대상일 뿐이었다.

웃는 모습이 보름달처럼 훤했었지. 난 죽어 저승 가서라도 할 말이 없는 년이다. 그러니, 제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그것만이라도 알려다오.

토시 하나 빠짐없이 똑같은 모습으로 되풀이되는 넋두리였지만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라는 말의 입자가 승재의 귓전에 닿기만 하면 감전이라도 된 듯이 너덜거리는 사진을 받아들곤 했다. 오래 묵은 때란 지우기 힘든 것이다. 그토록 혐오스럽게 바라보았던 어머니의 한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승재의 의식 한가운데로 옮겨와 있었다. 파일 속의 문자들로부터 풍겨오는 이 친숙하고도 낯선 감정의 일렁임 또한 그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리라.

 

스티브 이치로오는 승재를 향해 먼저 환한 웃음을 보냈다. 어림짐작으로 자신과 동연배로 보이는 그의 표정은 풍부하다. 특히 환대의 표정이.

"지난번에 보낸 팩스는 받아 보셨지요?"

승재는 고분고분한 학생처럼 먼저 파일을 펼친다.

"네. 자료 내용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우선 담당자도 만나보고 현장에 대한 사전 답사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아 급히 찾은 겁니다. 특히 우리가 맡기 이전의 무역회사와 소송문제가 불편하게 걸려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셨을 겁니다. 그 사람들이 지불하지 않은 물품 대금에 대한 청구 소송 준비는 잘 되고 있습니다. 우선은 현장부터 들러보시고 담당자들을 차례로 소개하겠습니다. 지난번보다 품목이 더 다양해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사장님 능력에 대해선 익히 알고 있으니까요. 다만 물량이 적어서 수익 면에서는 크게 도움이 되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아파트 내부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생활 필수품에서 가구까지 품목이 좀 더 다양해질 겁니다. 자, 나가시죠."

그러나 승재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초점 잃은 눈으로 멍하니 앉아 있다. 승재는 자신이 할 말을 한 가지 빠뜨렸다는 생각을 한다. 그게 무엇이던가. 언뜻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마치 의식의 스크린이 하얗게 비어버린 것만 같다.

"급하게 하실 말씀이라도?"

그의 낯색이 묻는 얼굴로 변한다. 시종 일관 환대의 표정 하나였던 김태우와 달리판토마임을 해도 될 것 같은, 다채로운 표정의 변화를 자유자재로 보여주고 있다.

"그게 아니라 소송이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저희들의 발 빠른 개입이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순간 승재의 의식을 파먹던 두통은 정수리를 향해 다시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이 또한 실패의 비극이 남긴 후유증일 터였다.

"못미더우시면 이걸 참고해보시죠. 여기 충분한 자료가 있습니다. 그 문제는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는 미리 준비해온 서류 다발을 승재에게 건넸다.

"그보다도 이곳 사람들이 왜 하필이면 국내에서는 최하 등급인 대진시멘트의 제품을 쓰게 되었는지 그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곳의 자금 사정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승재를 바라보던 스티브의 얼굴이 부채살처럼 환하게 펴진다.

"아하, 그 문제 말입니까? 그건 이곳 사람들 정서가 독특해서 그래요. 한 번 믿은 것에 대한 신뢰가 너무 철저하다고나 할까요? 최근에야 한국의 무역회사 측에서 속였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곳 사람들은 대진의 시멘트가 제일 좋은 줄로만 알고 있으니 어쩝니까? 더군다나 오시면서 보셨죠? 무너진 다리 말입니다. 사실 그 회사가 시멘트 하나는 최고의 제품을 썼거든요. 그렇지만 설계도면에 충실하지 않고 규정량을 쓰지 않는 데에는 속수무책이었던 거지요. 이쪽 사람들은 그 다리 때문에 대진 쪽을 더 신뢰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다리 붕괴 특수'를 누린다고나 할까요?우리도 몇 번 바꾸려고 시도는 했지만 반대가 워낙 심해서요. 그러니 그 문제는 잊어버리세요."

승재는 순간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대진 측의 어처구니없는 태도가 어디에서 연유된 것인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승재는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쉰다. 뻔히 들여다보면서도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는 두꺼운 유리벽과 마주한 기분이었다. 일을 하는 동안 지겹도록 부딪혀온 일이었다. 거래선은 주로 남미 쪽이었고 거래물품 또한 스포츠용품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검사를 다 마친 불량품을 몰래 실어보낸다든가, 같은 업종끼리의 과당 경쟁으로 망신을 당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그때마다 승재는 마치 자신이 저지른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벌거벗은 몸으로 거리에 내걸린 기분이었다.

"처음 이곳에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한 사람들은 모두 국내에서 계획적인 부도를 내거나 사기전과가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일종의 도피처였던 거지요. 덕분에 우리도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결국 저렇게 다리를 부러뜨리고서야 깨닫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값비싼 대가였던 셈이죠."

피해자이기만 했던 스티브의 표정은 의외로 느긋하다. 그 순간 승재의 머리 속에는 어제의 일이 씁쓰름하게 떠올랐다. 대진시멘트 업자와 시멘트 대금을 가로챈 무역회사 직원과 어떤 거래가 있었는지 시멘트를 사겠다고 찾아간 승재에게 그들은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대며 억지 소리만 했던 것이다.

"어떤 가격이든 당신들에게는 한 포대도 내어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기존의 거래처를 존중하고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으니까요."

그들이 말하는 기존의 거래처란 스티브가 물품 대금 사기를 당한 회사다. 시멘트를 창고에 쌓아두고도 뒷돈을 건네는 사기꾼이 아니면 팔지 않겠다니. 다리 붕괴 특수가 낳은 또 다른 형태의 부작용인 셈이다. 그날도 수출 부진이라는 미명 하에 작업장에서 밀려난 중년의 근로자들은 담벼락 아래에서 힘없는 눈으로 승재를 올려보고 있었다. 수출이 어렵다는 요즈음과 같은 형편에 제발 수출 좀 하게 해달라고 사정을 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셈이다. 팔라우의 인구라고 해야 이만에 불과 하니 잡다한 일용품들로는 수지를 맞추기도 힘들건만, 이 뻔한 시장에서 또다시 우리끼리의 출혈 경쟁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인도네시아에서의 일을 아프게 떠올린다. 처음 인도네시아로 진출 할 때만 해도 스포츠화의 생산량이 꽤 많은 편이었다. 노사분규 이후 한국에서의 임금이 오른 탓에 그 무렵 상대적으로 임금이 낮은 편이었던 인도네시아로 공장들을 옮겨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당경쟁으로 결국 제 살만 깎다 대부분 도산으로 마감을 하고 말았다. 이와는 아주 대조적인 나라가 대만이었다. 자신이 받아오는 오더의 반밖에되지 않았지만 그곳에서는 철저한 쿼터제로 이익을 균등하게 배분했다. 한 마을에서 오리를 키워서 돈을 버는 집이 생기면 그곳에서는 절대로 오리를 키우지 않는 것과도 같은 방식이었다. 한 집의 장사가 잘되면 한 집 건너 혹은 마주 보는 곳에 가게를 열어 모두 문 닫고 마는 우리와는 판이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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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소설   제7회/ 정혜경-아이고 브리지(2) 관리자 2002.08.09. 3205
소설   제7회/ 정혜경-아이고 브리지(1) 관리자 2002.08.09. 3342
96 소설   제6회/ 박철-깍새(2) 관리자 2002.08.09. 3547
95 소설   제6회/ 박철-깍새(1) 관리자 2002.08.09. 3243
94 소설   제5회/ 이해선-나팔꽃 담장 아래(2) 관리자 2002.08.09. 3466
93 소설   제5회/ 이해선-나팔꽃 담장 아래(1) 관리자 2002.08.09. 3303
92 소설   제4회/ 이미숙-미로(2) 관리자 2002.08.09. 3018
91 소설   제4회/ 이미숙-미로(1) 관리자 2002.08.09. 3063
90 소설   제3회/ 이경혜-낙원장(2) 관리자 2002.08.09. 3306
89 소설   제3회/ 이경혜-낙원장(1) 관리자 2002.08.09. 3597
88 소설   제2회/ 송영-북소리(3) 관리자 2002.08.09. 2984
87 소설   제2회/ 송영-북소리(2) 관리자 2002.08.09. 3359
86 소설   제2회/ 송영-북소리(1) 관리자 2002.08.09. 3342
85 소설   제1회/ 권지예-사라진 마녀(5) 관리자 2002.08.09. 3741
84 소설   제1회/ 권지예-사라진 마녀(4) 관리자 2002.08.09. 3494
83 소설   제1회/ 권지예-사라진 마녀(3) 관리자 2002.08.09. 3697
82 소설   제1회/ 권지예-사라진 마녀(2) 관리자 2002.08.09. 3276
81 소설   제1회/ 권지예-사라진 마녀(1) 관리자 2002.08.09. 4148
80 북한문학   리라순/ 행복의 무게(2) 관리자 2002.08.09. 1851
79 북한문학   리라순/ 행복의 무게(1) 관리자 2002.08.09. 1902
78 북한문학   오영재/ 늙지 마시라, 어머니여 관리자 2002.08.09. 1960
77 북한문학   김북원/ 이백 집 새 집들이 관리자 2002.08.09. 2057
76 북한문학   한웅빈/ 딸의 고민(3) 김재용 2002.08.09. 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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