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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소설] 제6회/ 박철-깍새(2)
이름 관리자





나는 언덕을 내려와 그대로 마을을 떠날 참이었다. 언덕 아래 보이는 버스 정류장을 바라보며 빨리 마을을 떠나야 할 것 같은 중압감에 눌렸었다. 애당초 고향이라고 뚜렷이 떠오르는 기억도 별반 없을 뿐 아니라 반가이 찾아볼 이도 없었기 때문에 마음의 앙금이란 없었다. 억지로 돌이켜 유년의 즐거움을 그려보았지만 아련히 떠오르는 가난과 한낮의 더위, 긴긴 밤의 추위 정도가 전부였다.

나는 올라온 길을 되돌려 언덕을 내려갔다. 길에는 내가 만들어 놓은 발자국이 아직 뚜렷이, 어지러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가게를 지날 때쯤이었다. 나는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뒷덜미에 남아 있는 그 새 이름 같기도 하고 사람 이름 같기도 한 명칭이 나를 잡아끌고 있음을 느꼈다. 깍새아들이라니. 나는 멈춘 발을 가게로 돌렸다. 그리고 다시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방안엔 사내들이 있었으며 출입문 소리에 여주인이 처음 그 자세로 엉거주춤 기어나왔다.

" 그래, 동네 구경은 한번 해봤수 ? "

여주인은 나의 행보를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고향 찾은 이가 다 그렇지 하는 말투였다.

" 택시는 자주 옵니까 ?"

" 예, 요즘은 늦게 다니는 사람이 하두 많아서. 여자애들도 그렇게 늦게 다니데. "

여주인은 쓸데없는 말까지 했다.

" 맥주 한두 잔 더 하고 갈까 하는데요. "

" 그래요. 고향 찾아와봐야 다 그렇지요?요즘엔 고향이 따로 없으니까. 그래도 옛날처럼 반겨주는 사람이 있을 때가 좋았지."

여주인은 다시 문간에 걸터앉았다. 방안엔 남자만 셋이었다. 그 동안 한사내가 늘었으며 그들은 두부를 잘라서 김치에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두부가 하도 탐스러워 보여 연신 그쪽에 눈을 주었다. 그런 내 눈치를 살피던 두 번째 온 중년이 한마디를 했다.

" 이쪽으로 들어오시게. 막걸리 한 잔 하지. "

그리곤 새로온 사내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주고 받았다.

" 그래에 ? "

반백이 일어나 방문께로 왔다.

" 일루 들어와요. "

" 예."

나는 바라던 바라 냉큼 술병을 들고 방으로 들어섰다.

" 그러고 보니 정말 낮이 익는 것 같기도 한데. "

중년이 상체를 뒤로 제끼며 양 미간에 힘을 주었다.

" 너무 어려서 떠나서요. 고향 떠난 후 한 번도 와보질 못했거든요. 지금은 이민을 가서 멀리 호주에 삽니다."

" 그래. 그러니까 바로, 당신이, 깍새 아들이란 말이지? 윤춘백씨. "

" 예. 그런데 저희 아버님 별명이 깍새였습니까? "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물었다.

" 아, 그렇지. 깍새. 몰랐소 ? "

" 무슨 소리야? "

여주인이 방문을 닫고 들어서며 물었다. 나로선 금시초문인 얘기였다.

" 예, 어린 탓인지 그런 기억은 없는데요. 그리고 아버지에게서도 그런 얘기는 듣지 못했어요. "

" 그래 맞아. 옛날에 협동조합 이발소에서 일하던 춘백씨. 그 사람 별명이 깍새 아녀. 머리 깍는다고 하하. "

" ...... "

중년의 사내는 옛일을 기억해 낸 자신이 대견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리고 성큼 막걸리 대접을 내게 내밀었다.

" 챠, 깍새 아들이 이렇게 번듯하게 자랐구먼. 그래 춘백씨는 지금 어디서 뭘 해요. 같이 외국 나가서 살아요 ?"

" 아닙니다. 아버님은 이곳에서 이사 가신지 몇 해 만에 돌아가셨어요."

" 아니 , 나이도 얼마 안됐을 것인데...... "

" 예 그렇게 됐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가슴에 맞은 발길질이 가슴에 응어리를 만들고 그 응어리를 풀지 못해 끝내 가슴을 움켜쥐며 숨져간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단숨에 막걸리 잔을 비웠다. 여주인이 재차 잔을 부었다.

" 춘백씨 그 양반 고생 많이 했는데 일찍 세상을 버렸구만. 아들이 이렇게 근사하게 자란 것도 모르고. "

네 사람은 나를 둘러싸고 이심전심 호기심 반 동정 반이었다. 나는 나의 취기를 숨기기 위해 그들에게 연신 술을 건넸다. 그러나 넉 잔을 마신 다음에 한 차례씩 가는 술잔이라 결국 취하는 사람은 나였다. 나는 그들과 이야기가 깊어 갈수록 더 어리던 시절 자학으로 술을 마셔 대던 것처럼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 사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는데 얘기 좀 해주시죠. "

" 고생 많이 한 사람이지."

" 그건 저도 약간은 기억을 해요. "

그들은 내게 들려주었다.

해방 후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바람처럼 마을에 흘러들어 왔다는 것을 . 그리고 에미없는 두 부자가 동네 천덕구러기로 살았다는 것도. 그러니 엄밀히 말해 내가 태어난 곳 외에 이 마을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또 얘기했다. 술망나니이던 할아버지를 보살피느라 아버지는 열댓 살부터 손톱이 빠지도록 마을 사람들의 머리를 감겨주고 이발소에서 일했다는 것도. 그리고 어디서 굴러온 여자를 하나 묶어 두어 면도를 가르쳤다는 것도. 그게 그때만 해도 '도사' 라 불리우던 내 어머니였다는 것도.

이발사를 '깍새'라고 낮추어 부르고 면도사를 '도사'라고 비아냥 대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어렸다.

맞다. 나는 기억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피곤죽이 될 때 눈에 핏발을 세우던 여인의 목소리를 .

" 도사 이년 어딨어. "

나는 모두 옛일이라고 잊고 싶었다. 그건 아주 오래 오래 전의 일이라고 털어버리고 싶었다.

" 왜 이발 일을 그만두셨어요. "

" 누구, 자네 아버지 말인가? "

" 예. "

사내는 성큼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억을 하지 못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의 머뭇거리는 행동이 더욱 궁금증을 자아냈다.

" 그때, 일이 좀 있었어요. "

"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

" 그저 ...... "

중년은 끝내 말을 꺼내기 싫은 눈치였다.

" 괜찮습니다. 다 지나간 얘긴데 그냥 말씀해 주시지요. "

나는 갑자기 너붓한 몸짓으로 돌아갔다.

" 허긴, 세월이 이만큼 흘렀으니 일도 아니겠구만. "

중년의 사내는 얻어먹은 술값을 하는 양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 사실 나도 들은 얘긴데 말이야. 그날 저기 조합장 권씨 말이에요. 그 양반네 하고 이 춘백씨 하고 좀 웬수지간이였어. "

중년은 나를 바라보기가 민망한지 얼굴은 아예 다른 사람을 향해 돌린 채 얘기를 시작했다.

" 이이네가 떠돌이로 들어와 어렵게 살면서도 그 집 말을 잘 안들었지. 그래 논일도 잘 안 시키더라구. 하여튼 사변 전부터 그런 불편한 사이였는데 사단은 전쟁 중에 났지 뭐예요. 동란 중에 한 차례 인민군이 몰려와 살고 나중에 수복이 되어 국방군이 들어 오고 난리 법석이었잖나. 아 그 와중에 마을서 서로 찌르고 해꼬지 하고 했잖아요. 그러던 어느날 다시 국방군이 들어오고 김포읍에 포병부대가 들어 앉았는데 갑자기 부대에서 이이 조부를 부르더라구. 알고 보니 누군가 이이 조부를 빨갱이로 일러 바쳤대요. 그게 누군고 하니 조합장이었다구. 그러니까 춘백씨 아버지가 인민군이 들어왔을 때 지게질을 했는데 그게 조합장네 쌀가마니 나르는 일이었다구. 아니, 그때 한두 사람이 지게질을 했나. 어떤 이는 달구지도 끌었는데. 그런데 다들 강제로 일했다 해서 아무일 없다가 갑자기 춘백씨 아버지만 잡아다가 냅다 조진 거야. 읍 단위로 부역자 숫자를 꾀어 마춘거지. 병신이 되어서 나왔어요. 조합장에게 밉상으로 보였다가 세금을 톡톡히 물은 거지. 동네 사람들이 모두 안됐다고 혀를 찼지만 원체 난리 통이니까. 그냥 저냥 넘어 갔어요. 그러다가 몇 해 지나 춘백씨가 이발소에서 머리 깎을 때지. "

중년은 이쯤에서 맥주 잔을 단숨에 비웠다. 나는 별 동요 없이 그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 아휴, 사뭇 기드래요. "

" 뭐가요? "

반백의 사내가 맞장구를 쳐주었다.

" 뭐긴 뭐야. 조합장이지. 협동조합 앞마당에서 저기 윗말 서씨하고 몇몇이 객담을 나누고 있는데 글쎄 조합장이 목에다 하얀 광목천을 그대로 동여맨 채 어구구구, 하면서 얼굴이 새파래져 가지고서는 이발소를 기어 나오드래요. 그리곤 냅다 사람 살려, 하며 달아나 버리더래. "

" 그게 뭔 일이래요 ? "

이번엔 여주인이 바싹 다가앉았다.

" 후에 춘백씨가 서에 갔다오고 또 권씨 자식들에게 치도고니를 당하고 나서 들은 얘기지만 조합장이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제풀에 놀라 일을 벌인 것이더라구요. 이발소 의자에 앉아 이발을 하던 도중에 면도를 하려고 이이 아버지가 면도칼을 들고 다가서자 조합장이 갑자기 그 난리를 피더래요. 춘백씨 말은 오히려 자기가 놀라 자빠질 판이었다는데 말야. 글쎄 면도칼을 들고 주둥이에 비누칠을 할 참으로 조금 뜸을 들이고 있자니 갑자기 노인네가 그 망녕이더래. 노인네는 노인네대로 춘백씨 눈빛이 사람 잡을 눈빛이었다고 지서에 고소를 하고, 하여튼 온 동네가 들석들석 했다니까. "

" 그래서 이발소를 쫓겨났습니까 ? "

이번엔 내가 물었다.

" 쫓겨나진 않았지 아마. "

" 그런데 왜 이발을 그만두셨어요. "

" 왜긴 왜야. 모두 권씨 탓이지. 바로 뒤 조합장 안시켜 준다고 가게 문을 닫아 버렸어요. 그 통에 이발소고 구멍가게고 다 날라갔지. 그땐 이 동네에 권씨 세력이 어땠는줄 알아. "

그는 말미를 흐리며 속삭이듯 상체를 내게 가져왔다.

" 하여튼 장해요. 이렇게 출세를 해 가지고 고향에 돌아오고. "

중년의 사내는 취기를 빌어 우리 가족의 잊혀진 과거에 대해 숨김없이 얘기해 주었다. 가끔 다, 잊어버려요 하며 얼르기도 하며 쓰라린 내 유년에 대해 풀어헤쳤다. 그러나 새로울 것은 없었다. 이미 그렇고 그렇게 살아온 마당이니까.

나는 남은 막걸리를 집어치우고 맥주로 모두 술을 바꿨다. 그래야만 무너져 내리는 가슴을 잠재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내들은 내가 주문한 맥주 다섯 병이 더 방안에 들어서자 두 눈이 번쩍하며 입이 벌어졌다. 나는 통조림과 돼지고기도 조금 볶아 달라고 큰 소리를 쳤다. 사람들은 고기 굽는 냄새가 가게안에 퍼지자 이게 왠 때아닌 잔치냐 하는 횡재수로 연신 맥주를 들이켰다.

" 이제 그 권씨들 많이 안 삽니까. "

" 그럼, 그 세도를 부리더니 모두 망해서 고향 떠났어요. "

누군가 거칠어지는 나의 목소리에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 여기 땅 한 평에 얼마 합니까. "

나는 허세를 부렸다.

" 왜 땅 사려구요? "

여주인은 구전이라도 생각하는지 침을 다시고 달려들었다.

" 그러니까 이 양반이 부자가 되서 땅 사러 왔구먼. 어쩜. "

" 아,예, 값이 맞으면 그저...... "

이어 나는 그들이 알턱없는 영어로 된 명함을 몇 장 꺼내 놓았다. 명함을 한 장씩 받아든 사람들은 감탄했다. 그 위에 새겨진 글자를 읽지 못하는 자신들을 탓하기보다 이런 명함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대단한가 보다 하는 주눅든 표정으로 몇 번이고 명함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고이 간직하기 위해 명함을 안주머니 속에 넣었다.

"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호주인을 상대로 하는 청소업 주인이 영어로는 사장이라고 되어 있었다. 유학생 서너 명을 데리고 다니며 슈퍼마켓도 청소하고 사무실도 청소하는 직업이었다. 나는 안타까웠다. 그들이 그 프레지던트라는 영어로 된 글자를 못 읽는다는 것이. 나는 말해주고 싶었다. 25년만에 돌아온, 할아버지의 한과 천시와 능멸을 받으며 살던 '깍새'와 '도사'의 아들이 '프레지던트'가 되어 돌아왔다고.

두 시간 여를 더 방안에서 보냈다. 나는 몹시 취해 있었다.

" 왠 잔치야. "

다시 여자 하나가 더 방안으로 들어선 것은 두 시간 하고도 30여분을 보낸 늦은 밤이었다. 열두 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값싼 비닐 파카에 모습이 초췌했으나 30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였다. 문을 열고 성큼 발을 들여놓는데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었다. 여자가 들어서자 문턱에서 진열대를 향하고 있던 여주인이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한일자에서 여덞 팔자로 굳게 일그러지는 입술이 여자에게 여간 박대를 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젊은 여자는 그런 여주인의 안색을 보면서도 싱글싱글 선웃음을 띄우며 술판이 벌어진 방을 향해 걸어왔다. 절룩거리며 몇 발걸음에 진열대를 건너뛰었다. 익숙한 몸짓이었다.

" 어, 말로만. "

" 히히히. "

여자가 푼스럽게 웃음을 흘렸고 가장 나이 어린 사내가 그렇게 한 마디를 던졌다. 여자는 웃음을 흘리며 방 안쪽으로 들어서 내 곁 빈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갑자기 양반 자리에 상것이라도 낀 것처럼 한동안 사내들의 눈빛이 일그러졌다.

" 왠, 잔치냐구. "

여자가 입맛을 다시며 싱글거렸다.

" 아, 잔치 할만도 하겠네. "

얼굴이 붉그레해진 반백이 간사스럽게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 어, 말로만. 이 양반도 여기 사람인데 글쎄 출세해서 돌아왔다지 않아. 옛날 내가 잘 아는 형님 아들이야. 말로만은 모를 거야. 춘백이 성이라고."

나이 많는 중년은 내가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이라는데 힘을 주었다. 마치 그 옛날 아버지가 영주애비를 놓고 그랬던 것처럼.

나는 옆으로 약간 자리를 물리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 아휴,...... "

나의 인사를 받은 그녀가 사뭇 땅바닥에 파고들듯 허리를 숙였다.

" 아, 말로만이 바로 그 권씨 아니야. 권씨. 하하 "

젊은이가 다시 말을 거들었고 권씨라는 그 한 마디에 무의식적으로 굽었던 나의 어깨가 펴졌다. 반백과 중년은 씁스름한 얼굴로 계속 그녀를 비껴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눈빛 속엔 느끼한 염기가 이글거렸다. 권씨. 나는 모른 척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 이쁜 이름 놔두고 무식허게들 말로만이 뭐야 말로만. 허긴 거기들이 마구잽이로 불르긴 아까운 이름이긴 하지만서두. '

여자는 별 관심없단 투로 두부에 손을 댔다.

그러니까 그녀는 마을에 얼마남지 않은 권씨 중의 하나인 셈이었다.사내들은 그녀가 들어선 후로 계속 그녀를 향해 심한 농짓거리를 해대고 있었다. 나이든 중년까지 농간을 해대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간간히 그녀에게 면박을 주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약간 모자라는 듯한 여자는 그때마다 아무런 반감도 없이 넙죽넙죽 김치보시기에 손을 디밀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렇게 지내오는 터수들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로선 이유없이 젊은 여자를 몰아세우는 꼴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실세한 권씨라지만 다리에다가 정신까지 온전치 못하다면 더욱 그녀에게 아량을 베풀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였던 것이다.

" 말로만. 오늘은 정말 술 한 잔 사는 거야? 맨날 말로만 그러지 말고 한 번 사봐 또 돈 없지? 또 내일이지? 봐, 그렇다니까. 그래도 저 주둥이 하난빵빵해요."

젊은이가 다시한번 이죽거렸다.

" 술 얻어 먹을 데가 그렇게 없냐. "

반백이 혀를 찼으나 역시 그녀의 편은 아니었다.

" 주둥이만 빵빵한가 ? 젠장 돈 없으면 한번 주든가. "

" 주긴 뭘줘. 흑싸리 껍데기를 쭤? 다음에 살께."

이력이 난 그녀 역시 걸진 말투로 받아넘겼다. 그러면서 마치 누가 빼앗기라도 하듯 거푸 술잔을 비웠다.

" 여자가 숫기가 좋네요. "

나는 그녀가 화장실에 간 사이 넌즈시 여주인에게 말을 붙였다. 절둑거리며 뒤뜰로 나서는 그녀가 여간 안스러워 보이는 게 아니었다.

" 권씨야, 권씨."

여주인이 여자가 나간 문쪽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눈꼬리를 씰룩였다. 깐죽이는 그 손가락질이 여간 업수이 여기는 꼴이 아니었다. 나는 그 세도 좋던 권씨라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지만 그렇게 막대할 권씨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대접을 받을 권씨가 아니었던 것이다.

" 시집 갈 나이는 지나 보이는데 아직 고향서 사는군요. "

그러나 역시 기억에는 없는 여자였다.

" 지 에미하고 둘이서 살잖아요. "

" 그래요 ? "

여자가 나가자 사내들은 바로 자신들만이 아는 마을 얘기로 입에 거품을 물었다. 여주인이 나를 상대했다.

" 시집 가서 그 이듬핸가 교통사고가 났잖아요. 충청도 어딘가에서 배추를 떼다가 가락동에 넘기는 일이었는데 사고가 나서 서방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혼자 살다가 에비 죽고 엄마 찾아 들어온지 한 오년 됐어요. 교통 사고 때 다리 저 모양 되고 약간 머리가 이렇게 됐대요. "

여주인이 이번에는 손가락 하나를 귓전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나는 권씨네 딸이 아무리 출가외인이라지만 배추 도매나 했다는 말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 아니 돈 있는 집안이었잖아요. "

" 아, 거긴 모르겠지. 저 애 애비 턱에 권씨네 집안 다 날라갔다고 하잖아. 서로 엉겨 싸움질을 하고 "

" 네. ? "

" 한 20년 전 그러니까 박대통령 시절에 말이예요. 권씨네서 국회의원 하나 만든다고 저 벌판에 있는 땅을 국유지로 내놨잖아요. 한강 고수부지가 된 땅 말이예요. 그리고 뒤산은 6.25 전승빈가 뭔가로 내놓고 말이얘요. 다들 국회의원 하나 나온다고 했지 그땐. 아, 정승 판서보다 국회의원이 낳다고 얼마를 설쳐댔는데 그때. "

" 그런데요. "

" 글쎄, 땅 다 내놓고 위원장인가 뭔가 하며 쫒아다닐 때였어요. 칠판녀돈가 친구년인가 박대통령이 봄에 앞 벌판으로 모 심으러 왔잖아요. 봄이면 몇 해 건너 대통령이 김포 벌판에 와서 모심고 난리를 폈거든요. 그때마다 동네 사람들이 죽 나가서 같이 모를 심었어요. 잠깐이지 뭐. 사진만 찍고 가는 일이니까. 못줄 한뼘 옮기고 논뚝에 앉아 대통령이 김포 막걸리 한 잔 하는 장면인데 그 옆에 저니 애비가 앉았더랬어요. 그런데 그이가 실성을 했나, 박대통령에게 농담을 한 마디 한다는 게 그게 사단이 났지 뭐유. "

" ...... "

" 아, 기자 양반들 죽 둘러앉아 있는데, 농담으로 이런 거라. 모 심는 재미는 허리가 좀 빠져봐야 하는데 잠깐 물만 축여서 뭐 좀 아시겠어요. 하고 말이야. 아 그때가 어떤 세상이야. 대통령이 강화 갈 때 강아지가 신작로에 뛰어 들었다고 집안 파탄나던 시절인데. 영주 애비는 농담이었다지만 그게 야당 신문에 나고 난리가 아니었다구. 결국 국회의원 자리 날라가고. 재산 다 날라가고. 쪽박들 찼지. 그런데 참말 독하데. 그이는 끌려가 고생하고 나와서도 끝내 마을을 뜨지 않더라구. 권씨네 대부분이 마을을 떴는데 말이야. 나중엔 그게 농담이 아니고 일부러 뼈 심은 얘기였다는 말도 있고. 하여튼 그렇게 동네 떠나지 않다가 제 풀에 죽고 어째, 아들 없으니 딸하고라도 살아야지. 엄마가 공항시장 나가 좌판 하잖아요. "

그때 여자가 돌아왔다.

" 시원해? 엉덩이 시려울텐데 이리오지. 내 무릎 위에서 따뜻하게 삶아줄테니. "

그녀는 그곳에서 작부만도 못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사내들의 서슬퍼런 농짓거리는 끊이지 않았다. 마치 그렇게 권씨 문중을 능멸함으로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기라도 하듯 이유없이 그녀를 몰아세웠다. 그때마다 여자는 부끄러움도 없이 웃어제낄 뿐이었다. 정말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여자 같았다.

마을엔 그렇게 새로운 권력이 만들어져 있었다. 8년만의 귀국과 25년 만의 귀향엔 또 그런 새로운 힘이 무섭게 발길질을 해대고 있었다. 타지인인 사내와 달리 중년과 반백의 말 한 마디 한 마디 속엔 그런 한풀이가 서려 있었다. 여자에게 그 어떤 잘못도 발견할 순 없었다. 단지 그녀는 권씨라는 이유 하나로 그렇게 모진 매질을 당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심사를 이해할 것도 같았다. 은행나무 아래 곤죽이 되어 늘어진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나 역시 그녀를 향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복수를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답답했다. 그렇게 한들 깍새가 다시 헤어디자이너로 대접을 받는 것도 아닐 것이었다. 부역자로 끌려간 할아버지의 몰매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막연히 폭력이 난무할 뿐이었다. 주인 잃은 주먹이 허공에 날아갈 뿐이었다. 정신이 혼미했다. 그리고 어느덧 나도 그 힘과 폭력에 가담을 하고 있었다. 취기가 세상을 빠르게 회전시키고 있었다. 여자가 몇 번인가 자리를 옮겼다가 다시 내곁에 와 앉아 있었다. 나는 덥석 곁에 앉은 여자의 손을 잡았다.

" 어. 이상하다. 하하. 오늘 말로만 정말 무슨 일 나나보다. 간만에 녹슨 사타구니에 기름 좀 치는거 아냐. 하하. "

반백이 혀 꼬부라진 소릴했다.

" 말로만 ? 아, 오늘 미스 말로만에게 내가 한 잔 사지. "

그녀가 여자로 보인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여자 이전에 바로 권씨 문중의 딸이었다. 6.25 때 할아버지에게 빨갱이의 덧을 씌어 병신을 만들고 아버지를 은행나무에 앉힌 채 발길질을 해대던 권씨의 여자였다. 깍새와 도사라고 천시 하던 마을의 주인이었다.

내 혀는 겨우 말을 뱉을 정도였다.

" 정말 ?"

그녀 역시 몸가짐이 풀어져 있었다. 그동안 나의 씀씀이에 사내들은 단단히 한풀이 꺽여 있었다. 어느새 그들은 취기를 빌려 뒷걸음질을 했다. 나와 말로만의 의기가 맞아떨어지는 듯 하자 그들은 슬며시 자리를 떴다. 시간도 열 두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중년이 먼저 몸을 휘청이며 눈길로 나섰다. 반백의 집에서 전화가 오고 두 사람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 말로만, 귀한 손님 잘 좀 모셔 응 ? "

그들은 여자의 신변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만큼 그들은 가슴 깊이 그녀를 내동댕이 치고 있었다. 여주인은 언제부턴가 화투판으로 사용하는 군용담요를 둘둘 말아 벼게로 사용하며 깊이 잠들어 있었다.

" 일어나. 일어나. "

나는 여자의 팔을 잡고 문밖으로 이끌었다. 여자가 절룩거리며 따라나섰다.

" 정말이야 ? 정말 공항 나갈꺼예요. "

" 아 그렇다니까. 최고로 한 잔 사지. 나 돈 있어. "

나는 양복의 한쪽 깃을 들석였다. 여자는 샤시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문 밖엔 함막눈이 솜틀처럼 쏟아쳐 내리고 있었다. 세상이 마치 거친 파도 위에 쓸려가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그녀의 팔목을 잡고 쏟아지는 눈속으로 나섰다.

택시는 보이지 않았다. 눈 속에 멀리 김포공항의 활주로를 지키는 안내등이 힘겹게 벌을 서고 있었다. 여자는 한쪽 다리를 끌다시피 힘겹게 길을 건넜다. 그녀의 몸이 늘어질 때 나는 힘껏 팔을 낚아챘다. 거친 나의 행동에 여자가 몸을 사리며 나를 올려다 보았다. 나는 그녀의 팔을 놓지 않은 채 택시를 기다렸다. 택시는 오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지듯이 하얗게 눈발이 쏟아지고 두 사람은 그렇게 한동안 눈을 맞으며 길가에 서 있었다. 인적도 보이지 않았다. 스러지는 눈발과 어둠 속에 마을이 유령처럼 희미하게 모습을 보일 뿐이었다.

" 엄마가, 엄마가 혼자 있어서 안되겠어요. "

눈속에 술기운이 가시는지 한동안 말없이 섰던 여자가 몸을 돌려 애원하듯 말했다.

" 안돼, 조금 있으면 차가 올거야. 한 잔하고 빨리 보내줄께. "

언제 너희 권씨가 남의 사정 봐주던 사람들이었던가. 언제 너희가 힘 없는 사람의 부모 자식 생각해주던 사람들이었단 말이냐. 자식 앞에서 몰매를 가하던 그런 족속이 아니더냐. 이까짓 것. 네 몸을 덮친다해도 너는 할 말이 없는 권씨 아니더냐. 내겐 그럴 권리가 있어. 깍새와 도사가 받은 고난에 비하면 이것은 애들 장난만도 못하지.

나는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눈발이 녹아 눈가를 적셨다. 나는 눈가에서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열기 속에 두 줄기 물이 흘러내렸다. 가겠다고 팔을 비틀던 여자가 그런 나의 눈 주위를 보곤 그대로 동작을 멈추었다.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여자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 택시가 올거야. 가자구. 가, 가잔 말이야. 썅. "

나는 콧물을 훌쩍이며 그렇게 작은 소릴 토해냈다. 눈발은 더욱 거세어 지고 있었다. 손목을 움켜 쥔 나의 손과 그녀의 팔이 작게 경련을 일으키며 눈속에 흔들렸다. 멀리 벌판 한가운데로 불빛이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납작한 모습이 택시 같았다. 나는 손에 힘을 주었다. 여자는 힘 없이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가느다란 사람의 목소리가 눈발처럼 허공에 뿌려졌다.

" 영주야...... 영주야...... "

겨우 들릴 듯 말 듯, 노파의 숨 찬 목소리가 눈속을 헤치고 건너왔다. 길 건너에 누군가 눈사람처럼 동그마니 어둠을 뿌리며 서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기어들어 갈 듯 나직히, 그런 목소리가 다시한번 들려왔다.

" 영주야아 ...... "

철거덕 철거덕, 체인 소리를 내며 택시가 힘겹게 눈 속을 헤치고 벌판을 넘어오는 밤이었다.

 ([내일을 여는 작가] 1997년 수록)

 

박철(시인, 소설가) -------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나 단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7년 <창작과 비평>에 「김포」외 14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김포행 막차』『밤거리의 갑과 을』『새의 全部』『너무 멀리 걸어왔다』『영진설비 돈 갖다주기』가 있다. 소설 [조국에 드리는 탑]으로 [문학사상] 신인상을 받으며 소설가 등단. 이메일 bch2475@hana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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