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 체계의 필요성
정치를 잘하려면 정책이 필요하고 각 관계부처에 바른 제도가 필요하다. 하여 요소에 필요한 제도는 법률을 말하는 것이며 바른 법률이 곧 민심에 좋은 방향을 불러온다. 반면에 제도가 어설프면 사기가 낭자하고, 사기가 낭자해 지면 민심이 흉흉해져 이에 악성 루머가 따르기 마련이다. 사기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제도의 법률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도나 법률이 피해를 준다하여 정책이나 제도를 부정하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국가에 정치인이 없고 정책이 없고 제도와 법률이 없다면 약육강식의 존재가 강해져 동물적 삶의 방식만 존재하게 된다.
이런 삶은 먹이사슬에 의존한다면,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지옥 같은 삶이 될 것이다. 하여 사회에는 공존에 법률이 꼭 필요한 것이다.
나의 이런 언급에 당신은 기본적이고 당연한 것을 왜 구차스럽게 길게 늘어놓는가하고 물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당연한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문학인이 너무 많기에 가장 기본적인 체계를 먼저 언급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국가정치를 빙자해 문단설치를 주장하는 것이다. 문학계에 바른 문인이 존재함에는 문단이 바로 서야 질 좋은 양서에 문학이 존재한다.
그러나 지금 문학계에 체계가 있는가?
문학계를 바로잡을 문단은 있는가?
문학계에 정책을 실시할 문인정치인이 있는가?
문학에 문인 정치인이 없으니 문학에 필요한 잘못된 제도나, 부족한 법률의 문제도 시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문학이라는 것들이 온통 사회에 불만이나 찌질이 궁상이나 떨며 변패 같은 글만 낭자해 지지 않는가.
우리는 국책을 운영하는 정치인이, 모든 정책을 실시하는 제도와 법률을 정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국책은 정치인이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큰 틀에서의 정책을 설치하는 것이지 문학, 자동차, 귀금속, 화물, 등등의 계열에 필요한 상거래나 계열에 필요한 제도의 법률을 정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하여 각 계열은 공적인 협회나 단체를 통해 상거래질서의무의 법률을 만들어 국회에 제기하고 국회는 이를 검토하여 법으로 상정하여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어떤가. 이런 체계나 제도가 없기에 국회가 대신하여야 하고 정부가 정책을 펴나간다. 어찌 국회나 정부가 영세업체나 각 계열의 입장을 속속들이 알고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가.
정치의 이런 세태에 빈번한 불합리가 따르니 민생고가 힘들면 정부를 향해 국회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시위를 해야 한다. 그러니 정치도 목소리가 크면 고개 숙이고 목소리가 작으면 묵과해 버린다.
이것이 현실에 불합리한 정치다. 이 얼마나 혼란한 세상인가.
국가정책은 전체적 국민의 편의성을 보아 설치하는 공적인 국회의 일이고. 문단은, 문단의 주자들이 문단에 공적인 법제도를 설치해야 혼란을 줄일 수 있다.
하지만, 문학계의 문인은 베스트셀러 하나 내놓으면 목에 힘을 주고 글하나 잘 쓰면 만사가 해결된다는 식으로 윽박지르고 희롱한다.
글을 잘 쓰면 해결되는 이치를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글을 잘 써놓고도 낙선하여 표절 되는 게 문제고, 한사람을 뽑고자 수백에서 수천 명의 글이 쓰레기처럼 농락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
그 잘라 빠진 빈껍데기에 불과한 거품 때문에 문학 지망생이 신음하고 문학상이라는 꿈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다.
지금 문학계를 보라!
문단이 없기에 예전부터 문제를 일으킨 등단제도하나 바로 세우지 못하고 있다. 설사 등단제도, 표절문제, 공모제도, 문학시장에 필요한 상도 등을 바로 세운다 해도 이를 관리할 문단이 없으니 무용지물이다.
누가 공적인 문제점을 고발할 것이며, 무슨 힘으로 개인이 바로 잡는다는 말인가. 문인은 정치계를 탓하기 전에, 국가정사를 탓하기에 앞서, 문학계의 잘못된 환경부터 바로 잡고서 큰소리 쳐라.
나는 문학을 필요로 하는 단체나 업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문학이 존재했고 출판사나 문학단체가 있었기에 문인이 존재했던 것이다. 하여 그간 문학계를 이끌어온 노고를 높게 평가한다.
이에 문학을 주관하는 단체에게 끌려 다닌다고 하나 그 체계에 불합리한 면이 없다면 한 국가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따로 문제제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을 이끌어가는 출판사나 문학단체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퇴폐적인 모습도 함께 하고 있어 상당한 문제점을 일으키고 있다.
또한, 문학을 주관하는 단체나 출판사이외에도 문단에 등단한 이들의 모임인 문인협회나 문인작가회의 등 여러 단체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을 위한 단체이지 한국의 전체적 문학을 집행하고 이끌어가는 단체라 할 수 없다.
이는 단체를 이끌기 위해 특정한 문인으로부터 협 회비를 받기 때문에 문학에 몸을 담고자 꿈꾸는 지인을 위하기보다 각 협회에 소속된 문인을 위한 단체로 전체적문학계를 본다면 점조직에 불과하다.
그러니 문학에 꿈꾸고 있는 문인이 각 협회에 종사하기보다 선배를 버리고 스승을 버리고 문학을 필요로 하는 출판사나 업체에 목매달아야하는 것이다.
좋다. 지망생도 기성문인도 입에는 풀칠을 해야 하니 상거래로서 문학 업체에 목을 매는 것은 당연하다치자. 하지만, 자신이 공모한글에 심사평은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또한 권리는 찾아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실제적 상황을 보면 응모 비를 받지 않기 때문에 심사평은 말할 것도 없고 공모에 참가한 저작물이 접수가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왜? 죄지은 사람처럼 전화로 확인을 하거나 게시판에 건의를 하여야 알 수 있는가. 의무적으로 알려줄 수는 없는가.
이는 전화나 인터넷을 관리하는 사람도 접수확인을 묻는 사람도 같은 대답과 물음에 피곤할 따름이다.
또한, 문학공모 주선단체가 심사평을 공모자에게 전달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점도 있다. 공모에 참가한 응모물이 수백 편 수천편이 되기 때문에 그에 따른 예산이 엄청난 비용으로 소요된다.
그러나 응모자가 많으면 심사원을 늘리면 되는 일 아닌가. 공모한 글에 심사비를 받는다면 공모심사평에 대한 비용은 충분히 보충하여 문학상주체측에 부담감을 줄일 수 있지 않은가. 이런 응모 비는 문학상을 주체한 주체측이 오히려 이익이 생길 것이다.
또한 심사비를 받게 되면 응모자수는 줄어들 것이다. 급한 욕심으로 부족한 저작물을 공모하고 보자는 식의 응모자가 줄어들 것이고, 마구잡이의 공모자도 없어질 것이다.
반면에 자신의 글에 꼭 도움을 받고자하는 응모자는 늘어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공모저작물에 자신감이 있거나 도움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로 축소된다.
지금의 심사 방법은 직접 살펴보지 않아도 빤한 이치이다. 예산이 부족한 주체측은 심사원 한명이 수십 편 수백편의 공모 물을 심사하게 할 것이다. 심사에 대한 비용과 인력을 충당할 수 없으니 이런 부 합리한 심사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이에 심사원은 제목만 보거나 시높시스도 대충검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행태는 공모참가자나 심사원, 주체 측, 모두에게 피해주는 일이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는가. 도움을 받았으면 감사하는 마음이 따라야 하고 마음에 가책이 있다면 도움에 대한 답례를 하여야 한다.
학생도 예외는 없다. 학생들에게도 적정한 선의 공모 비를 받아야 피해나 표절의 혼란으로부터 정리된다. 이 또한 학생들이 배워야할 도리이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나는 3~4년 전에 메일로 출판사에 일반투고 한 적이 있다. 물론 그 당시 본인의원고가 수준이하에 글이라는 것을 인정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출판사들은 일반 투고의 원고가 접수되어 있는지 안 되었는지도 모르고 있는 출판사도 있었다.
결론적으로 출판사들은 일반투고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일반투고 게시판을 운영하는 것이다. 일반투고가 출판사에게는 하찮은 원고일지는 모르나 저작자는 몇 년 아니 몇 십 년이 걸리는 원고일지도 모르는 일인데 떡하니 게시판을 설치해놓고 문인의 원고를 쓰레기처럼 농락하고 있는 것이다.
기성문인들이 월간지나 2류 3류 출판사의 모습을 둘러보라. 명문 국문학을 정공한 문인들이나 제법 명성이 있는 문인들이 개인 출판사를 낸답시고 당선작에 돈을 요구하는 못 볼 꼴 보게 하는 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무슨 짓거리인지 모르겠다. 대학에 들어가려면 입학원서의 수수료를 내야하고 응모작에 심사를 보려면 인력이 손실되기에 당연히 응모 비를 내야 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런 당연한 대가가 없으니 예산에 비용이 부족하여 당선자에게 당선 금을 줘도 부족한판에 당선 금을 당선자에게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개개인이 10~20만원의 응모 비를 지불하면 심사에 따른 문제가 해결되는데 당선자가 100만 원 이상을 내게 되면 당선자도 부담이 생기고 문학상을 주체한 주체측도 막대한 피해가 생긴다. 더구나 당선자가 찬조한 당선의 사례금을 모두 찾아가기 때문이다.
(문학상 월간지나 계간지의 일정량과 상패 지급에 따른 비용)
이런 행태는 서로의 명예를 갉아먹는다.
이는 문학의 실상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악성 루머를 퍼트리게 만든다. 출판사가 당선 비를 요구하네, 등단 비를 주고 시인이나 작가가 되었네, 하며 손가락질의 명분을 주는 것이다.
문학지나 당선자 모두가 얼마나 자존심상하고 분통터지는 일인가.
이것뿐인가. 응모작이 당선작으로서는 부족한데 출판사가 돈을 받고 당선시키는 결론도 된다. 게다가 이런 요구를 받아 들여 당선하는 문인은 자신의 글이 부족한줄 알면서도 돈으로 당선하고 보겠다는 결론이다.
이 얼마나 부끄럽고 어처구니없는 문학계의 실상인가.
이는 돈을 요구하는 그들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문단의 체계와 운영이 바로 서질 않았기에, 공모에 따른 피해를 줄이기 위해 출판사가 존립의 길을 찾는 것이다.
어쩌면 영세 문학지가 돈을 요구하는 행위는 존립과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는 문학계의 잘못되어 있는 체계 때문에, 실력 있고 올바른 정체성을 가졌던 영세문학지의 정신상태도 파괴하는 행위이다.
과연 누가 잘못하고 누가 잘못된 것인가. 그러나 많은 지인들은 돈을 요구하는 영세문학지 또는 그 출신의 문인에게 손가락질과 욕을 한다.
그러나 그대가 설사 일류 문학지에서 당선되었다 해도 욕하기 전에 문학계의 실상을 깊숙이 바라보라.
문인이면서 문학계의 실상을 보지 못했다면 그대는, 빈껍데기로 등단한 허울에 결국 자신의 얼굴에 자신이 침 뱉는 꼴이다. 실상이 이렇다 해도, 이들이 등단해서 모두 제대로 된 문인 역할을 한다면 별문제가 있겠는가.
그러나 더 큰문제가 따른다. 능력도 부족한 이가 마구 잡이 출간에 출판사는 물론 문학계에 오른 기성문인의 명예나 자존심도 함께 갉아먹는다.
또한, 돈을 들여 등단한다 해서 모두 등단에 욕심으로 글을 쓰는 문인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영세 출판사에서 등단을 하고 영세업자의 발전을 위해 적당한 금일봉으로 찬조하는 지인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돈으로 등단한 이들의 마구잡이 출간에 따른 여파로 독자들이 아예 3류 출판사의 출간 물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게다가 자비출판까지 등단이라 하질 않는가.
이는 비록 명성 있는 문학상에 공모하지는 않았지만, 발굴되지 못한 실력 있는 문인의 글도 함께 매도되는 것이다.
만약, 문단이 바로서서 사회에 공헌한 문인이 등단했다면 등단 자가 3류 출판사에서 출간을 하든, 1류 출판사에서 출간을 하든,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문단에 등단한자가 3류 출판사에서 출간한다면 이는, 인기 있는 연애 인이 출판사를 위해서 광고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등단제도는 영세 출판사나 문학상 주체 측에게도 힘이 되는 것이다.
출판사나 문학상주체측에서 발굴한 인재의 활략으로 문단에서 인정하는 등단에 올랐다면 영세문학지는 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대단한 일인가.
등단제도가 바로서면 영세문학지는 인재발굴에 더욱 힘을 쏟고 올바른 문학지를 출간하는데 더욱 정성을 들일 것이며, 빈익빈 부익부의 대 형화 되는 출판사의 세태에도 큰 영향을 주는 것이다.
현재의 문학계는 출판사가 문인을 광고해준다. 물론 공존공생의 법칙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사람 나고 출판사 났지, 출판사나고 사람 났는가. 이치가 뒤바뀌어 돈이 문인을 군림하는 문학계가 된 것이다.
등단이라는 자체가 글을 선보이는 자리이기에 골프하는 사람이 필드에 나가 머리 올리는 것과 같다 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등단이상의 체계가 없으니 이런 병폐적인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문단에 등단이상의 까다로운 제도가 있다면 글을 쓰는 사람이 별 의미 없는 등단에 욕심을 내겠는가. 또한 글을 쓰는 지망생이 출판사나 단체에 얽매인 등단에 목을 매겠는가. 정말 잘못되어 있는 등단제이다.
하여 데뷔는 문학지에서하고, 등단은 문단에서 하도록 데뷔와 등단의 확고한 선을 그어야 한다. 물론 문단에서도 데뷔할 수 있다. 그러나 등단은 사회의 공헌도에 따라 문단에서 하사하는 명예여야 한다. 문단에서 데뷔했다고 등단한 것이 아니다.
문학계에 문단체계가 없다는 것은 일제치하처럼 주권 없는 문인이 종살이처럼 유지하는 것이다.
글을 쓰는 선비가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진정 대한 독립을 원했던가? 그렇다면 문단을 바로 세워 문단독립을 세워라!
나의 주장에 문단체계를 부정하는 주장도 있을 것이다. 문단에 권력과 힘을 부여하게 되면 비리나 이권이 개입되어 문단을 어지럽힐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전혀 틀린 주장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문단에 체계가 바로 잡히지 않았고 문단에 우두머리가 없으니 어찌 되었는가. 출판사나 문학단체가 문학 인재를 발굴해야하고 문단을 이끌기에 문인은 출판사나 문학을 필요로 하는 단체의 악습에 따라갈 수밖에 없다.
물론, 이들에 의하여 인재가 발굴되었기에 공헌도가 매우 높다. 그러나 공모전에 뚜렷한 법률과 체계가 없어 표절로 인한 인재가 파멸하는 경우도 생긴다.
조경란씨와 주이란씨의 문제만도 충분히 이해가 가지 않는가.
체계와 법률이 뚜렷하지 않으니 조경란씨가 표절을 하지 않았더라도 억울함을 함부로 토로할 수 없다.
일방적으로 당하는 약자를 빤히 보면서 상대를 꼼짝 못하게 억압하는 꼴이기에 이를 본 지인이라면 결코 자기주장만을 내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주이란씨의 입장도 냉정히 따지면 함부로 표절시비를 하면 안 된다. 이는 공모에 참가한 응모작에 심사평이 없었고 원고를 폐기처분 했기에 그 증거를 찾아낼 수 없어 패소할 확률이 90%이상이기 때문이다.
하여 엄격히 따지면 조경란씨와 주이란씨의 잘못을 따지기보다 원인 제공자인 문학상주체측의 원고폐기처분에 따른 증거소멸 죄를 물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관습적으로 많은 문학상주체측이 원고 폐기처분했기에 함부로 죄를 물을 수도 없다. 분명 피해를 입었음에도 피해를 물을 수 없으니 이것이 개인과 공적인 단체의 불합리한 힘이다.
공과 사를 가리라는 말이 이래서 생겼는가 보다.
그러나 주이란씨의 입장을 보면, 빤히 보이는 개인의 피해는 참으로 미쳐서 돌아버릴 공과 사이다.
내가 이런 피해자라면 비록 정신이상자 소리를 들을지언정 문학상주체측을 상대로 피해보상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그간에 악습과 심사에 따른 많은 예산에 대한 응모비가 없었기에 문학공모에 수정명령은 떨어질지는 모르지만 보상은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주이란씨의 표절시비방법은 잘못되어 있었다. 판결도 나기 전에 사회에 표절시비를 거론한 점이다. 하지만, 충분히 집고 넘어갈 명분은 있는 것이다. 다만 때와 방법을 잘못 선택한 죄는 인정된다.
지금의 문학계에서는 인재발굴의 공로와 파멸의 피해가 50대 50으로 보인다. 아니 어쩌면 표절로 인한 피해가 파멸이70 공로가30으로 그이상일지도 모른다.
이젠 문단에도 권력이나 체계에서 오는 부정의 벽을 넘어서서 지혜의 문을 짜내야한다. 권력이나 패권주의에서 오는 부정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다. 일단 문단 체계를 잡아놓고 부정에 벽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본인이 주장하는 패권주의는 누구 한사람에게 권력을 쥐여 주는 것이 아니라 문단(문인, 출판사, 문학을 필요로 하는 단체, 서점, 독자)의 전체적인 패권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단체가 특정한 인물에 권력 없이 어찌 그 실체가 존재할 수 있는가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능하다.
미래의 문단체계에는 실제적 지존과 단체에 권력자가 존재하지만, 그 존재가 문단과 독자, 문단에 들기를 희망하는 자, 출판사나 문학을 필요로 하는 단체에게 가위바위보 같은 힘을 쥐어주고자 함이다.
하여 나는 문단의 정책을 위해 문단설치를 강력히 주장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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