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응답하라, 2012
- 인혁당 재건위사건의 사법살인을 부정하는 보수세력의 역사인식을 비판한다
선거 국면이다. 당선이 유력해 보이는 몇 사람의 후보들이 정책과 공약을 발표하면서 국민들의 선택을 요청하고 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의 출마가 국민의 요구와 기대에 대한 응답 행위라고 주장한다. 권력 쟁취와 통치 행위가 사적인 욕망이 아닌 국민들의 요구에서 비롯되었다는 일종의 정당화 논리다. 이러한 후보들의 요청과 응답은 항상 ‘미래’를 겨냥한다. 그들은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점을 거론하면서 자신들이 그 문제를 돌파하여 국민에게 분홍빛 ‘미래’를 가져다주겠노라고 약속한다. 그것이 공약(公約)일지 공약(空約)일지는 신중하게 지켜보고 판단할 일이다.
그러나 통치자에게는 ‘미래’만큼이나 ‘과거’에 대한 인식 또한 중요하다. 오늘의 한국사회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으며, 그 과정에서 어떤 것들이 ‘문제’였는가를 판단하는 잣대가 바로 ‘과거’ 인식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후보자들의 모든 정책적 판단은 이 ‘과거’와의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나아가 그들이 약속하는 ‘미래’ 역시 ‘과거’와의 연속선 위에서만 제대로 설명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후보자들의 ‘역사인식’에 관해 묻는 것은 단순한 정치공세일 수가 없다.
1974년 4월 3일 박정희 유신정권은 장기집권을 위해 ‘인민혁명당재건단체’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을 용공으로 조작했다. 유신정권은 무고한 이들을 고문하고 증거를 조작하여 유죄를 선고한 뒤 74년 4월 10일 새벽 여덟 명의 생명을 빼앗는 사법살인을 자행했다. 이 사건을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은 시인 김지하였다. 1974년 7월 ‘민청학련’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선동죄 등의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시인 김지하는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동안 ‘인민혁명당재건단체’ 사건으로 구속된 사람들을 통해 사건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1975년 2월 형집행정지로 출소한 그는 <동아일보>(1975년 2월 25~27일)에 “고행-1974”라는 제목으로 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을 고발하였다. 그리고 30여 년이 지난 2002년 9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조작극이었음을 밝혔고, 2007년 1월 서울 지방법원은 당시 사형당한 피고인 여덟 명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최근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인 박근혜는 ‘역사가 판단할 것’이라는 취지의 태도를 표명함으로써 인혁당 사건에 대한 판단을 ‘역사’의 몫으로 돌렸다. 그러나 독재정권과 사법기관에 의해 사법살인을 당한 피해자들의 유족이 생존하고 있고, 이 음모와 관련된 다수의 가해자들이 침묵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사건에 대한 판단을 ‘역사’에 맡기자는 주장이야말로 ‘역사’를 오용하는 대표적인 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정당한 물음을 특정 후보에 대한 정치공세 정도로 치부해버리는 보수세력의 안이한 역사인식이다. 우리는 묻고 싶다. 그리고 듣고 싶다. 책임을 지고 반성을 해야 할 당사자들이 버젓이 살아있는데 왜 그 책임과 반성을 역사의 몫으로 돌려야 하는가? 감히 역사를 자신들의 뒷갈망이나 해주는 수단으로 전락시킨 그들에게서 우리는 역사를 되찾아 와야 한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통치자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모든 후보들이 우리에게 ‘미래’를 약속한다. 우리 또한 그 장밋빛 ‘미래’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다. 그러나 ‘과거’의 상흔을 제대로 치유하지 못하는 한 ‘미래’가 희망으로 도래하는 경우는 없다. 그럼 점에서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과거’에 제대로 응답해야 하는 책임의 시간에 서 있는 것이다.
2012년 9월 21일
(사)한국작가회의
성명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