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건설노동자 고 하중근 씨
공권력 타살 사태의 해결을 촉구하며




인간을 물질화 하는 시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1969년 전태일의 일기 중에서)

새삼스레 37년 전, 제 몸을 불살랐던 이의 일기장을 들추는 것은, 그 시절 그이의 심정처럼 아리고 답답한 현실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자본주의가 인간조차도 물질화 하고, 생산과 잉여의 소모품쯤으로 여기는 본성을 갖고 있더라도, 어언 40여년 세월은 그 상처를 치유하고 새살을 돋게 할 충분한 시간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일당장이 건설 노동자였던 포항건설노조의 하중근 조합원이 경찰의 불법 강제 진압과정에서 다친 뒤, 뇌사상태로 17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 끝내 운명을 달리한 가슴 아픈 일이 있었습니다. 사인을 두고 경찰 측과 노조 측의 주장이 엇갈리고 있지만, 그가 경찰의 급작스런 몰이식 진압으로 사고를 당한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작년 11월 농민 전용철, 홍덕표 님이 비슷한 상황에서 운명을 달리하고 대통령의 직접 사과와 경찰청장의 사퇴라는 홍역을 치르고도, 이런 위험천만한 대응방식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은 정권의 위계와 하달이 무시되고 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국가만이 합법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라는 누군가의 정의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 하더라도, 공권력이 국민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힐 권한은 없습니다. 이는 시위대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하는 기준일 것입니다.

우리는 전태일이 어린 여성노동자들을 연민하고 그 아픔을 보듬었듯이, 여전히 아픈 노동형제들을 늦게나마 떠올립니다. 파업에 참여한 3000여 명의 노동자 중에는 47년생 전태일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들은 일당을 날리며, 가족들의 걱정을 뒤로하고 파업대오에 나섰다고 합니다. 다단계 하청구조의 건설현장에서 그들은 연수입 2000만 원도 채우기 힘든 날품팔이 인생을 조금이나마 개선해 보겠다고 나섰던 것입니다. 얼마간의 임금인상과, 근로시간 단축과, 찬바람 땡볕의 노상에서 옷 갈아입지 않아도 되게끔, 쇳가루 날리는 도시락 좀 먹지 않게끔 해달라는 요구였습니다.

할인마트의 할인 물품처럼 일당조차 덤핑치는 다단계 도급제를 폐지하자는 거였습니다. 그들은 용광로를 건설하는 사람이며, 제철소의 갖은 기반 시설을 건설하고 유지 보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콸콸 터져 나오는 쇳물도 저들의 땀방울이 섞이지 않고는 아무것도 아닌 철광석이었을 겁니다. 어떤 신기술의 제련기술도 저들이 손발을 부르트게 하지 않고서야 고품질의 제품으로 완성될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포스코의 매출이익이 수 조원을 오르내리며 한국 최고의 기업으로 유명세를 탈 때, 그들은 고작 일류기업에 날품 팔러 다니는, 이른바 노가다 신세를 벗을 수 없었습니다.

이 사회가 사람이 물질의 노예가 아니라고 선언했을 때, 다가오는 것은 여전히 군홧발이요, 날 선 방패일 때, 평생을 벌어도 감당 못할 손해배상 청구일 때, 우리는 시대의 참혹한 불화와 퇴행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싸우는 노동자들을 고립시키고 감옥에 넣을지를 궁리하는 자본과 지방권력과, 공권력, 언론의 유착을 보노라면 군부독재 시절에 익히 보았던 ‘저들만의 회합’ 을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는 노동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도 적잖이 우려합니다. 봉건시대의 노동이 노예적 노동, 타율적 노동이었다면, 현대 사회의 노동은 자율적이고, 상호 소통적이며, 가치인정의 노동이어야 합니다.

서구 선진국들의 동등한 노사관계와 상생이 이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한국사회의 노동과 자본간, 국가간의 관계는 구시대적 인식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단계 도급구조, 노동에 대한 보수적 시각, 부실한 사회적 논의틀은 노동쟁의가 극단적인 행태를 띠게 만듭니다. 밥은 법 이전의 것입니다. 밥이 평화입니다. 나아가 인간의 자존감을 세워주는 것이 평화입니다. 노동력을 쥐어짜서 창출하는 이윤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다수를 쥐어짜서 소수만 수혜를 누리는 국가 경쟁력은 착취의 경쟁력일 뿐입니다.

저들은 그야말로 이 정부가 임기 내에 반드시 해결해 주겠다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입니다. 기가 막히게도 지금 구속된 노동자들의 90%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입니다. 우리는 양방의 폭력적 대립이라는 겉보기보다는 아우성에 숨은 그들의 애원을 보려 합니다. 저항적 폭력이 정당하냐 안 하냐의 가늠에 앞서, 그들과 그들의 가족과, 그들처럼 살아가는 850만 비정규 노동자들, 그들의 비관과 꿈을 더 깊이 헤아려 보려 합니다.

또한 항의집회에서 시낭송을 했다는 이유로 소환명령을 내린 경찰의 행태를 보며, 공권력의 소양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송경동 시인에 대한 소환명령은 당장 철회되어야 합니다. 그에게 이를 이유로 신변의 위해를 가한다면 우리 작가들은 그가 섰던 현장에서 다시 쓴 격문과 시를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디 이 사회가 소외와 차별에 참지 않기를 바랍니다. 개인과 가족의 욕망에만 안주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웃의 가난하고 불안정한 밥상에도 연대하여 함께 앉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37년 전, 전태일이 살아 탄식하던 세상을 넘어, 제도와 의식이 함께 진화된 세상으로 한 발 더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의 요구>
1. 고 하중근 씨의 사인은 경찰의 자의적 발표가 아니라, 공정한 전문가 집단과, 시민사회단체의 입회 하에 숨김없이 밝혀져야 합니다.

2. 포스코 사태의 본질은 다단계 도급구조와 근로기준법의 적용조차 적용받지 못하는 비정규 노동자의 확산과 차별 때문이므로 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입법안이 빨리 제정되기를 바랍니다.

3. 노동탄압의 방식으로 원성을 사고 있는 거액의 손해배상 청구, 구속자 남발은 비정규 노동자들의 노동3권을 침해하는 요인이므로 이의 최소화를 요구합니다.

4. 포스코는 원청 책임자인 만큼 보다 전향적인 자세로 문제해결을 위해 노조와 직접 대화하기를 바랍니다.

5. 시낭송을 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송경동 시인에게 발부한 소환명령은 즉각 철회되어야 합니다.


2005년 8월 19일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 서명 문학인 일동



[서명 문학인 명단]

[시인] 강덕환 강태규 고선주 고영서 고증식 고태관 국은정 권석창 권혁소 권화빈 김경 김경운 김명남 김명환 김바울라 김성철 김소내 김소인 김순선 김승해 김시민 김영곤 김영욱 김일하 김자흔 김종근 김주태 김용락 김종원 김창규 김태수 김해자 김해화 김형수 김희식 나종영 도종환 류근삼 류외향 류정환 박경록 박경조 박구경 박승민 박영희 박일환 박찬 박철영 박흥식 배성근 배성도 배재운 배재정 백종성 복효근 민영 문동만 서경숙 서수찬 서승현 서영호 서정홍 석연경 성선경 손세실리아 손인식 송경동 송문헌 송은숙 송인덕 송진 심수향 안명옥 안성길 엄하경 오삼록 오장근 오정환 오철수 유진택 윤석주 윤석진 윤은경 원종태 이강산 이경재 이광석 이명조 이복희 이봉환 이상호 이선 이승철 이응인 이정록 이정섭 이제향 이주형 이진수 이철산 이한걸 이한별 이해리 임술강 임세진 임희구 장창영 장시우 장인숙 장재홍 전희식 정규화 정대호 정선호 정설교 정숙 정우영 정용남 정진화 조성래 조재도 조진태 조숙 차옥혜 채향옥 최명진 최민영 최상해 최순옥 최영자 최영욱 최정규 함순례 [소설가] 김동민 김영도 김춘복 김한수 박래여 박치대 박혜강 우종구 송대헌 신영철 안재성 윤동수 이인휘 이재웅 이원화 임수아 전성태 정혜주 채희윤 한상준 홍새라 홍인기 [문학평론가] 고명철 구중서 김동윤 염무웅 이희환 임명진 홍기돈 [동화 등] 김미희 김종필 김창우 노상윤 박수정 박예분 서지선 안학수 이전오 오세금 이윤주 전지창 정신숙 최기우 한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