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체성은 국가보안법으로 지키는 게 아니다
강정구 교수의 발언과 글을 놓고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을 보며 ‘태산명동 서일필’ 이라는 비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나라가 뒤집어진 듯 호들갑 떨어대지만 논쟁의 알맹이를 보자면 세계 어디에 내놓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일이다. 아직도 전체주의의 늪에 빠져 있는듯한 일부 집단의 지성 수준이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솔직히 한국전쟁의 성격규정에 대한 학문적 토론이 제대로 된 적이 있었는가? 이를 테면 전쟁의 발발원인과 양측의 목적, 그리고 그 시대적 정황에 대한 해석 말이다. 어떤 주제나 담론이던 간에 토론과 저술행위, 말조차도 가로막는 사회는 부당하고 반 상식적인 사회이다. 우리는 강교수의 의견과 관점에 100%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거나 하지 않는다. 이는 강교수가 견해를 표현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동의는 강요에 의해 이루어지거나, 공작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아주 개인적인 추론과 판단을 통해 결정될 뿐이다. 우리는 이 사태를 관련한 검찰총장의 사퇴의 항변과 한나라당 그리고 보수언론이 제기하는 국가정체성 운운 시비는 상황과 사리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의 성격규정, 맥아더에 대한 판단기준이 반드시 획일화 되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십인십색이 인간의 본모습이 아니던가? 성격이 다르고 철학이 다르고 정파성이 다른 게 인간 아니던가? 구속기소를 주창하고 국가보안법 존속을 주장하는 세력들의 발언과 행위는 시민사회와 자주 충돌해왔다. 하지만 그것은 물리적인 충돌이라기보다는 의식과 표현의 충돌일 뿐이었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면 되는 것이다. 심지어 쿠데타를(폭력을 선동하는)암시하며 정권을 타도하자고, 주창하는 수구세력에게도 적용하지 않았던 구속기소를 일개 학자에게 무리하게 적용하려는 것은 법이 법을 잃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류의 개인과 집단이야말로 국가에 백번 위험한 인물이 아닌가? 그때 경찰과 검찰은 그리고 일부언론은, 그리고 한나라당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되묻고 싶다.
특히 이 사태를 정치쟁점화하며, 국가정체성의 파괴 운운하며 장외투쟁도 불사하겠다는 박근혜씨에게는 반대로 묻고 싶다. 일본군 장교가 되어 일제에 충성하는 것은 국가정체성 강화에 복무하는 것인지 묻고 싶다. 탱크를 앞세워 권력을 잡고 18년간 총통독재를 누린 것은 또 무엇인지 묻고 싶다. 그러나 우리는 한나라당도, 보수언론도 부정, 불법한 음모와 폭력에 의한 방식이 아니라면 어떤 주장을 하더라도 들어줄 생각이 있다. 학문적 추론과 논쟁은 그에 맞는 방식으로 대응하거나 논박하면 되는 문제이지 가치판단 기준조차 사법제재라는 후진적인 억압으로 풀어서는 될 문제가 아니다. 입으로 말하고 글로 쓰면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강정구교수가 도주위협이 있는가? 총을 휴대하고 다니는가? 비밀조직을 이끌고 불법봉기를 통해 체제전복을 꾀하려 하는가? 정치적 반대자들을 다 척살하자고 하는가? 그가 뱉어낸 말과 글은 인터넷을 통해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으니, 증거인멸의 우려도 없다. 우리는 그를 수사해야 한다는 자체도 동의하기 힘들지만 설령 수사를 한다 하더라도 불구속 수사가 맞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 사태와 관련하여 경찰과 검찰의 태도는 시대정신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검찰조직의 10%(150여명) 를 차지한다는 공안담담 검사들의 역할이 고작 이 정도 수준이라는 데서 국가적 예산, 인력낭비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 군부독재에 굴종했던 전례, 그리고 X파일을 통해 드러났듯이 삼성이라는 자본권력에 포섭되고 당당하게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는 못하는 것이야말로 굴욕임을 알아야 한다. 정치적 예단과 여론에 좌지우지 되는 수사가 아니라, 어떤 사건의 피의자라 하더라도 도주와 사건유기의 가능성이 없는 경우 불구속 수사를 해야 하는 건 인권신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유독 공안사건에만 50%가 넘는 비율로 구속수사를 남발하는 건,( 여타 사건의 경우 3%를 넘지 않는다) 그들이 지독한 사상적 편견이 있다는 반증이다. 도대체 OECD 가입국 중에 이런 문제를 두고 충돌하는 나라가 어디 있단 말인가. 분단국이라는 특수성과 남한사회 체제안정을 백번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 상황은 침소봉대針小棒大의 전형이다. 우리는 그동안 충분히 경험해왔다. 국가보안법 피해자들이 국가변란을 꾀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이 주류집단의 반대자이었기 때문에 피해를 당했던 사실을.
국가보안법이 궁극적으로 수호하는 것은 국가정체성이 아니라 공안담당자들의 밥그릇이며, 색깔론으로 표를 얻는 일부 정치세력이었음을.
우리는 지속해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해왔다.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므로 이 소모적인 사태와 논쟁이 발생했고 이후에도 빈번할 것을 생각하면 답답하기 그지없다. 이제라도 비생산적인 색깔논쟁을 종식시키고 모든 구성원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을 밝히며 공론의 장에서 논쟁하고 토론하는 성숙한 사회, 진화된 사회가 되길 원한다. 더 이상 한국형 매카시즘이 준동하는 사회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란다. 마무리하며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볼테르의 말을 인용한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류의 문구를 인용하지 않는 사회가 되길 간절히 원한다. ‘나는 당신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이 그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억압당한다면 나는 당신 편에서 싸울 것이다’.
2005년 10월 19일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성명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