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서이치에 기대다』

시인의 말

제1부

서랍 드레스
가야의 무덤 안을 나는
녹색 광선
봄밤
서이치에 기대다
봄, 치에서
흑백사진관 봄으로
화령전에서
여름, 치에서
손 무덤

제2부

꽃의 무게
팔달산을 걷다
꽃무덤
형도
화령전 아멜리에
거미 여인
안개 사원
가야 토기
소년병
아는 사람
팔달산을 걷다 2

제3부

입술 소파
입술 소파
입술 소파
입술 소파
華, 자작나무숲을 읽다
행궁동 엘리펀트 캐슬
양들의 침묵
#탈코르셋
뉴욕 무도학원 옆 남문 통닭집
신풍경로당
THE DAY 3

제4부

그녀에게
우주장례식장
서남암문 지나다
화서문에 들면
서포루에서
서이치에 기대다 2
그 누가 언제쯤이면 이 후라이를 뒤집나?
얼룩말의 레시피
난초, 길을 보다
공중 정원

해설_ 시조미학의 주술적 언어와 '서정-화' 되기 / 권성훈

시조미학의 주술적 언어와 '서정-화' 되기

권성훈 ( 시인, 문학평론가, 경기대 교수)

어느 시는 주술적 영역에서 산출된다. 주술적 시편은 직관성에 의존하며 사라진 혼을 불러내듯, 지워진 길을 복원하듯, 없어진 기억을 찾아내듯, 초혼의 언어로 통한다. 이 비문자적인 방언은 시인이 시적 형식으로 주문하듯 재현하는데, 그것에의 주재는 영매자로서 공유하는 자들을 향해 개시된다. 찾아낸 유산과 같이 끊어진 기억과 훼손된 시간을 회복하며 이미 소유하고 있었던 것을 환원시키는, 역사적 동력 안에서 시인의 주술적 언어가 빚어진다. 또한 전통과 맞닿으면서부터 부분에서 전체로 공유되고,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으로 대체되고 확장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과거로부터 잠식되어 있던 것들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깨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시인은 ‘주술적 언어’로서 점멸된 과거에 전통성을 ‘시조미학’으로 풀어내는 고유한 시적 언어를 탐구할 수 있다.

서정화 시인의 이번 시집 『서이치에 기대다』는 현대성 속에서 역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과거의 사건을 주술적으로 더듬고 그것을 다시 전통이라는 시조로 다듬어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그녀의 시작은 근래에 전통의 의미를 계승되어 온 것이라고 믿어왔던 것과 달리 근대에 새롭게 창출되었다는 징후를 수사적 기법으로 은유한다. 대체로 이 시편들은 ‘수원 화성’을 중심으로 “팔달산에 탑을 돌 듯/화성의 성벽을 자주 걸었다(「시인의 말」) ‘랭보’ ‘견자’의 시선을 빌려 실증적으로 전유하면서 전통의 의미를 다양한 시조에의 양식으로 발견하고 재해석 해준다.

그동안 민족의 정형시라고 불리는 시조의 경우 그 기원에 관하여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한시를 번역하면서 발견된 시형으로서 고려 중기에 형성되어 조선 초기 완성되어 후기에 전성기를 맞이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당시 ‘단가’ 또는 ‘시절가조’라고 불렀던 것이 조선 영조 때 이세춘에 의해 시조라고 명명되었으며, 개화기 이후 자유시에 밀려 안타깝게도 쇠퇴했다. 그러다가 1920년대 일제강점기 계급주의 문학에 대항한 국민문학파의 활약과 함께 본격화 되면서 이전의 시조는 고시조가 되고, 최남선, 이은상, 이병기 등에 의해 현대시조로 새롭게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현대시조는 한시에서, 단가 또는 시절가조로, 고시조에서 현대시조로 부분 계승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바, 원형 그대로 전승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원래부터 시조문학의 원형은 존재한 것이 아니라 변형을 거듭해서 오늘날의 현대시조로 놓여있는 것으로, 시대를 달리하며 문학의 현장에서 ‘만들어진 전통’으로서 면면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시조는 과거로부터 끊이지 않고 반복적으로 승계된 전통이 아닌 시대적 요구와 담론에 의해 새로운 언어적 양식으로 탄생되어 되었다는 점이다. 호텐스 스필러즈는 “전통은 태어나지 않는다. 다만 만들어진다”는 것에서 과거에 대한 새로움의 모색으로 ‘해석의 발견’이 현대 사회에서 말하는 전통이라는 함의에 이르게 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전통성이 부가된 새로운 양식의 출현은 과거의 것으로부터 누군가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재편성된다는 것이다.

에릭 홈스봄(Eric Hobsbawm, 1917~2012)은 “만들어진 전통의 특수성은 대체로 과거와의 연속성을 인위적으로 내세우려든다는 데에 있다. 요컨대 전통은 상황에 대한 반응인데, 여기서 역설적이게도 예전 상황들에 준거하는 형식을 띠거나, 아니면 거의 강제적인 반복을 통해 제 나름의 과거를 구성한다.” 마찬가지로 서정화 시조는 현실이라는 상황 속에서 전통의 형식으로 끊어지거나, 소멸된 과거에 대해 시적 상상력으로 반응하면서 새롭게 복원하며 시적으로 구성해가는 효과를 동반한다.

시적으로 전통을 부과한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과거의 기억과 사물에 대하여 시 형식으로 의미를 주입하고 함의된 생명을 공급하며 언어의 꽃을 피울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처럼 그녀의 이번 시집의 테마는 ‘수원 화성’을 소재로 한, ‘전통의 발견’이라는 것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언어로 태어나는 ‘수원 화성의 꽃‘을 어렵지 않게 조응하게 된다.

이번 시집의 특징 중 하나가 단시조와 평시조에 이어 사설시조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많다는 것이다. 1부와 2부가 단시조와 평시조로 장식했다면 3부부터 사설시조가 눈에 띄게 편철되어 있는데, 이 사설시조들은 지난했던 역사와 고통 받는 민중의 소리와 애환을 다루고 있다. 그러면서 중장의 음보가 에너제틱하게 늘어나면서 실험적 형태의 산문시로 창작되는 것은 역사 속으로 소장되거나, 박제되어 버린 모순과 부조리에 관한 잔재를 역설적으로 풍자하기 위함이다. 그만큼 가슴 아픈 시대의 한 가운데 있는, 독립 운동, 위안부, 남북정상회담, DMZ, 세월호 등 역사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권, 젠더, 복지, 시설 등 현실을 은유적으로 비판하는 등 삶의 문제를 준거하며 “침묵 속에 횃불”과 같이 타오르는 시심으로 인류애를 보여주고 있다.

이 시의 서암문은 화성성역의궤에 의하면 수원 화성의 남쪽에 위치한 팔달산의 높은 곳으로 경기도의 동서남북을 전망할 수 있으며,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기 좋은 장소다. 발아래로 수원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이곳에 ‘3·1 운동 기념비’를 건립한 것도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시인은 ‘곧고 찬’ 시멘트로 만들어진 기념비 사이에 붙은 개미를 발견한다. 이 개미가 힘들게 도달하여 팔을 벌리고 있는 몸짓이 마치 이 땅의 독립을 이룩한 민중들의 기쁨으로 이미지화되어 나타난다. 동시에 민중의 곧은 절기 속에서 차갑게 흙으로 돌아간 그들의 혼령을 불러내고 독립의 상황을 재현하며 위무한다. 이 때 개미는 한낱 미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신성한 영매의 존재로서 투시되며, 잠들었던 영혼을 깨우고 춤을 추면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개관하는 일종의 진혼의식에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주술적인 재의는 “새로운 숲을 건설한” 시대에 약하고, 힘없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꽃의 벼랑 딛고 서서” 일궤 낸 성과라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내 몸의 두 세계는/ 희생물로 바치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서 비결정적 선택권이 없는, 시인은 저주받은 다른 이름인 줄 모른다. 그렇지만 시대의 한 가운데에서 얽히고 설긴 “어둠의 실을 풀어서 다 불러내”어 달래주는 것이야 말로 그녀가 추구하는 길이기에 “한데 묶인 장미 다발 // 더미를 / 쌓아올린 // 고아들의 영혼 같은 / 창백한/시체들 보며” 꽃의 무게가 “우리가 무슨 죄가 있어서 남자 백 명을 상대하냐 우리의 죄는 나라 없는 죄밖에 없다 나라 없는 벌이냐 죄라면 내 나라를 잃은 죄밖에 없지”라는 더 낮고 처절한 목소리에 젖어 “얼굴과 몸 가득히 못을 박는 악몽 같은, 뼈와 살 깎고 파내며 갈기갈기 찢긴 사지, 고름을 겹겹 싸맨 푸른 멍 짙게 짜인, 벌어져 갈라진 틈을” 지나치지 않고 어둠 속에 잠들어 있는 고아들의 영혼을, 그들의 창백한 시체를 불러내어 “뼛속 시린 울음소리”(「흑백사진관 봄으로 ― 세월호」)를 주술적 언어로 들려줄 때, 우리는 ‘수십억 톤 어둔 뻘 속’ 배후에서 ‘잠기어 건져 올린’ 세계의 녹슨 기억을 마중하게 된다.

그녀의 저작에는 시간을 초월하기도 하고, 시대를 너머하기도 하며, 종래의 인식으로는 식별할 수 없는 시간과 장소 그리고 잊혀지거나, 사라진 것들에 대한 관심으로 채워져 있다. “우화관과 생가 터가 복원된다는 풀꽃 소식들”에서 우화관은 화성행궁의 객사로서 관리들의 연회장이며, 생가 터는 우리나라 최초 서양화가 나혜석이 태어난 곳이다. 이처럼 그녀는 수원 화성에 있었던 그 옛날 우화관과 나혜석 생가 복원 소식, 현장성에 대한 해학성이기도 하다.

그녀의 이번 시편들은 퍼즐거울처럼 다채롭게 채워가며, 수원 화성을 새롭게 발견하고 전통적 방식으로 복원하며 기록한다. 이것은 초원의 언어를 통해 찾아낸 기억으로, 복원된 길로, 사라진 혼으로 주문하고 시적 형식으로 불러낸다. 그것은 “천근만근 억 만개”를 쌓아올린 ‘뼈를 받친 성벽 돌탑’에서, ‘시장길 가지런히’ 놓여있는 ‘쌓고 또 쌓는 옷탑’에서, ‘안으로 굽어 돌수록’ 은은한 ‘향이 번지는 과일탑’에서, ‘수원천 길가에 쌓고’있는 시장 모퉁이 ‘종일 앉아 파는 나물탑’에서, ‘할머니 단단한 땀내’가 지워지지 않는 ‘알알이 겹친 알곡탑’에서, 이른바 수원 화성이라는 “거리탑” 속에서 그녀가 불러내는 ‘여러 생을 관통한 겹겹무늬’ 사이에서 주술적 언어를 보여준다. 이로써 우리는 서정화 시인이 전통적 시어로서 연속적으로 창조하고 있는, 세계의 언어가 감각적으로 ‘서정―화’될수록 ‘사유의 체중’이 심화되고 가중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