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행드 맨

                    
                                                                     마  린

  블라인드의 세로줄을 따라 들어온 빛이 실내를 몇 개의 공간으로 분할하고 있다. 빛이 만든 사각형 안에 색을 입히면 몬드리안의 추상화와 비슷해질 것이다. 그의 침상은 실내의 팔 할쯤을 차지한 그늘에 놓여 있다. 그는 막 잠에서 깼다. 충분히 자고 난 아기처럼 말간 눈빛으로 사위를 둘러본다. 흰색 페인트칠이 된 천장과 벽이 차례로 그의 시야에 들어온다. 널따란 벽면은 비어 있다. 그림이나 사진이 든 액자는 고사하고 벽시계나 달력 하나 걸려 있지 않다. 그는 방 주인의 몰취미에 실소를 금치 못한다. 그림 액자들을 걸거나 하다못해 벽지라도 바꾸면 분위기가 훨씬 달라질 것이란 충고를 해주고 싶은 것이다.
  “미술과 친해지는 방법은 아주 간단한 거야. 자주 만나는 거지. 어떤 친구와 친해지려면 자주 만나야 하듯이 말이야. 잡지건 화보집에서건 자기 마음에 드는 그림이 보이면 오려내서 벽에 붙여두고 보렴. 지겨워질 때까지. 누군가 유치한 취향이라고 타박하지나 않을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마. 좋은 그림이 따로 있는 게 아니거든. 자기 눈에 좋으면 그게 좋은 그림이야. 그러다보면 색과 선과 구도의 미묘한 차이들이 보이고 나름의 취향이란 게 생기지. 그냥, 저절로.”
  그 여자는 이렇게 말하며 열두 살 소년의 밋밋한 방에 대수술을 감행했다. 보라색과 파란색 벽지로 분할된 방은 초현실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그는 눈 뜨자마자 십 년 저편의 여자가 떠올랐다는 사실이 잠시 의아했지만 그 생각을 오래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자신이 눈을 뜬 공간에 대한 탐구가 더 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분명 낯선 공간이다. 다행히 위협적인 상황은 아닌 듯하다. 그는 자신이 낯선 방에서 눈을 떴다는 사실에 별다른 의구심이나 저항감을 느끼지 않는다. 요 몇 주 동안 낯설거나 불유쾌한 장소에서 잠을 깨는 일이 드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술에 취해 누우면 그곳이 잠자리였다. 그는 모처럼 꿈 없는 긴 잠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이 좀 더 지속되기를 바랄뿐이다. 어쩌면 이렇게 쉬고 싶어서 의심을 품거나 저항하거나 분석하는 일을 유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공간은 막이 올라가기 직전의 연극무대처럼 고요하다. 그는 이곳이 그럭저럭 마음에 든다.
  그는 빛살 속에 부유하는 먼지 입자들의 느린 유영을 끈덕지게 지켜본다. 햇살이 저토록 화사한 것을 보면 늦은 아침쯤 될 것이다. 티끌만한 동체들은 좀처럼 생기 있는 활동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좀 심심해진다. 이곳에서 그의 마음을 끄는 것이라고는 햇살밖에 없다.
  손바닥만 한 손거울이나 하다못해 깨진 유리 조각 하나만 있어도 한동안은 지루함을 잊고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는 사금파리 조각 하나로 방과 후의 적요함을 달래던 시절을 기억해낸다. 거울이 잡아낸 빛을 재빨리 원하는 곳으로 이동시키거나 또 다른 반사경에 되쏘거나 하는 놀이, 돋보기로 빛을 모아 얄따란 시험지를 태우는 놀이들은 마치 마술 같기도 했다. 때로 들창 아래 지나는 행인이라도 있으면 놀이는 자못 스릴마저 느끼게 했다. 행인은 급작스레 자신의 얼굴에 날아와 앉은 빛 무늬에 당황해서 걸음을 재촉하거나, 장난꾸러기를 찾아내려고 눈살을 좁히며 두리번거리곤 했다. 그는 오래된 기억들이 무방비로 흘러나오도록 내버려둔다. 그 여자가 기억 저편에서 튀어나오도록 내버려둔 것처럼. 그 외로운 장난은 얼마 못 가 끝났다. 동네 사람들에게 남의 방을 들여다본다는 터무니없는 항의를 받고 아버지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뒤였던가, 그 여자를 찾아 아버지마저 종무소식이 된 후 고모 집으로 더부살이간 뒤부터였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은 거기에서 멈춘다. 중동이 분질러진 꽃자루처럼 완전히 말라 비틀어져 사라져버렸다. 그것은 누군가를 미치도록 애타게 기다리던 오후의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햇빛과 깨진 거울 조각이면 되었으니까. 가슴속에 물기 하나 남지 않도록 애를 태우며 기다리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지금 그것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그들, 혹은 그 순간들은 유리조각에 튕겨나간 빛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버렸다.
  회백색 블라인드는 먼지가 좀 끼어도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 무난함 때문에 선택했을 듯싶다. 그는 블라인드를 차르륵 소리가 나도록 시원스레 걷어버리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하지만 오랜만에 맛보는 정적과 고요도 그에 못지않게 그의 마음에 든다. 그는 느긋해지기로 마음을 먹는다. 시계의 알람이 울리고, 그녀의 향긋한 살 냄새가 먼저 다가오고 그녀의 긴 손가락이 자기 몸에 닫기 전까지는 꼼짝도 하지 않던 아침처럼, 그는 한껏 게으름의 호사를 부린다. 다시금 엷은 졸음이 천천히 차오르는 수위처럼 밀려온다.
  “나도 프라하에 한번 가보고 싶어.”
  막, 지나치게 격렬하지도 오래된 연인처럼 무덤덤하지도 않은, 그러나 서로에 대한 친숙함은 충분히 확인되는 그런 행위가 끝나고 나서 땀이 배어난 몸을 돌아 눕히며 그녀가 말했다. 그는 무심코 여자 쪽으로 돌아눕다 그녀의 시선이 박힌 텔레비전에 눈길을 주었다. 카메라는 분주하게 프라하의 고성들과 오래된 골목길들을 이리저리 훑고 지나가는 중이었다. 중세의 고성들은 어디 하나 눈에 튀는 곳이 없어 마치 훼손되지 않은 자연의 일부처럼 웅숭깊게 보였다. 카메라는 프라하 광장을 지나 카프카가 살았다는 황금소로를 따라 천천히 이동했다. 중세에 연금술사들이 살았다는 거리엔 여전히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즐비했다.
  “연금술사들도 그들의 꿈도 사라졌건만 그들이 숨 쉬고 생활하던 건물이며 골목들은 여전하다. 그들의 한숨과 눈물과 꿈들은 다 어디로 사라져버린 걸까?”
  내레이터는 자못 감상적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카프카가 살던 집이래.”
  그녀는 또 중얼거렸다. 은빛 턱수염 때문에 나이 지긋해 보이는 관리인은 서툰 영어로 관광객들에게 카프카의 생가를 소개하고 있었다. 그는 선명하게 도드라진 그녀의 등뼈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그는 그녀의 등뼈를 만질 때면 어쩐지 그녀의 중심과 접선하는 것 같은 미묘한 감동을 느꼈다.
  “카프카이스크?”
  그녀는 관리인이 한 말을 흉내 내듯 따라했다. 그는 그게 무슨 말인지 물어보려했지만 어쩐지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입을 달싹일 수조차 없었다.
  그는 생각을 멈추고 청각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어쩐지 지나치게 조용하다. 그녀의 가만가만한 발소리도, 이불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나지막하게 켜놓는 음악 소리도, 유리그릇을 다루는 조심스런 달그락거림도 들리지 않는다. 이제 그만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않으면 하루가 시작부터 삐걱거리게 될 것이다. 그는 어느새 악몽으로 달려갈 준비를 시작한다. 그녀는 단지 밥벌이만을 위한 직장은 악몽이라고 표현했다. 밥벌이라 해도 누군가를 위한 거라면 단지 밥벌이만은 아니지 않을까? 그는 언젠가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대체 그녀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 이런 일은 이전엔 없었던 일이지만 뭐, 세상에 고정불변한 일이란 없으니까. 그는 천천히 기지개를 켜려고 사지를 쭉 뻗는다. 이상하다. 꼼짝도 할 수 없다. 고개를 돌릴 수도 팔을 굽힐 수도 심지어 손가락 하나조차 뜻대로 구부려지지 않는다. 그는 한 번에 몸을 일으키려던 생각을 바꾼다. 너무 오래 누워 있어서 삭신에 기운이 빠져버렸거나 잠시 몸에 쥐가 난 건지도 모른다. 이런 일은 전에도 가끔 있었으니까. 그는 조심스럽게 팔을 든다. 여전히 꼼짝도 할 수 없다. 이번엔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본다. 마찬가지다. 그의 몸은 침상에 빈틈없이 성능 좋은 접착제로 붙여진 거푸집 같다. 마음은 어디 다른 세상으로 분리되어버린. 다행인 건 몸의 어느 곳에서도 고통의 징후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천천히 들숨을 쉬고 날숨을 그만큼 느린 속도로 내뱉다가 헉, 하고 숨을 멈춘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낯설긴 하지만 어디선가 익히 보아온 분위기이다. 흰 페인트칠이 된 밋밋한 벽이라니, 이건 마치 정신병원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대체 왜 이런 곳에서 홀로 깨어야 하는가? 그녀는 어디에 있는가? 진작 이 사실을 의심했어야 했는데. 오늘은 뭔가 이상하다. 모든 게 이상하다. 그는 중얼거리다, 순간 가슴을 예리한 날붙이로 도려내는 것 같은 고통에 숨을 멈춘다. 그것은 물리적 아픔이 아니라 이를테면 마음을 찌르는 아픔이다. 그녀는 떠났다. 잠자고 있던 고통들이 몸을 털며 일어선다. 생각하자. 천천히. 이건 이제껏 접한 어떤 케이스와도 다르다. 결코 흥분하거나 서둘러서는 안 된다. 모든 방에는 출구가 있으며 어려운 문제일수록 의외로 답은 간단하다. 그는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린다.
  줄곧 그가 출입구라 여기며 바라보고 있던 문은 여전히 닫힌 채로인데, 그가 머리를 둔 쪽으로부터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어선다. 이 공간의 네 벽면 중 그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 출입구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새로운 발견과 새로 등장한 사람들 때문에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흰 가운을 입은 중년 남자와 분홍색 가운을 입은 여자가 차례로 들어서고 뒤미처 낯익은 노파가 보인다. 그는 낯익은 얼굴에 반가움의 미소를 지어야 할지 냉정한 거리를 두어야 할지 미처 판단이 서지 않는다. 정수리에서부터 가운데 가르마를 따라 하얗게 길이라도 낸 듯 흰 머리카락이 솟아나 검정으로 염색한 머리카락과 생경한 대조를 이루는 노파의 헤어스타일은 얼핏 엽기 취미처럼 보이기도 한다. 때맞춰 염색을 하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백발이 낫다는 것을 노인들은 왜 모를까. 그는 노파의 퍼벌한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종류의 안타까움인지 구분할 수 없어 점점 기분이 불쾌해진다. 노파의 눈빛엔 두려움이 가득하다. 자기 앞에 어떤 운명이 펼쳐질지 모르는, 하지만 결코 좋은 일이 생기진 않을 거라고 이미 자포자기하고 있는 인간들이 가지는 두려움 말이다. 그는 살면서 그런 표정을 수없이 보아왔지만 지금은 담담할 수가 없다. 노파의 눈빛에서 두려움이 사라지게 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잔물잔물한 노파의 눈가엔 채 마르지 않은 눈물이 질척하게 매달려 있다. 노파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홈착거리면서 연신 의사에게 무어라고 말을 건다. 병실만큼이나 무미건조한 표정의 의사는 노파에겐 변변한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신속하고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그의 몸 여기저기를 만져보거나, 눌러보거나, 청진기를 대보거나 눈꺼풀을 뒤집어보거나 한다. 그는 노파가 하는 양이 마음에 걸려 입을 달싹거린다. 이봐요, 혹은, 대체 무슨 일이요, 라고 말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다. 목에 잔뜩 가래가 낀 탓이라고 생각하며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틔워보려고 한다. 하지만 입술조차 달싹여지지 않는다. 의사가 무언가 그에게 말을 거는 듯한데 그는 의사의 말을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다. 의사의 목소리는 아득한 소음으로 들릴 뿐이다. 그는 성의 없이 달싹이는 의사의 입을 무기력하게 바라본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눈길이 닿는 것들을 응시하는 일뿐임이 명백해진 순간이다. 그는 공포감으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분주히 굴린다. 하지만 눈동자조차 그가 원하는 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지는 않다. 의사는 간호사에게 몇 마디 지시를 하고, 노파의 어깨를 슬쩍 두드려주듯 하고는 돌아서 나가버린다. 그는 어쩐지 의사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노파는 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는다. 그는 한 음절씩 떼어 말한다.
  “어, 머, 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엎드린 채로 노파는 꼼짝도 않는다. 그녀의 모습을 보니 우울해진다. 제발 누군가 나타나 그녀를 데려가주었으면, 간절히 바란다.
  “어머니가 널 한번 보고 싶대.”
  단지 그녀를 떠보고 싶어 건넨 말이었다.  
  “어머니? 어떤 어머니? 그림 그리셨다는? 돌아가셨다며. 자기에게 또 다른 어머니가 있었어? 그런데, 나는 왜?”
  의문문으로만 연결된 말을 한꺼번에 쏟아내고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서 마음이 쓰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아마 이 대화 후였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짐을 정리해서 그의 집을 나가겠다고 말했다. 출퇴근하기에 교통이 불편하다는 게 이유였다. 반년도 넘게 살아놓고 새삼 문제 삼는 이유치고는 좀 옹색스럽다는 걸 서로 알고 있었다.
  “어머니를 만나는 일이 그렇게 부담스럽니?”
  그녀는 그의 물음에는 대답도 않고 준비해둔 듯 내심을 털어놓았다.
  “내가 당신에 대해 뭘 알지? 남자의 과묵이 매력이던 시대는 지났어. 지금은 초등학생들도 다 알아. 텔레비전 토크 프로에서 날마다 계몽하잖아. 여자들이 원하는 건 섹스보다 소통이라는 거. 처음엔 너의 그런 면이 좋았어. 호기심도 생겼지. 저 남자 속에는 뭐가 있을까? 하지만 차츰 그게 아니었어.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며, 무슨 꿈을 꾸며 사는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어. 어찌 보면 꿈 자체가 없는 사람인지도 모른단 생각도 들었어.”
  “그런 얘길 왜 이제 하지? 난 내 집에서 너와 생활을 함께했어.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
  “우린 육 개월 만에 십 년쯤 산 부부처럼 행동해. 서로 더 이상 할 말이 없잖아. 넌 몰라도 난 그래. 이쯤 되면 보통 헤어지거나 결혼이란 새로운 형식에 몸을 던지지, 안 그래?”
  “그건 서로 익숙해졌다는 증거야. 넌 익숙해졌다고 헤어지니? 아무 생각도 없었던 건 아니야. 결혼 따윈 급할 게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그럼 좀 더 솔직 단순하게 말할게. 처음엔 너와 내가 다른 인간인 것 같았어. 그러나 너와 난 똑같아. 널 보고 있으면 날 보는 것 같아. 그게 지겨워. 희망도 없고, 구질구질하고. 연인들이 헤어지는 이유는 수십 가지지만 진정한 이유는 결국 하나야. 배터리가 다 됐다는 거.”
  그녀는 그의 집에 들어올 때처럼 단호하고 신속하게 그의 집을 떠났다. 그는 지금 너무도 피로하다. 단지 누워만 있을 뿐인데, 누워서도 멈추지 못하는 생각 때문에 어떤 괴로운 노역보다 더 피로하다. 피로야말로 그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유일한 감각이다. 피로한 것을 보면 그는 확실히 살아 있으며, 그의 현실이 꿈이 아님도 확실하다. 그뿐인가? 그의 손등에 주사바늘을 꽂던 간호사의 살품으로 그녀의 살구색 속옷을 분명히 보지 않았던가? 그는 눈을 감는다. 그는 문득 밥통을 열었을 때 달려들던 쉰내를 맡는다. 아직 살아 있는 건 시각 뿐만은 아닌 듯하다. 후각이 살아 있다. 그는 어디선가 음식물 냄새를 맡는다. 병원의 배식 시간인지도 모른다. 어제의 일이었던가, 아니면 수 일전 혹은 수 년 전의 일이었을까, 그는 그것을 가늠할 수가 없어 답답하다. 머릿속의 기억들은 우렁잇속처럼 뒤숭숭하기만 하다.  
  밥통을 열었을 때 언제 했는지 알 수 없는 밥은 밥통 속에서 한 번의 주걱질도 없이 고스란히 부패되고 있는 중이었다. 윤기를 잃은 검정콩 몇 알이 흰 쌀밥 위에 드문드문 흩어져 있었다. 화장실에서 한참동안 용을 쓴 뒤에야 배변을 했는데, 그 변이 꼭 이랬다. 물살에 쓸려 내려가던 검은 알갱이들은 염소 똥이나 염주 알 모양이었다. 그는 콩을 한 알 집어 들어 입 안에 넣었다. 부패가 진행된 콩은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그는 밥통 뚜껑을 닫고 사납게 밥통 코드를 뽑아버렸다.
  어머니는 그녀가 떠난 후 그의 집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며칠에 한 번씩 들러 밥을 하고 밑반찬을 만들어 냉장고를 채우고 빨래를 하거나 청소를 하곤 했다. 아버지 사십구재 이후 한 번도 어머니를 찾아가지 않았다. 가망 없는 투병생활로 나날이 쇠잔해가면서도 곁을 주지 않는 남편 수발을 고스란히 감당하거나, 냉랭하기만 한 아들의 홀앗이살림을 걱정하는 어머니가 오히려 던적스럽게만 느껴졌다. 가진 걸 다 내주는데도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늘 노땡큐라는 감정이 앞서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어머니가 그런 존재였다. 그 여자는 달랐다. 특별히 준 것이 없는데도 상대를 감지덕지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자기 자신을 조금도 훼손당하지 않는 사람, 그 여자가 그랬다. 그는 아버지에게 감정이입을 하거나 그 여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곤 했다. 그것이 강해지는 길이라고 여겼던 건지도 모른다.
  그 여자는 어머니와 달랐다. 잠들고 싶을 때 잠들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났다. 아침 식사는 커피 한 잔이 전부였다. 때로 점심도 거르고 오후 내내 그림그리기에만 몰두하기도 했다. 이따금 혼자 외출을 하고 밤늦게 술에 취해 돌아왔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늘 여자 앞에서 안절부절못했다. 일층 가게에서 삼층 옥탑 방에 꾸민 그 여자의 작업실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락내리락하며 여자 걱정을 했다. 화구상과 화가의 결합이란 게 얼핏 보면 무난한 조합처럼 보이지만 돈밖에 모르는 장사꾼과 예술가의 조합이라면 왠지 산뜻한 느낌이 사라진다. 아버지에게 여자는 촌부가 입은 파티 의상이고 길이가 다른 상다리였다. 아버지가 여자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고작해야 밥은 먹었나, 거나 화구들을 얼마든지 갖다 쓰라는 등의 말이었다.
  그는 여자가 외출한 틈을 타 여자의 방에 드나들었다. 여자의 방은 처음 보는 세상이었다. 재떨이, 술병, 담배 따위, 어머니의 방에서는 금기일 물건들이 버젓이 굴러다녔다. 사면 벽은 크고 작은 사진들과 그림들, 메모지들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한쪽 벽면에는 다 썼거나 아직 개봉도 안 한 화구들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었다. 어머니가 보았다면 귀신 사당이 따로 없다며 펄쩍 뛸 노릇이었지만 여자의 방에서는 이질적인 물건들이 모여 화가 작업실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는 여자의 스케치북이나 두터운 유화물감이 덧칠된 캔버스를 확인해보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여자의 그림을 알아볼 수 있어야 여자가 자신을 무시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여자는 이따금 살림집으로 쓰는 이층에 내려왔다. 그녀가 이층에 내려와서 드나드는 공간은 주방뿐이었다. 어머니가 쓰던 안방에는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다. 여자의 음식은 어머니의 것과는 어딘가 달랐다. 냄새나는 청국장을 뚝배기가 넘치도록 끓이거나, 나물을 접시 한가득 담아내거나, 이따금 별식이라 내놓는 수제비나 칼국수나 불고기 따위의 어머니의 음식이 나빴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자의 상 차림새는 어머니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큼지막하고 두터운 도자기 접시에 한 자밤이나 될까, 앙증맞게 담긴 음식들은 플라스틱 반찬통째 식탁에 오르는 어머니의 것과는 격이 달라 보였다. 이 또한 어머니가 보았다면 애꿎은 설거지거리만 만들어낸다며 종주먹을 들이댈 일이었다. 아버지는 여자의 요리에 흥감해마지 않았다. 그 여자의 음식이 맛이 있었는지 어떤지는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아름다웠을 뿐이다. 그는 아버지의 바람이 정당하다고 믿기로 했다. 아름다운 것이 죄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여자는 얼마 못 가 아버지를 떠났다. 그 여자가 삼층에 머문 기간은 채 일 년이 안 됐다. 여자가 떠난 후 낙담한 아버지는 좀처럼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다. 끝내 아버지는 가게 일을 작파하고 여자를 찾으러 집을 나가버렸다. 그는 어머니를 대면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어머니를 거부했다. 어머니를 배신한 사람은 아버지 뿐만은 아니었다.  
  기다리자. 생각하자, 천천히. 그 시절의 무위한 기다림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둥글게 배를 부풀리며 의식적으로 복식호흡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 기다림에 비하면 이것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눈을 뜬다. 어머니는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노인이 병실에서 할 일도 없으니 그만 잘 가버렸다 싶으면 그녀는 다시 병실로 돌아온다. 그는 있는 힘껏 숨을 모아 훅, 하며 불어본다. 여전히 사라진 기운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다시 한 번 숨을 고르고 결기를 내며 그 서슬을 빌어 몸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의 분노로는 종이 한 장도 옮길 수 없다. 그의 온몸은 미라처럼 결박되어 있다. 그가 말을 할 수 없는 건 턱과 귀와 머리까지 한 줄로 억세게 감고 있는 압박붕대 탓이다. 그는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다.
  그는 방치된 기억의 공백을 메우느라 분주하다. 오래된 일들은 마치 어제 일 인 듯 떠오르고 불과 며칠 전의 일들은 깜깜하다. 눈꺼풀을 반쯤 밀어올리고 주변을 살핀다. 어머니는 병상 발치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다. 기진해 정신을 놓아버렸거나 잠시 기도라도 하듯이 두 손을 마주잡아 이마를 받친 자세이다. 그녀의 애잔한 모습에 그는 잠시 막막해진다.
  병원에서마저 회생 가능성이 없다며 아버지의 퇴원을 권했다는 소식에 마지못해 집에 갔었다. 봄볕이 화사한 마당가에서 어머니는 한창 머리에 염색을 하는 중이었다. 검정색 비닐봉지 바닥에 구멍을 내서 거꾸로 목까지 뒤집어쓰고 염색약이 묻은 칫솔을 한 손에 쥔 채였다. 그때 왜 나서서 노인의 머리카락에 염색을 해주지 않았는지, 그저 이웃집 강아지 재롱 구경하듯 볼만장만 하고 있었는지, 그는 지금 그 일이 안타까워 견딜 수 없다. 그가 십대 끝자락이 되어서야 다시 합친 가족은 남만도 못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데면데면하기만 해서 그는 어머니라 부르는 것마저 인색했다.
  그는 처음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입술을 달싹여 어머니, 부르려 한다. 하지만 아래와 윗입술은 꿈쩍도 않는다. 어느새 방 안을 가르던 햇빛 기둥도 벽에 어룽거리던 햇살 무늬도 사라지고 없다. 그는 오싹한 한기를 느낀다.
  그는 처음엔 그녀의 출분을 일시적인 거라고 생각했다. 어색해서 연락하지 못하는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녀는 짐을 싸들고 나간 후 전화조차 받지 않았다. 그녀가 그새 직장마저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야 비로소 그는 그녀가 정말로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만나자. 한 번은 만나야 하지 않니? 네 집 앞으로 갈게. 기다린다. 올 때까지. 메시지 전송 버튼을 누르면서 그는 자신이 그녀의 집에 한 번도 초대된 적이 없었다는 생각을 했다. 늦은 밤 그녀를 바래다 줄 때면 언제나 아파트 초입에서 돌아서곤 했다. 언니 집에 얹혀산다고 했다. 팔층이랬지, 어쨌든 아파트 근처에 가고 보자. 멈출 수 없다면 갈 데까지 가보는 거다. 그는 휴대 전화기의 액정을 확인하고 바지 주머니에 넣으며 생각했다. 배터리는 충분했고 시간은 아무래도 좋았다.  
  두 동이 마주보고 선 아파트의 팔층을 그는 눈으로 셌다. 한 동에 여섯 가구씩 모두 열두 가구였다. 여차하면 한 집 한 집 두들겨볼 수도 있을 만한 숫자였다. 아직 완전히 해가 지지 않았는데 일찌감치 형광등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집도 보였다. 단지 안엔 행인이 드물었다. 이따금 학원 가방을 멘 아이나 승용차가 들고 날 뿐이었다. 그는 아파트 초입과 연결되는 이차선 도로 건너편의 포장마차를 임시 목적지로 삼았다. 십 미터쯤 저쪽으로 횡단보도가 보였지만 오가는 차량이 없어 무단횡단을 했다. 말이 포장마차지 실은 트럭 짐칸을 개조하여 주방으로 만들고 가로수 밑에 플라스틱 탁자와 의자 몇 개를 늘어놓은 포장트럭이었다. 쌀쌀한 날씨 탓인지, 그곳에 오래 머무는 사람은 없었다. 여학생 둘이 어묵 몇 꼬치를 선 채로 먹고 갔고, 피자 배달 가방이 매달린 오토바이를 옆에 세워둔 채로 청년 하나가 우동 한 그릇에 잔 소주 몇 잔을 비우고 갔을 뿐이다. 그는 날씨 탓에 더욱 냉기가 돌아 보이는 플라스틱 의자 하나를 끌어다 앉았다. 그는 안주도 없는 강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짐칸 모서리에 백열전등이 하나 매달려 있었다. 그 옆에 생뚱맞게 동그란 거울 하나가 걸려 있었다. 삼십 중반의 주인 사내는 할 일이 없으면 거울 앞으로 가서 자신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곤 했다. 사내는 그 짓이 조금도 지겹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전화기의 단축번호를 눌렀다. 올 때까지 기다린다는 협박이 주효했을까, 그녀는 신호가 가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직장 그만뒀더라. 혹시 나 때문이니?”
  그는 울컥하는 감정을 누르며 또박또박 말했다.
  “천만에. 좀 쉬고 싶었어.”
  쉴 형편이 아닐 텐데, 그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단 한마디도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 최소한의 대답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함께 있으면 쉬지 않고 조잘거리던 여자가 입을 다물면 그게 이별의 전조란 걸 그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침묵으론 아무 진심도 보여줄 수 없을 터였다.
  “피카소에서 널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나. 원장실에 교구를 배달해주고 나오는 길이었지. 빈 강의실에 한 여자가 있었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옷차림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아. 여자가 이젤 위에 세워둔 캔버스를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었거든. 난 그 여자가 화가일 거라고 생각했어. 그곳이 미술 전문 학원이었으니까. 알고 보니 여자는 화가도 미술 선생도 아닌 그저 유치부 보육 교사였지. 솔직히 나, 그 여자에 대한 모든 관심이 사라지는 걸 느꼈어. 그런데 여자가 내게 다가왔지. 핸드백에 타로카드를 가지고 다니는 여자라니. 남자들이 여자에게 손금을 봐주겠다며 접근하기도 하지만 여자가 그러는 건 처음 봤지. 카드를 섞는 네 손놀림을 보면서 전직이 카드 딜러가 아니었나 의심도 했었지. 네 긴 손가락에 카드가 참 잘 어울렸어. 그 후로도 네가 수많은 카드 점을 봐줬지만 난 처음 것만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 넌 말했어. 지금부터 당신 운세는 이 점에 달려 있어요. 그때 뽑은 내 점괘가 십이 번 카드였어. 행드 맨.  빚을 갚지 못해 그 벌로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사람이랬지. 거꾸로 매달렸는데도 그는 조금도 괴롭거나 힘들거나 두려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어.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카락만 아니라면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같았지. 넌 별로 좋지 않은 점괘를 뽑아준 것이 미안하다며 밥을 사겠다고 했고, 난 복채대신 내가 사야 한다고 했어. 그랬더니 넌 그럼 술을 사라고 했지. 난 사실 그 점괘가 싫지 않았어. 누군들 행드 맨 아니겠어?”
  “그런 얘기 지금 왜 하는데? 네가 그림 그리는 여자에게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난 그때 캔버스 따위 보고 있지 않았어. 다리가 아파서 그 앞에 놓인 스툴에 앉아 있었을 뿐이야. 이제 와서 이런 얘기가 다 무슨 소용이니?”
  “난 지금 네 집 앞에 와 있다. 너와 얘기하고 싶다.”
  “전화로 얘기해. 난 멀리 나와 있어.”
  “너, 다른 남자 생겼니? 그 엉터리 점괘에 넘어오는 자식이 또 있든? 네가 핸드백에 타로카드 가지고 다니는 이유를 내가 모르는 줄 알아? 그 자식이 네게 뭘 줄 수 있니?”
  어떤 말을 해도 꿈쩍도 않더니 그녀는 그의 말끝을 채뜨리듯 대답했다.
  “당신이 줄 수 없는 것. 예를 들면 프라하 행 티켓 같은 것.”
  “그 자식 유부남이지. 그렇지?”
  “저질.”
  그 통화를 끝으로 그녀의 전화기는 내내 먹통이었다. 프라하 행 티켓을 끊어줄 정도면 재력이 좀 있을 거고 그렇다면 유부남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다 해도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마지막 인사가 고작 유부남에 저질이어선 곤란한 것이다.
  그녀를 기다리는 일이 점점 무위하게 여겨질수록 잔을 비우는 그의 손길도 빈번해졌다. 어느새 도로를 따라 늘어선 가로등에 형광 빛이 차갑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는 아파트를 들고나는 차량과 사람들을 꼼꼼히 살피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포장마차 주인에게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는 아파트 팔층 창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불빛이 새어나오는 집은 아직 네 집뿐이었다.
  그는 포장 트럭 앞을 지나 아파트 단지 쪽으로 우회전해 들어가는 흰색 벤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차가 느린 속도로 지나갔기 때문에 그는 보조석에 앉아 있는 여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날이 어둑했지만 그녀를 잘못 볼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가타부타 말이 없이 술값을 탁자 위에 던져놓고 일어섰다. 그의 얼굴빛은 불빛 때문이라고 하기엔 지나치리만큼 창백했다. 흰색 벤은 단지 안으로 들어설듯하다가 천천히 반원을 그리며 차체를 돌렸다. 보조석 문이 열리고 키가 훤칠하게 큰 여자가 내렸다. 그녀는 여자로서는 눈에 띄게 큰 키였다. 여자는 차에서 내려 운전석 쪽으로 가더니 운전자와 뭔가 얘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뒷문을 열고 여러 개의 쇼핑백을 꺼내 들었다. 연애가 시작되었구나. 그의 머리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누군가 불방망이를 그의 얼굴에 들이대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펄떡이는 동계로 금세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차체에서 저만치 비켜서더니 양손에 나눠 들고 있던 쇼핑백을 한 손으로 모으고 남은 손을 들어 천천히 좌우로 흔들었다. 흰색 벤은 방금 지나온 길을 돌아나가는 듯싶었다.
  그는 무작정 흰색 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저 겁을 좀 줄 생각이었거나 아니면 연적의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들의 프라하 행을 막을 수만 있다면 흰색 벤에 납작하게 깔려도 좋을 것 같았다. 그는 몇 걸음 내딛다가 쏜살같이 이차선 도로로 뛰어들었다. 속도를 올리려던 벤이 멈칫하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경적이 울렸다. 앞에서 내쏘는 전조등 불빛 덕분에 그는 무대 위에 막 등장한 모노드라마의 주인공 같았다. 그는 돌아서는 여자를 향해 두 손을 들었다. 순간 오토바이 한 대가 포옹하듯 그를 덮치고 저만큼 미끄러져 갔다. 다급한 경적에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끼어들었다. 그의 육신은 분수의 물줄기처럼 솟아올랐다 낮은 포물선을 그리며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졌다. 뒤미처 피자상자가 그의 발치에 떨어졌다. 피자가 절반 넘게 상자 밖으로 비어져 나왔다. 갓 구운 피자에서 따스한 김이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오토바이에 반쪽 엉덩이만을 걸친 채로 청년이 얼빠진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누운 채 두 눈을 부릅떴다. 아파트 발코니의 창들이 열리고 도로를 내려다보려고 길게 목을 늘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흰색 벤에서 내린 남자가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정수리가 반나마 벗겨진 중늙은이였다. 맞잖아, 유부남. 그는 그 와중에도 무릎을 내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가 지독히도 느리게 다가왔다. 여전히 핸드백을 맨 손에 쇼핑백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였다. 그는 호기심과 공포가 뒤섞인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얼굴이었다.
  밖은 완전히 어두워진 모양이다. 주치의의 저녁회진도 끝났다. 어머니는 이따금 짧은 외출을 할 뿐 붙박이처럼 병실에 붙어 있다. 그는 자신의 미라 상태가 며칠 째인지, 앞으로 얼마만큼 계속될지 알 수 없다. 날마다 같은 꿈을 되풀이 꾸어야 한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새로운 꿈을 꾸는 것도 좋을 것이다. 어느 지점으로 돌아갈 것인가? 그래, 그날로 돌아가자. 볕이 따스하던 봄날로. 어머니가 목에 비닐봉투를 두르고 있던 그날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어머니 이리 오세요. 가만 계세요, 제가 염색해드릴게요. 제가 더 찬찬하고 꼼꼼하게 할 수 있다니까요. 보세요. 십 년은 젊어 보이잖아요. 우리 어머니 시집가셔도 되겠네요. 그 봄날에서 자꾸만 작아져서 새 교복을 입고 중학교 입학식을 치르던 날로 돌아가면 어떨까? 교문 밖에서 꽃샘추위로 발갛게 언 뺨에 눈물을 흘리며 서 있던 어머니를 모른 채 외면하고 가버렸던 그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어머니의 언 뺨을 두 손으로 감싸줄 수만 있다면. 그는 중얼거리며 길었던 하루가 끝나감에 안도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했다. 눈꺼풀을 덮어 피곤한 눈을 쉬게 해주는 일이었다. ★






약력: 2007 <내일을여는작가>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