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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
이언지
동지(冬至)에 동지(同志)를 생각하네
위태롭게 숨은 배신을 생각하네
사랑 이외에는 모두가 잡사(雜事)일 뿐
거두절미하고 단순명료하게
모든 것을 걸었던 혈맹의 그 밤
모든 것을 건 대가로 우리는 동지가 되었고
배반은 나약한 자의 무기가 되었네
낯익은 풍경들의 새로운 얼굴을 찾아 하루하루
세월을 편집하는 동안
어느 추운 밤의 모서리를 돌다 멀어졌는지
멀리 있는 동지를 불러보는
오늘은 동지
뜨겁던 밤들의 자줏빛 추억을 넣고
팔팔 끓여 우려낸
저 슬픔으로 얼룩져 끈적끈적한 마음이 새알팥죽이라면 허허
벌판 추운 밤의 모서리마다 미련 없이 뿌리겠네
식어가는 팥죽 위에 서리는 엷은 장막처럼
식어가는 사랑의 어떤 기미를
이제 막 生의 추위에 입문한 몸들이
먼저 알아보고 다가와 묻네
지금은 나쁜 패를 쥐고 생을 곁눈질하는 장세
끗발은 펄펄 끓는 팥죽 속 새알심처럼
내 안에 스스로 떠오르는 것
하지만 동지여,
대낮에 전조등을 켠 채 달리는 차를 보며
이제 막 어둔 터널을 벗어나왔음을 알 수 있듯
나 또한 길고 긴 밤의 동지를 벗어나 환히 불 켜진 얼굴로
너에게로 달려가고 싶네
너는 아직 내가 가지 못한 길이니
아침에 길을 내다
이언지
어머니 사각사각 길을 깎고 계신다
길 떠난다고 길을 내고 계신다
동그랗게 쟁반 위로 쌓이는 길
세상 모든 길 다 품어 안은 순박한 空이
쟁반 위에 그득하다
빨간 굴뚝에 소라지붕
장미꽃 성운이 지붕 위로 피어나는
내 생애 최초의 집
어머니 한칼에 집을 지으시고
꿈속의 시간은 꿈 밖으로 초대된다
오래전 나도
어머니 몸속에 길을 냈던 적이 있다
내 몸이 칼이 되어 돌돌돌 어머니를 도려내었다
아플수록 환하게 발산하던 향기
비단길도 아니고 신작로도 아니고
길섶에 하얀 사과꽃 몽글몽글 맺혀 있는 두렁길이었다
그 길을 따라 집을 떠난 적이 있다
매일 아침 식탁 모서리에 앉아
나는 길을 깎는다
사각사각 사과사과
그녀가 그랬듯 늘 용서하는 버릇으로 길을 깎는다
집을 짓는다
마당가에 안숙하는 꽃들은
나의 누실명(陋室銘)
오직 사랑만이 사랑을 하고
사랑만이 길을 낸다
연민은 쉽지만 사랑은 쉽지 않다는 걸
사려니숲길을 걸으며 나는 알았다
□ 약력: 2008 《국제신문》 신춘문예, 2010 『서정시학』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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