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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김형미
물이 되어 누워 있으면 가만가만 출렁이는 저녁이 온다. 일어나서 몸을 움직이면 파문이 일어 어질거린다. 어질거리는 걸음 위로 비가 내린다. 저 비는 맨 처음부터 내 안에 있었다는 걸, 옛집 소나무 밑에 묻어두고 온 눈 맑은 흰둥개마냥 나는 잊고 있었다. 서남간방에서 너무 많은 말의 씨를 머금고 있는 내게 비가 다녀갈 때마다 비름한 쇳소리를 실은 붉은 소나무 숲이 찾아든다. 세 번째에 가서 반드시 꺾어지는 마디가 있는 서래선림(西來禪林). 마디 속에서 나이와 연륜이 깊어진, 각기둥을 가진 그 숲이 고요히 안을 응시한다. 그러다가 뿌리에 봉령(茯苓)과 같은 작은 이슬 하나 맺히면, 마당을 지키던 오래된 짐승의 터럭 냄새가 나를 끌고 어지러운 세상 속으로 가자 한다. 별이 일러주는 곳에 가서 묵직한 아쟁소리로 한 생을 살다가 다시 물이 되라 한다. 고요하게 그쳐 있으면서도 둥글게 움직이는 물. 각기둥에 등을 대고 해 지는 서편을 향해 앉아 집 밖을 나가서 십이 년 동안 떠돌다 다시 내게 돌아오고 있는 비를 본다. 가물거리는 옛집의 기억을 안고 흰둥개도 다시 돌아와 내 곁에서 주인의 마음을 듣는다. 물이 웃는다.
여음(餘音)
김형미
내게 여음이 생겼다. 다른 음들을 꼼꼼히 둘러보고, 어느 기러기의 발이 아픈지 조심스럽게 손으로 만져 주기도 한다. 아픈 기러기일수록 소리 속에 저를 놓아 깊어지는 법을 안다. 두물머리 지나 사람 속을 고조곤히 건너다닐 줄도 안다. 진양조에서 휘모리까지 한바탕을 살고 나면 그러모았던 숨을 내리며 오동나무 가지 위 일렬로 내려앉는 기러기들. 동지에 이르러 가장 슬픈 소리를 내는 새의 울음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주기도 하면서, 내 열 손가락은 노곤한 줄도 모르고 저녁 속에 가만 몸을 기댄다. 울음을 너무 바짝 당겨도 기러기는 발이 꺾인다. 그리고 기러기의 울음이 버거울 때 가야금은 저 스스로 줄을 놓아버리기도 한다. 그 간격을 잘 조율하여 나는 부들에 매어두었던 열두 줄 매듭을 풀어 오동꽃 피기 전 다시 한 해를 땅 위에 걸어둔다. 기러기가 언제든 또 날아와 울다 갈 수 있게. 기러기 날아가고 세워둔 가야금 속에서 스릉(Ω), 한 해가 돈다.
약력: 2003년 <문학사상> 등단. 시집 『산 밖의 산으로 가는 길』. 2011 년 불꽃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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