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수필>
대성동 일박

송태웅

늦가을을 재촉하는 비 내리고 쌍계사 지나서 의신으로 향한다. 이 길 옆으로 지리산은 수많은 골짜기를 품고 있다. 내가 30대에 지리산과의 열애에 빠졌을 때 이 골짜기들은 젊은 육체를 숨가쁘게 매혹했다. 의신에서 대성동으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느꼈던 황홀한 긴장감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나도밤나무와 떡갈나무들이 수런대는 숲이 나를 맞는다. 아니, 지구별에 불시착해서 세상과 온갖 불협화음을 내는 내가 이 숲속에 든다.
이 시간에 서쪽 하늘로부터 어둠이 와야 한다. 어제 읽었던 최승자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르고 로드리고의 아랑페즈 협주곡이 흐르고 전화선을 타고 흐르던 어머니의 음성이 귓전을 맴돈다. 배낭에서 랜턴을 꺼냈으나 배터리는 방전된 후였다. 어둠은 이 숲과 한몸인 양 완강하게 침착되었다. 이제 어둠 속에서 저 크고도 광활한 어둠을 보자.
어둠 속에 있는 것은 나만은 아니었다. 연둣빛 불빛을 내면서 반딧불이가 날고 있었다. 모닥불을 흐트러뜨렸을 때 흩날리는 불씨들보다 조금 부드러운 몸짓으로 어두운 숲속을 날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정갈한 춤사위였다. 그것은 또 어떤 평화도 그냥 올 수는 없다는 신호인 듯했다.
저 물소리 너머에 대성동 민박집이 있다. 우뚝우뚝 선 후박나무들이 도열해 있고 오징어잡이배의 집어등처럼 내 젊은 날의 기억들이 줄지어 기다릴 그 집들이. 서른을 갓 넘기고 박두규 형과 함께 박배엽 시인을 만났던 곳. 온몸이 땀에 전 채 당도했을 때 박배엽 시인은 그 어느 시인들보다 크고 우뚝한 몸짓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그것은 바로 민박집 뒤뜰에 선 후박나무의 이미지였다. 그리고 그후 나와 박배엽 시인은 자주 지리산에 출몰했다. 그도 나도 독신이었고 그 상태가 변화할 어떤 조짐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백두산 안 갑니다’라는, 첨엔 잘 이해되지 않는 시 한 편을 남겼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없지만 내가 혼자서 산행을 나설 때 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우렁우렁 말을 건네는 것 같다. 지리산은 그 두 박 시인들과 함께 나누었던 공동의 연인이었다.
민박집에 밥을 청해서 먹고 막걸리를 마셨다. 옆 평상에서 먼저 자리를 잡은 여인네들의 질펀한 노랫소리가 번진다. 곧 비가 쏟아졌고, 노랫소리는 빗소리에 지지 않으려는 듯 점점 더 커졌다. 나는 무릎에 고개를 박고 생각에 잠겼다. 시를 쓰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떠난 선배 시인을 생각했다. 이 신산스러운 삶에서 시는 무엇인가. 그는 시에서 한 줄기의 위로의 끈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일까.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은 행복할까, 불행할까. 나는 왜 갑자기 내가 무서워지는 것일까. 나는 왜 몹시도 내가 낯설어지는 것일까.
비는 더 거세졌다. 나뭇잎들은 더 낭자히 떨어질 것이다. 그래도 나는 세석까지 가야겠다. 대성동 계곡을 처음 걸을 때의 생각. 어쩌면 지리산에서의 첫경험. 그 처음의 처음을 반드시 떠올려야 겠기에. 그 처음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어쩌면 나도 그 선배 시인처럼 떠나가야 할지도 모르겠기에.
온 산이 떨어진 나뭇잎 천지였다. 그 형형색색의 나뭇잎들이 만들어내는 세상은 화려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적요했다. 세상이 아름다워지려면 저 풍경을 닮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생이 아름다워지려면 역시 저 나무들의 모습을 닮아야 하리라. 여름에 무성했다가 가을이면 자기를 사르고 지상으로 귀환하는 저 모습을. 저 나뭇잎들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왔다가 갔을 것이다. 아, 너무도 놀랍지 않은가. 나도 저 많은 나뭇잎들 중 하나라는 사실이. 그리하여 내가 홀로이지 않다는 사실이.
나는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다가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다가 나무들에게 뭐라고 말을 걸다가 생각나서 핸드폰 메모장에다가 몇 줄 시를 쓰다가 결국 지쳐서는 왼 다리가 오른 다리를 끄는 형국이 돼서 지리산을 헤맸다. 그리고 시간만 나면 또 헤매러 지리산에 들어가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