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제목	[에세이] [경남] 이한걸 / 썩은 사과
이름	사무처

썩은 사과

이한걸

나는 사과를 먹을 때면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와삭와삭 입안에서 부서지는 사과단맛을 삼킬 때마다 어머니에게 죄송스럽고 내 자신에게는 부끄러움을 떨칠 수 없다. 사과의 맛이 달면 달수록 고통의 맛도 커지는 것이다.
60년대 초 어머니는 한동안 호구지책으로 과수원과 시장을 오가며 사과 장사를 했다. 이웃마을 과수원에서 사과를 받아다 시장난전에서 파는 장사였다. 그런데 어머니가 받아오는 사과는 잘 익고 때깔 고운 온전한 사과가 아니다. 떨어지면서 상처를 입었거나 조금씩 썩은 사과다. 지금으로 말하면 상품이 될 수 없는 폐기처분되어야할 불량품 사과였다.
당시에는 이런 종류의 과일이 거래되었다. 과수원주인은 퇴비로 사용되어야할 불량품을 따로 모아서 싼값에 팔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상한 사과를 받아서 시장에다 소매를 하였다. 자금이 넉넉했으면 양질의 상품을 받아다 팔아야 이익도 많고 힘도 덜 들었을 것이나 자금이 없다보니 구걸하다시피 상한 사과를 싼값에 받아다 팔았던 것이다.
집에서 과수원까지 거리는 십리다. 중간에는 개울이 하나 있다. 이 개울에는 징검다리조차 없었다.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차가운 물을 오가며 건너야 한다. 집에서 시장까지도 십리길이다. 어머니는 새벽에 일어나 과수원에서 사과를 받아서 집에 왔다가 다시 시장을 나선다. 식구들 아침을 굶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먼 거리를 힘들고 바쁘게 쫓아다녀봐야 별 이익도 없을 것이다. 썩은 사과를 팔아서 무슨 이익이 남을까. 썩은 사과를 사 먹는 소비자 역시 헐벗은 사람들이다.
어머니가 새벽부터 사 십리 길을 힘겹게 뛰어다녀도 이익이 남을까 말까한 사과를, 달콤한 향기에 취해 나는 그만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곳간에서 풍겨오는 향기를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목구멍으로 침을 꼴딱 삼키면서 참으려 애를 썼지만 그럴 때마다 마음은 더 간절했다. 그렇게 사과가 먹고 싶을 수 없었다. 저 사과를 한 입만 먹었으면! 막내 동생을 업은 채 나는 가만히 곳간으로 들어갔다. 소복하게 쌓여있는 광주리에서 사과향기가 진동하며 콧속으로 밀려왔다. 사과하나를 집어 들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내려놓았다. 그리고 돌아섰다.
나는 그길로 곳간에서 나왔어야 했다. 그러나 간사한 마음이 나를 또 돌아서게 했다. 사과 하나를 들었다 놓았다 하기를 열 번도 넘었을 것이다. 나는 끝내 사과 하나를 들고 곳간을 나왔다. 곧장 뒷산으로 숨었다. 막내 동생과 마주앉아 사과를 먹었다.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 껍질 채 먹었다. 아니 씨앗 한 알 안남기고 다 먹었다. 사과가 그렇게 맛있는 과일인줄 몰랐다. 사과를 다 먹고 죄책감에 선뜻 산을 내려올 수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 어머니가 사과를 이고 시장으로 떠나는 모습을 보고서야 집으로 내려왔다.
그날 저녁 나는 어머니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꾸지람을 듣는 나도 눈물을 흘렸고 꾸짖는 어머니도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사과는 100개 단위로 거래 한다는 것이다. 과수원에서 살 때에도 100개단위로 계산하고 시장에다 팔 때에도 100개였다. 과수원주인은 부자였으나 덤으로 몇 개 더 주는 예가 없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과수원에서도 몇 번을 세었고 시장을 가지전에도 꼭 확인을 했다. 그날도 어머니는 곳간에서 확인을 했다. 세고 또 세어도 하나가 모자랐다. 속이 탔다. 시장에 가서도 혹시나 하여 몇 번을 세어 봤지만 하나가 모자랐다. 어머니는 결국 옆 사람에게 사정사정 하여 하나를 사 보태어 겨우 팔 수 있었다.
나는 곳간에 소복하게 쌓여있는 사과를 보면서 한 개쯤 없어져도 어머니는 모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들었다 놓았다 갈등하면서도, 산속에서 맛나게 먹으면서도 그 생각은 변함없었다. 한 개가 없어져도 어머니는 모를 것이라는 판단이 나의 부끄러움을 희석시키는 작용을 했던 것이다.
그날 어머니는 사과를 세면서 얼마나 마음이 상했을까? 애매한 과수원주인을 얼마나 원망했을까? 둘째 아들이 그랬다는 사실을 알고 나에 대한 실망은 또 얼마나 컸을까?
나는 지금도 사과를 먹으면서 쓰다달다 불평을 못한다. 달면 단대로 덜 달면 덜 단대로 그저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어릴 적 저지른 실수가 사과 맛을 음미할 감각을 마비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 이한걸 : 1950년 강릉 출생. 1995년 근로자문학상 수상. 1998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