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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제18회
뉴스를 탄 멧돼지소동
박 래 녀(소설가)
병원에 갔다.
‘아픈 곳이 좀 낫느냐’고 묻는 의사에게 ‘그저 그렇다’고 대답했다. ‘기
다려보자’며 의사는 주사기를 들었다. 눈을 꼬옥 감았다. 아픔이 정수리를 타
고 아래로 흐른다. 아이처럼 나도 주사라면 무섭다.
주사를 맞고, 물리치료를 하고 나오니 세 사람이 병원 문을 들어섰다. 첫눈에
사고를 당한 몰골이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남자 두 사람은 흙투성이 옷과 얼
굴에 핏방울이 튀어 엉망이다. 한 남자는 궁둥이의 바지가 찢어져 속옷이 보이
고, 어깨죽지 있는 데도 옷이 찢어져서 피가 삐죽하게 나와 엉켜 있다.
“사고 났어요?”
“별일 아닙니다.”
병원을 나와 약국에 가서 약을 지었다.
내 뒤를 따라 약국에 들어 온 남자는 조금 전 병원에서 본 남자다. 그 남자도
처방전을 가지고 약을 짓는다. 그 남자는 핸드폰으로 어딘론가 전화를 했다.
“쓸개를 누가 팔라지만 잡은 사람 주어야지요. 다치기까지 했는데. 의사가 괜
찮답니다.”
“무슨 일이었어요?”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물었다. 멧돼지와 사투를 벌였다는 것이다. 낮에 멧돼
지가 작업장으로 내려와 일하는 인부를 덥쳤단다. 아마도 사냥꾼들에게 쫓기던
멧돼지였던 모양이라며 맨손으로 잡았다는 이야기다. 멧돼지가 총을 맞았더라
는 이야기도 했다. '총을 맞았으니 인가로 내려왔지. 불쌍한 멧돼지' 하면서도
다친 사람의 상처가 '그만하기 다행이구나' 여기며 집에 왔다.
저녁 뉴스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낯익은 모습이 비쳤기 때문이다. 멧돼지와
사투를 벌이는 남자 두 사람이 바로 낮에 병원에서 만났던 사람들이었다. 바로
우리 이웃 마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살이 피둥피둥 찐 멧돼지는 숫놈이었다.
사람들을 떠받는 모습이 무서웠다. 몽둥이를 들고 설치는 사람들을 피하지도
않고 공격하는 멧돼지의 공격성도 무서웠지만 그 멧돼지 잡겠다고 설치는 사람
들도 소름이 돋게 했다. 결국 멧돼지는 굴복했다. 총에 맞아 혼이 나간 녀석이
었지만 도망가지 않고 맞서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깊은 산속에 살아야
할 멧돼지가 밀렵꾼들에게 쫓겨 산을 벗어냐야만 했던 슬픈 현실이 안타까왔
다.
그 멧돼지는 전국 뉴스에도 나왔다. 멧돼지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과의
한판 승은 분명 멧돼지였다.
멧돼지 이야기로 분분한데 남편 친구가 왔다. 멧돼지 고기를 한 덩어리 가지
고. 큰 놈 한 놈 잡았다면서.
사냥 허가가 난 겨울철이면 사냥꾼들의 길 안내로 생활 호구를 삼는 사람이다.
덕분에 심심찮게 멧돼지 고기 맛을 보지만 뉴스에 나왔던 멧돼지 생각을 하니
속이 이상했다. 생명 있는 것들은 다 소중한 것인데. 사람과 멧돼지는 천적일
까? 사람 몸에 좋다는 이유로 밀렵을 일삼는 사람들과 먹이감이 되는 멧돼지들
의 수난시대가 바로 겨울이다.
숯불에 멧돼지 고기를 구워 술을 마시는 남자들을 바라보며 인간이란 얼마만큼
잔인해질 수 있는 동물일까 생각했다. 대낮에 사냥꾼에게 쫓겨 산을 벗어나 인
가로 내려온 멧돼지 생각을 하니 멧돼지 고기에 쉽게 젓가락이 가지 않는다.
웅담과 맞먹는다는 쓸개를 얻기 위해 밀렵군들의 표적이 되는 멧돼지나 산짐승
을 잡아 생계를 이어가는 포수와 길라잡이인 사냥개도 전생에 어떤 연결고리가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윤회의 끈은 그만큼 무겁고 불가사의 한 연에 의한
것이라는 데.
요즘 심심찮게 사냥꾼들을 만난다. 포인터라는 사냥개 서너 마리를 거느리고
집 앞의 억새밭을 뒤지는 사람들을 보면 열불이 난다.
엇그제도 따앙! 하는 총소리에 어찌나 놀랐던지. 식탁에 앉아 점심을 먹다가
식구들이 벌떡 일어나 창가로 우루루 몰렸다. 남편은 현관을 열고 나가 고함을
질렀다.
“당신네들 정신이 있소 없소? 남의 집 앞에서 총질을 해도 되는 거요? 허가증
가지고 있소?”
군청색 사냥꾼 복장의 두 남자는 휘파람을 불어 개들을 앞세우고 멀어져 갔다.
밀렵꾼들이 기승을 부리는 겨울 산자락에서 꿩도, 노루도 몸을 사린다.
집 앞 못둑에 새끼들을 데리고 일렬로 나와서 지나가던 멧돼지 가족의 행복한
모습을 지켜보았던 기억도 있고, 염손 줄 알고 이리 오라고 고함을 질렀다가
푸우푸 성난 멧돼지의 입김에 놀라 혼비백산을 한 적도 있고, 다랑이와 산비알
밭을 제 안방처럼 휘젖고 간 흔적을 보았지만 지금은 꿈결처럼 아련한 기억이
다.
지난 해부터 내가 사는 산골에 관광 순환 도로공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겨울 철이면 집앞 다랑이나 산길 모롱이에서 흔히 보던 멧돼지 가족도, 노루
가족도, 너구리나 산토끼 가족도 자주 볼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요즘은 산짐승이 살 터전이 없다. 깊은 산에도 사방에 길이 나 있다. 사람은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사는 짐승인지 모른
다. 산짐승은 어디로 숨어야 할까. 살기 위해서 사람을 공격하는 멧돼지를 보
며 루소를 생각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친 고독한 산보자 그가 뉴스 장면
을 봤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자신이 인간이란 것을 참 부끄럽다 했을 것 같다. (2002년 1월 씀)
처음 올린 날: 2002년 3월 9일(토)
박래녀(소설가) --------------
민족문학작가회의 경남지회 회원. 홈페이지 http://myhome.naver.com/chagul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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