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에세이 제16회

고향
- 시가 있는 에세이 -

맹 문 재(시인)

고향

백석 作

나는 北關에 혼자 앓아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을 뵈이었다
의원은 如來 같은 상을 하고 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드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 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 씨를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이라며 수염을 쓴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지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고향은 내 마음의 거울이고 병원이다. 일터로 나가면서 다시 한번 얼굴과 옷매
무새를 살피는데 필요한 거울과 같고 몸이 아플 때 찾는 병원과 같은 것이다.
진정 고향은 내 삶의 뿌리이다.
고향은 싸락눈이 날리고 바람이 불어 으슬으슬 추운 저녁 어느 이웃에서 끓이
는 구수한 시래기국 냄새가 날 때면 생각난다. 장마비가 한 열흘 동안 계속 내
려 방이 눅눅하고 옷가지나 신발들에서 퀴퀴한 냄새가 날 때도 생각난다. 은행
잎들이 눈 내리듯 바람에 떨어져 쌓이는 가로등 켜진 길을 혼자 터벅터벅 걸으
며 귀가할 때도 생각난다. 마른 나뭇가지에서 새싹들이 아기의 이가 솟아나듯
파릇파릇 돋고 나비들이 그 위에 흐르는 햇살을 헤치며 날아가는 것을 볼 때도
생각난다. 한 달이 넘는 가뭄으로 논밭이 쩍쩍 갈라져 농사를 포기하고 있는
농부들의 주름잡힌 얼굴을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볼 때도, 보험금을 노리고 자
식이 아비를 죽인 사건을 신문에서 읽을 때도 생각난다. 시외버스를 타고 가다
가 차 안에서 듣는 어린 날 마을 청년들을 따라 부르던 유행가, 배가 출출할
시간쯤 골목 저 아래에서 들려오는 찹쌀떡 사려! 메밀묵 사려! 하는 어린 목소
리, 지하철역 출입구의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껌을 팔고 있는 할머니, 뻥! 하
는 소리에 깜짝 놀란 뒤 바라보는 길가의 뻥튀기 장수, 식당에서 무엇을 먹을
까 하고 차림표를 들여다보다가 읽게 되는 된장찌개 혹은 콩비지…… 등에서도
생각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향은 객지에서 몸이 아파 밥맛을 잃고 마땅히
부를 사람도 없어 방안에 누워 있을 때 생각난다. 그저 눈물이 나며 그리워지
는 것이다.
내가 백석의 [고향]을 읽은 것은 흑석동 산꼭대기에 있는 한 허름하기 짝이 없
는 사글세방에서였다. 집에 배달된 무슨 사보를 무심히 넘기다가 보았는데 다
읽고 나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날 특별한 이유도 없었지만 그
칠 줄 몰랐다. 아마 오랜 객지 생활에서의 외로움 때문이었을 것으로 눈물 속
에는 고향에 계신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동생들, 친척들, 이웃들이 자꾸 떠
올랐다. 그분들의 가난과 힘없음과 무지함이 새삼스레 서럽게 여겨졌고 그분들
을 위하겠다는 나의 다짐이 허풍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 화가 났고 서글펐
다.
나는 그때 허리가 아파 고생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났는데 허리가 아
파 나는 잠을 잘못 자서 그렇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날이 갈
수록 낫기는커녕 점점 더 아파 어느새 다리까지 당겨 제대로 앉을 수도 없었
다. 할 수 없이 용하다고 집주인이 소개한 무허가 집에 찾아가 침을 맞았다.
그러나 별 차도가 없었다. 그래서 한의원에 가서 다시 진찰을 받고 물리치료를
받았는데 그래도 낫지 않았다. 나는 허리디스크가 아닌가 하고 덜컥 겁이 났
고, 만약 그렇게 되었을 때 엄청난 수술비와 생활의 중단으로 인해 나의 삶은
끝이라는 생각이 들어 눈앞이 캄캄했다. 한의원에서는 보약을 권했지만 나는
주머니 사정상 선뜻 따를 수도 없었다. 몸이 더 나빠져 수술을 하게 되면 약값
보다도 훨씬 큰돈이 든다는 것을 알면서도 워낙 주머니 사정이 어려웠기 때문
에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허리와 다리가 아프다보니 책상에 앉기가 불편해 책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청
탁해주는 데도 없었지만 작품을 쓸 수도 없었다. 또 취직을 못했으므로 얼른
아르바이트를 해야 되는데 움직일 수 없으니 짜증스럽고 초조했다. 그리고 무
엇보다도 외로웠다. 객지생활에서 제일 서글픈 일이 몸 아픈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정말 의지할 데가 없다고 생각하니 외롭고 슬펐다. 친
척들이 있었지만 모두 가난하기 때문에 차마 부탁할 수 없었고 사랑해주는 여
자 친구를 사귀지 못했기 때문에 의지할 수 없었다. 바쁘게 살아가는 친구들에
게 알리기가 미안했고 걱정하실까봐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도 알릴 수 없었다.
그리하여 어두컴컴한 방안에 멍하니 누워 나 자신이 불행하고 불운하고 어리석
다고 자조하고 운명이 너무 힘들다고 하늘을 원망했다. 그러던 때였으므로 <北
關에 혼자 앓아 누워> 있는 백석 시인의 상황에 동감한 것이다.
한참을 울고 나자 <넌지시 웃>는 <의원> 같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얼굴이 그
리고 이웃들과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치 시험문제를 내놓고 내가 더 클
수 있을까 하고 바라보는 듯한 인상이었다. 나는 그 순간 나의 아픔이 곧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다. 얼른 큰 병원에 가서 정밀진단을 받아야 한다는 행동
지침도 떠올랐다.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이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 인상은 아니라도
자상하게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느니/문득 물
어 고향이 어데냐>고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의 고향을 얘기하면 의사 선생님
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좋은 곳에서 태어났다고 말할 것 같았다. 그리고 현
재 아픈 것이 심각한 상태가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 처방전을
써주고 몇 가지 운동방법을 알려줄 것 같았다. 앞으로 스트레스 받지 말고 편
안한 마음으로 생활하고 식사를 굶거나 불규칙하게 하지 말고 제때에 하고 그
리고 적당한 운동을 꾸준히 하라는 말도 따스하게 전할 것 같았다.
나는 몸이 나아지면 고향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 몇 근을 사들
고 가 이웃 어른들을 모셔다가 아침 한끼라도 대접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고향의 바람을 한차례 쐬고 오면 몸에 기운이 돋아 활력이 생기고 계획
하는 논문이 잘 쓰여지고 작품활동도 활발히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나의 진심
을 전하는 용기가 생겨 사랑하는 사람을 얻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농업기반> 2002년 1/2월호 수록)

처음 올린 날: 2002년 2월 8일(금)

맹문재(시인) --------------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1991년 문학정신 신인문학상 당선
1993년 전태일문학상, 1996년 윤상원문학상 수상
시집 [먼 길을 움직인다]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