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2001.06.15

1.'파시스트적 가속도'에 몸을 맡겨라?
영화에 묘사된 인터넷에 대한 글을 내가 제대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의문으로 이 글은 시작된다. 편집자는, 인터넷을 줄거리에 끼워 넣은 영
화들에 대해서, 그러나 영화 자체보다는 인터넷에 초점을 맞춘 그런 글을
요구했다. 내가 영화를 좋아하고, 또 <넷스케이프>를 사용하기도 하기도
하니까 그런 글을 만들 수 있으리라고 편집자는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
나 나에게는 그런 글을 제대로 만들 만한 능력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인
터넷에 대해 글을 쓸 만큼 잘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인터넷은, 내가 사용하는 웹 브라우저의 명칭처럼 얽혀 있는
'그물(net)의 풍경(scape)'을 둘러 볼 수 있게 해주는 또 하나의 장난감
에 지나지 않는다. 외국으로 전자 우편을 보내고 받을 일도 없고, 인터넷
폰을 이용해서 싼 값으로 국제 전화를 할 일 또한 없으며, 채팅은 국내
통신망에서도 하지 못하고(내 손가락은 자판을 외울 생각 조차 않고 있
다), 그러므로 컴퓨터를 게임기로 쓰는 나지만 머드 게임은 꿈도 못꾼다.
외국어에는 깜깜인지라 무슨 자료를 찾아본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하
고, 필요한(또는 필요하리라고 여겨지는) 소프트 웨어(쉐어나 프리 웨어
등)는 국내 BBS에 있는 것들을 내려 받아 쓰기도 벅찰 지경이다. 물론 나
는 유닉스에 대해 거의 전혀 알지 못하므로, 웹 브라우저를 이용해 여기
저기를 기웃거릴 뿐이다. 그러니 내 주제에 홈 페이지를 개설한다는 따위
의 망상은 아예 할 수 조차 없다(설사 개설한다 한들 거기에 무엇을 올려
놓을 것인가?). 그러므로 이런 내가 만일 인터넷을 이용해서 사업을 하기
로 한다면, 그것은 강아지도 웃을 일일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계속 인터넷에 들락거리는 것은, 순전히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기질 때문이다. 책이나 영화가 구경하기에 썩 좋은 것들이듯이,
인터넷의―그러니까 세계 각국의 이곳저곳에 자리잡고 있는 그 무수한 사
이트들도 구경하기가 아주 좋은, 도끼 자루 썩혀가며 구경할 만한 것들이
다. 게다가 손가락만 까닥거리면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남미로…… 다
양한 풍경들을 기웃거리며 다닐 수 있으니, 게으른 나에게는 더 없이 좋
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인터넷을―아니, 컴퓨터까지도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더구나 요즈음의 인터넷 열풍은, 그 기막힌 상업성이 나로 하
여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할 뿐이다. 하기야 컴퓨터라는 물건이 돈
잡아먹는 기계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물론 아직까지 286 PC로 <
한글 1.52>를 쓰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나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
에게는 이 정도의 시스템이면 크게 모자람이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렇
다면 나는 왜 펜티엄에다, 하드 포맷까지 해가며 열 번이 훨씬 넘게 다시
깐 <윈도 95>나 <한글 3.0b> 등을 쓰고 있는가? 'SEK' 같은 전시회에는
왜 가서 기웃거리며, 부풀어 오르는 욕망을 동전이 달랑거리는 주머니 속
에 구겨 넣고 침만 흘리는가?).
어쨌거나 나는 청탁을 거절하지 못했으니, 이 글을 만들기에 적당한
영화를 해골 속에서 더듬어 본 다음 비디오테잎 대여점으로 달려가야 하
고, 국내 BBS의 영화 동호회를 기웃거려 보거나, 웹으로 그런 영화에 대
한 소개가 있는 사이트들을 뒤적거려야 할 지도 모른다(그러나, 아마도,
나는 활자 매체에 더 많이 기댈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지금까지 본 영화
들 가운데 등장 인물들이 컴퓨터 통신이나 인터넷을 이용하는 영화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영화들에 묘사된 컴퓨터 통신이나 인터넷은 모
두가 엉터리였다. 내가 그런 영화의 등장 인물들처럼 성능이 좋은 기계를
가지고 있지도 못하고, 컴퓨터를 다루는 실력이 뛰어나지도 못해서 인지
는 몰라도,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이 많았다. 컴퓨터나 컴퓨터 통신망을
중요한 도구로 등장시킨, 보기는 했지만 제목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그런
영화들은 물론이려니와, <네트>나 <스니커즈>, <워 게임>, <암살자> 등과
같이 중요한 등장 인물을 해커로 설정한 영화들을 보면서도 나는 황당하
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애당초 그런 영화들을, '이해'라는 낱
말을 염두에 두고 보지는 않았지만).
주인공이 자기와는 무관하게 진행되는 어떤 음모에 우연히 얽혀들어
온갖 고비를 넘긴 뒤에, 음모는 깨지고 주인공은 방글 거린다는, 히치콕
스타일의 영화인 어윈 윙클러의 <네트>는, '인터넷을 조연급으로 등장시
켰다'고까지 선전되었지만, 이 영화가 엉터리라는 것을 아예 처음부터 밝
히고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컴퓨터
프로그램 분석가인 여주인공이 의뢰받은 프로그램을 분석하고 있는 데서
시작 되는데, 그 프로그램이 <볼펜슈타인>이라는, 386급 PC 시절에 선풍
적인 인기를 끌었던, 그러니까 이미 한물 간,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훨씬
이전의 액션 게임이다. 더구나 그 게임이 너무 폭력적이고 어쩌고 하는
대사는 정말 기가막히지 않을 수 없는데, 그 게임이 잔인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후에 발표된 <둠>이나 <둠Ⅱ>(이 게임은 너무 잔인하다고 해
서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수입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게임을 좋아하는 사
람들 가운데 이 게임을 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고, 전작에 비해 특
히 더 잔인하다고 할 것도 없다), <헤레틱>, 최근의 <듀크 뉴켐> 등과 비
교하면 만화 같은 정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설정한 주요 음모는, 한 범죄 집단이 <문지기>라는 보안
용 프로그램을 팔아 먹기 위해, 그 프로그램을 사용하지 않는 주식시장이
나 공항, 은행 등의 대형 컴퓨터를 해킹한다는 것이고(한 도시에서 <문지
기>라는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은행을 제외한 모든 은행이 해킹 당한다는,
'천치적'인 상황까지 소개하고 있다), 그들이 <문지기>라는 프로그램을
팔아 먹고자 하는 이유는, 그 프로그램에 아는 사람들만 드나들 수 있는
비밀 문을 만들 놓았기 때문에 <문지기>가 설치된 컴퓨터는 그들의 것이
나 마찬가지라는 것(그런데 비밀 문을 버젓이 드러내놓은 것을 보니, 범
인들은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는 자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
든 정보를 손아귀에 넣으려 한다는 것이다(정보가 곧 권력과 돈이라는 사
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국가 기밀'이니, '언론 통제'니, '산업 스
파이'니 하는 말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리고 '복부인'이
라는 족속들이 왜 '개발 정보'에 혈안이 되었던가도. 물론 연애를 잘 하
기 위해서도 정보는 필요하다). 그러니까 그들은 모뎀(또는 전용선)이 장
착된 컴퓨터 한 대로 세계를 정복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제 세계를 정복
하는 데에 007 씨리즈의 스펙터 같은 거대 집단은 불필요한 낭비일 뿐이
다. 또 사람을 죽일 때도, 가령 벌거벗긴 여자의 온몸에 황금 페인트를
칠해서 송장으로도 눈요기를 시켜주는(<007 골드핑거>) 따위의 번거로운
일은 하지 않는다. '당신은 에이즈 환자'라는 거짓 정보를 주어 자살을
하게 하든가, 관제실의 컴퓨터에 침투해서 비행기를 추락시킨다든가, 병
원의 컴퓨터를 조작해서 엉뚱한 약을 투약케 해 죽이든가 한다. 뿐만 아
니라 컴퓨터에 기록된 정보를 조작해서, 엉뚱한 사람으로 바꿔버려 스스
로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게 해버리기도 한다(우리가 가장 우려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런 부분일 것이다/영화의 기둥 줄거리는, <문지기>의 비밀
을 우연히 알게 된 여주인공이 자신을 제거하려는 범죄 집단에 쫓기며 겪
는 난리법석인데, 그들은 여주인공에 대한 컴퓨터 기록도 엉뚱한 사람의
것으로 바꿔서 스스로를 증명할 수 없게 하는 방법도 사용한다. 보드리야
르를 인용해야 할까? "원본도 사실성도 없는 실재" 운운하며). "온세상이
컴퓨터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이 영화의 황당한 부분들을 일일이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히치콕이 보았다면 탄식을 금치 못했을 영화인 <네트>(내가 이
영화를 보며 가장 불쾌했던 것은, 그러나 프로콜 하럼의 명곡 <A Whiter
Shade of Pale>을 다시 부른 에니 레녹스의 노래―좋은 노래를 그렇게 망
칠 수도 있다―를 주제가로 써먹고 있다는 것이었다)의 상황 설정은, 그
럼에도 심하게 과장된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온세상을 컴퓨
터 안에 우겨넣는 작업이 지금도 진행중이며, 그로 인한 예기치 못했던
사고도 빈발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니까. 작년에 컴퓨터 사고로 200자 원
고지 5000장쯤의 원고를 날려버린 내 친구의 경우는 그 친구 혼자의 손해
로 그친다 하더라도(그 친구의 컴퓨터에 세계적인 걸작이 들어 있었을 것
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으니까), 지난 5월 28일의 전산망 사고로 주식시장
이 한동안 마비되었던 것을 보면, 영화에서처럼 고의가 아니더라도, 컴퓨
터에 기대고 있는 사회가 얼마나 취약한 사회인가를 알 수 있다. 게다가,
그 사건이 보도가 된 것은 규모가 컸기 때문이고, 증권거래소의 전산망
사고가 1990년 이후에만 무려 51번이나 있었다고 한다. ID와 비밀번호 도
용은 이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고, 인터넷을 이용한 해킹도 더 이상 신
기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컴퓨터가 있는 모든 기관들에서 발생한, 알려
지지 않은 사고는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만일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사회를 마비시키려고 한다면, 그것보다 쉬운 일도 없으리라는 생각까지
든다.
그런데 한글 코드조차 현대 한글로 표현 가능한 10000여 자의 1/5 남
짓밖에 쓸 수 없는 완성형으로 결정해버리고, 두드리기 편하고 오타도 훨
씬 적은 세벌식 대신 두벌식 자판을 표준으로 정해버린 작자들이 '정보화
시대'니 '정보 고속도로'니 하는 소리들을 해대고 있다. 더구나 어떤 신
문은 초등학교에 인터넷을 보급 하자고 난리법석을 떨기까지 한다. 도대
체 어쩌자는 것인가? 방향도 없이 무작정 달려서 '파시스트적 가속도'(들
뢰즈)에 몸을 맡기기만 하면 지상 낙원에 이른단 말인가? 제발 클리포드
스톨의 <허풍떠는 인터넷(Silicon Snake Oil)>이라도 한 번 읽어 보기 바
란다.
우리나라의 개인용 컴퓨터 보급 댓수가 1996년 6월 현재 600만 대에
육박하며, 인터넷 사용자도 10만 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우리가 '제3의
물결'을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다(나도 원고나 사진을 전자 우편이나 팩
스로 보내고, 컴퓨터 관련 잡지를 적어도 두 달에 한 권은 사며, 업 그레
이드에 급급해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삶이 농경 시대를 살았던
조상들의 삶보다 낫다고 할 아무런 근거도 찾지 못한 나는, 정보화 시대
의 삶이 지금의 삶보다 나을 것이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아니,
삶의 질이 더 나빠지면 나빠지지, 좋아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 내 생
각이다(적어도 글쟁이들의 경우, 워드 프로세서로 만든다고 해서 더 좋은
글이 생산되는 것은,결코!, 아니다. 지금도 나는 때때로 공책을 이용하기
도 한다. 내가 우리나라에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게 하는 소설 <죽
음의 한 연구>를 쓰신 박상륭 선생은 캐나다에 살고 계신데, 그 분은 편
지까지도 원고지에다 쓰신다).
이 글은 결국 편집자의 요구와는 거리가 먼 것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
만 기왕 엉성한 소리들을 늘어놓은 김에 한마디 더 하자면, 아이들을 무
작정 정보의 쓰레기통 속에 처박기 전에, 지금의 우리 사회에 절실하고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도서관이라는 것이다. 마을 단위, 동 단위로 도서
관을 하나씩 짓고, 그곳을 지역 공동체의 중심이 될 수 있도록 한다면,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병폐들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전시회나 음악회, 연극이나 영화 상영, 세미나
등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도서관을 짓고나서, 그 도서관의 한 방에 컴퓨
터를 들여놓고 인터넷에 연결해 마을 주민들이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하
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2.컴퓨터 앞에 앉은 바보
내가 기계를 이용해서 글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88년 여름 무렵, 생
각지도 않았던 전동 타자기가 생기면서부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글을 만드는데 만년필 이상의 도구를 사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유성 볼
펜은, 경박함과 미끌거리는 느낌이 싫어서 거의 쓰지 않았다. 가끔씩, 종
잡을 수 없는 변덕으로 인해, 유성 볼펜으로 초고를 끄적거리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원고지에 정서는 언제나 만년필로 했다). 당시에는, 내
주위에 컴퓨터를 가지고 있는 친구들은 두어 명에 불과했고, 타자기나 워
드 프로세서 전용기를 사용하는 친구들은 몇 명이 있었는데, 그런 친구들
이 기계를 사용할 것을 권하기도 했었다. 긴 글을 만드는 것은 분명히 노
동이고, 그러므로 소설을 쓰려면 타자기 정도는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밤을 새워가며 글을 써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오랫동안
글을 쓰면 팔이, 팔과 손과 손가락이 얼마나 아픈지를. 그러나 나는 필기
구만을 사용했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필기구만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
던 데에는 가난도 한 몫을 했다. 한마디로, 타자기를 살 돈이 없었던 것
이다. 그렇지만, 돈이 있었더라도 타자기를 샀을까는 의문이다.
그러다가 선물로 받은 타자기를 만지게 되자 기계의 신기함에 끌려 들
어가, 원고를 만들기보다는, 기계를 가지고 놀며 종이를 없애는데 더 많
은 시간을 보냈다. 그 후 일 년쯤 지나서, 한 선배 작가의 거의 강압적인
권유에 따라 워드 프로세서 전용기를 구입 당하게 되었는데, 이 물건 또
한 가지고 놀다가 실수를 해서 병원에 두어 번쯤 다녀왔다.
컴퓨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삼 년쯤 전부터다. 컴퓨터를 잘 아는
후배가 두어 시간의 흥정 끝에 아주 싸게 살 수 있게 해 준 '어셈블드 인
용산' 제품으로, 486 DX2―50 칩에 램 4Mb, 하드 250Mb, 그리고 2400bps
짜리 모뎀과 8비트짜리 사운드 카드를 끼운 것이었다. 몇 차례의 업 그레
이드를 거쳐 펜티엄 75 칩에 램 16M, 하드 1.7G, 그리고 28.8k 팩스모뎀
에 4배속 CD―ROM 드라이브를 달아서 쓰고 있는 지금까지(처음 들여놨던
기계의 부품 가운데 지금까지 그대로 있는 것은 사운드 카드와 스피커밖
에 없다. 키보드와 모니터, 프린터도 바뀌었다) 컴퓨터 본체를 들고 낑낑
거리며 용산에 들락거린 것이 줄잡아도 스무 번은 넘는다. 후배가 기초적
인 몇 가지를 가르쳐 준 것 외에는 책이나 BBS의 게시판을 스승으로 삼아
혼자서 컴퓨터와 씨름을 한(물론 컴퓨터를 잘 다루는 몇몇 친구들을 괴롭
히기도 했지만),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컴퓨터는 나에게 정말 신기한 장난감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내가 이
십 년만 늦게 태어났더라면, 글을 만들어 팔아먹는 거지 같은 짓을 하느
니 아예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했을 것이며, 해커가 되어 모든 전산망을
파괴하려 했을 것이다(가령, 행정 전산망이나 금융 기관, 대기업 등에 침
투해 모든 자료를 지워버리거나 바꿔버린다고 생각해보라.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나마 좋지도 않던 감각과 해골이 낡을
대로 낡아서, 그저 게임이나 하고 인터넷이나 들락거리는 정도다.
컴퓨터로 인해 내 생활이 변하기는 했다. 컴퓨터가 내 책상에 놓이고
나서 한 일 년 동안 산 책들은 거의가 컴퓨터에 관련된 책들(문학 서적
따위를 도대체 왜 읽겠는가?)이었고, 게임을 하느라(요즈음에는 인터넷
서핑까지 하느라) 밤을 새우는 것이 흔한 일이 되었으며, 그러므로 당연
히 밖에 나가는 횟수가 줄어 들었다(처음 두어 달은 신문이나 TV를 볼 시
간도 낼 수 없었다). 글 장사를 시작한 죄로 요즈음도 가끔씩 이런저런
원고를 써야 할 때가 있는데, 그런 경우에도 모뎀을 이용해서 팩스로 보
내거나 화일을 전자 우편으로 보내면 된다.
그러나 컴퓨터로 인해 내 삶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나에게는 이
물건이 여전히 신기한 장난감일 뿐이니까. 이 끔찍한 장난감―돈 잡아 먹
는 기계고,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없으며, 발전(?)을 향해 맹목적인 제로
섬 게임을 하게 만드는, 뿐만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점점 더 기계 의존
적이 되게 하고, 그러므로 대형 사고의 가능성이 항존해 있는 이 해괴한
기계! 지극히 자본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이 기계는, 그러나 기계에 지
나지 않는 것이어서, 얼마든지 아니키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는 물건이다.
글을 만드는데 만년필보다 더 좋은 도구는 없다고 새삼스레 생각하는 나
는, 컴퓨터라는 물건을 아나키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더더욱 많아지기
를 바랄 뿐이다. 해커―특히 크래커들에게 힘과 용기를!
(박인홍,『섹스, 깨어진 영상 그리고 진정성』,1999,
문이당)
▼그러나 나는 결국 이렇게 터를 잡고 말았다. 이것은 또 무슨 미친 짓
일까?
2001년 1월 현재, 내가 쓰는 기계는 위의 것에서 또 업그레이드되었다.
그리고, 아마 거의 확실히, 앞으로 더 성능이 좋은 기계로 계속 바뀔 것
이다. 그런데, 왜 그래야 할까……?

처음 올린 날: 2001년 6월 19일(화)
박인홍(소설가) --------------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