귓속의 길


박금산




재의는 무릎걸음으로 기어가 정자세로 앉는다. 한 손으로 귀를 후비면서 다른 손으로 수화기를 든다. 귀를 후비던 손으로 116을 누른다. 수화기 스피커에서 자동응답 안내가 나온다. 국내 시각은 1번을, 세계 주요도시 시각은 2번을, 코드번호 및 이용방법 안내는 3번을 눌러주십시오. 안내를 끝까지 듣고 1번을 누른다. 최근에 세계 시각이 추가된 것처럼 급작스럽게 변화된 것은 없다. 띠, 띠, 다음, 시각은, 오전, 4시, 37분, 40초, 입니다. 기계는 시간을 오전과 오후, 두 가지로만 나눈다. 새벽이나 저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지금은 새벽 4시 37분. 그가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수화기를 다시 들고 이번엔 131을 누른다. 기상예보 기계음이 명랑하게 흘러나온다. 안녕하십니까, 7월 8일, ○○지방의 일기예보입니다. 대흑산도 홍도 1번……. 지역을 선택하라는 안내가 시작되자 7번을 누른다. 다시 기계음이 나온다. 동부 남해안 지방의 일기예보입니다. 그는 3번을 누른다. 예보가 흘러나온다. 기상특보 사항입니다. 예비 특보입니다. 내일 낮 전 해상에 파랑주의보가 발효될 예정입니다. 항해 및 조업하는 선박들은 기상 정보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116으로 시간을 조회한다. 7월 8일 오전 4시 44분 50초. 음력으로는 28일. 해 뜨는 시각은 5시 18분. 달뜨는 시각은 3시 2분. 해는 아직 뜨지 않았고 달이 뜬 지는 한 시간 반 가량 지났다. 그믐달은 아직 바다 위에 있을 것이고 해는 곧 동을 터 올릴 것이다. 그는 벽을 더듬어 옷을 찾는다. 어둠 속에서 흰색 반바지와 노란색 셔츠가 희미하게 움직인다. 옷을 다 입고 그는 무릎걸음으로 걸어가 문고리를 잡는다.
문지방을 넘으려는데 뭔가 발길에 차인다. 그는 쭈그려 앉아 손으로 바닥을 더듬는다. 손에 잡히는 것은 달옥이의 스프링 수첩이다. 이런. 입을 놓고 갔잖아. 아니지. 입을 놓고 갔을 리 없지. 집안 어디에 있는 거겠지. 달옥아, 달옥아, 이름을 불러본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벌써 가 버린 거야? 벌써? 흥. 차라리 잘됐다. 아침 첫인사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망설였는데, 저보다 먼저 깨면 어떻게 할까 망설였는데, 가고 없으니 차라리 잘됐다. 그는 무릎걸음으로 기어가 이부자리를 만지고 베개를 만져본다. 그러다가 수첩을 편다.
수첩 표지를 넘기고 수첩에 적힌 글자를 더듬는다. 다음 장. 다음 장. 더듬기만 하다가 수첩을 덮는다. 마냥 매끄럽기만 해서 무슨 글자가 적혀 있는지 그는 알 수가 없다. 수첩을 바지 주머니에 넣으면서 생각한다. 앞을 보지 못하는 내가 정말 듣지 못하는 벙어리하고 살 수 있을까? 실수였으니까 용서하라고, 마음이 시켜서 한 일이 아니라 몸이 그렇게 돼 버린 거니까 하룻밤 그렇게 보낸 걸로 치자고, 싹싹 빌까? 그렇다면 어젯밤 등판에다 미안하다 글씨를 새겨준 것은 참 잘한 일이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비비며 마른세수를 한다.

재의는 문 앞에 앉아 바람을 쏘이면서 밤의 일을 생각하다가, 앉은뱅이책상 앞으로 가 앉는다. 책상 오른쪽 바닥에 놓여 있는 컴퓨터 본체의 전원 버튼을 누른다. 마우스 위에 손을 올려놓고 부팅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곧 윈도우가 신호음을 내며 안정적으로 시작된다. 마우스를 움직이자 스피커에서 나오는 스크린 리더의 기계음이 빠르게 빠르게 뒤바뀐다. 그는 그 소리들로 윈도우를 읽는다. 아이콘이 없는 빈 바탕에서 마우스가 정지하면 바탕화면이라는 기계음이 반복된다. 마우스의 포인터가 거쳐가는 곳에서 기계음이 다음처럼 흘러나온다. 내 컴퓨터, 휴지통, 인터넷익스플로러……. 인터넷익스플로러 아이콘에 마우스 포인터를 맞추자 인터넷익스플로러임을 알리는 소리가 반복해서 들려온다. 그는 인터넷익스플로러에서 더블클릭을 한다. 인터넷에 연결되자 즐겨찾기에서 메일함을 클릭한다. 로그인을 한다. 새 편지를 확인한다. 읽지 않은 편지 0. 인터넷을 닫고, 종료 아이콘을 찾아 클릭한다.
문을 열고 나간다. 지팡이를 앞세우고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문턱을 넘는다. 대문은 열려 있다. 지팡이를 토닥거려 길을 읽는다. 경사로를 내려간다.
그의 집은 완벽하게 단독이다. 불이 나도 옮겨 붙을 집이 없고, 지붕이 날아가도 슬레이트 조각 맞을 이웃이 없다. 집에서 산 쪽으로 백여 걸음 떨어진 곳에 시커먼 깡통 건물 두 채가 붙어 있다. 서정암 매표소와 그의 도장방이다. 경사로를 따라 아래로 줄곧 내려가면 주차장이고, 주차장에서 왼쪽으로 꺾어 내려가면 마을이다. 그는 주차장 쪽으로 내려간다. 그믐 무렵의 새벽이다. 손톱달은 바다 위에 있다.
주차장에 서서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는 다시 걷는다. 마을로 이어진 길을 걷다가 갑자기 멈춰선다. 으야앙 몸을 사렸다가 스사삭 사라지는 고양이 소리. 카악 가래를 뱉는다. 콰아아 파도소리가 아래쪽에서 아득하게 들려온다. 고양이 소리가 사라진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밭두렁 사이로 좁은 길이 나 있다. 그는 그 길로 들어간다. 오른쪽 밭에서는 늦보리 흔들리는 소리가, 왼쪽 밭에서는 고구마 순 엉키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턱을 추켜세우고 눈을 껌벅거리거나, 고개를 돌려 귀를 정방향으로 세우고, 지팡이로 간혹 길섶의 웃자란 잡초들을 치며 걷는다.
밭길이 끝나고 풀길이 이어진다.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길 잃을 염려는 없다. 잘 자란 명아주풀 강아지풀 들깨 개망초가 다리에 찬이슬을 뿌리면서 길을 안내할 것이다. 걸음을 주춤거리게 했던 수풀길이 이제는 말끔한 흙길로 바뀐다. 흙길은 동백나무 숲 속에 있다. 길은 잘 다져져 있다. 그는 첫 번째 동백나무 앞에 선다. 동백나무 밑은 흙마당처럼 정결하다. 동백나무에 기대어 운동화를 벗고 돌을 털어낸다. 손을 짚은 곳에는 오래된 옹이가 그의 손때와 함께 박혀 있다.
매미가 운다. 밭두렁 사잇길을 걸을 때부터 들려왔던 소리다. 더러 매미가 해보다 먼저 깨기도 한다. 그는 숲으로 들어간다. 2월 말에서 4월까지. 꽃이 피는 계절에는 소리가 드물다. 그 계절 동안 그에게 길을 가르쳐주는 것은 향기다. 하나씩 떨어지던 꽃들이 무더기로 지는 4월 말에 길 읽기가 가장 쉽다. 떨어지면서 진액을 뿜는 동백꽃 진한 향기가 땅으로 가라앉을 무렵 개구리가 울고 이어 모내기철이 된다. 그때는 개구리 소리가 그의 지도다. 여름날 폭포수 떨어지는 골에서 더욱 기승을 부리는 매미들처럼 바다에서 파도가 높은 날 개구리들은 지치지 않고 사력을 다해 울어댄다. 가만히 귀 기울이지 않아도 그 소리가 파도 이는 해안으로 향해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몸을 조심하라는 신호다. 소리 없이 비가 잠깐 내렸거나 이슬이 많은 날이니까. 어느 바위에서 미끄러질지 모르는 일이다. 폭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는 곳에서 매미 소리가 높아진다. 폭포 소리가 커지자 매미 소리는 튀김 솥에서 기름이 끓듯 맹렬해진다. 그는 큼큼 헛기침을 한다.
폭포를 지나 바윗길로 접어든다. 새벽 출어에 나선 배들의 엔진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온다. 이 골짜기에는 저녁에 불러놓은 자기 이름이 아침에 메아리로 울려나와 잠을 깨어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어제 저녁에 불러놓은 자기 이름을 찾으러 가듯 숲으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가녀린 소리가 점점 깊어진다. 동굴 속 석간수가 떨어지는 소리. 고요한 암자의 목탁소리 같다. 동굴 속은 그믐밤의 숲 속보다 어두워 독, 독, 독, 물 떨어지는 소리의 울림이 깊다. 이제 그는 동굴 속 석간수 앞으로 다가간다. 물통을 놓고 석간수가 차오르길 기다리기 시작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소리의 울림이 깊어진다. 울림 깊은 물소리 사이로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동굴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그가 갑자기 뒤로 돌아 동굴 입구를 바라보며 말한다. 꽥 소리를 지른다.
“누구요!”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대답 없는, 플래시를 든 달옥이가 나타난다. 달옥이는 플래시로 재의를 비춘다. 빛의 소리는 참으로 고요하다. 향기도 없고 손에 만져지지도 않으니 재의가 그 빛을 알아볼 리 없다. 재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돌아선다. 물통에는 석간수가 반쯤 차 있다.
재의는 물통의 뚜껑을 잠근다. 그가 물통을 챙기고 돌아서자 달옥이는 입구에서 어깨를 움츠린다. 재의가 동굴 입구를 나서서 돌계단을 내려가는 걸 지켜보며 달옥이는 절 마당의 석등처럼 고적하게 서 있다.
재의가 길을 걷기 시작한다. 지팡이를 든 그의 손놀림이 바쁘다. 길과 나무들을 번갈아 치며 물통을 들고 내려간다. 달옥이는 뒤를 밟으며 플래시로 그의 발밑을 비춘다. 마우스의 움직임에 따라 소리를 바꾸는 스크린 리더처럼, 스크린 리더의 기계음에 따라 재의가 마우스를 움직는 것처럼 달옥이가 플래시 불빛으로 재의의 걸음을 비춘다. 재의가 냇가 모퉁이를 돌아가자 달옥이는 플래시를 거두고 동굴 속으로 뛰어 돌아간다.
으. 어. 으. 어.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아와 어, 혹은 아와 으 사이의 중간 음이다. 그녀의 불명확한 발음은 동굴 속에서 메아리를 만들지 못하고 으어 으어 신음처럼 떠다닌다. 똑. 똑. 석간수 떨어지는 소리가 선명하다. 그녀는 두 손으로 목을 움켜쥔 채 아도 아니고 어도 아닌 꺼 꺼 하는 소리를 만들고 있다. 으어으어. 그녀가 연습하는 말은 한결같이 네 음이다. 그녀는 이마에 땀이 맺힐 때까지 계속해서 네 음절을 연습한다.

연습을 끝내고, 그녀가 손목 시계를 본다. 5시 30분. 동굴 바깥은 희부윰하게 밝아 있다. 그녀는 석간수 떨어지는 곳으로 다가간다. 오른손을 내밀어 몇 방울 물을 받는다. 손에 받은 물을 얼굴로 가져간다. 그리고 얼굴의 땀을 닦는다. 눈알에 물을 집어넣듯 아주 천천히. 그녀는 같은 동작을 서너 차례 되풀이하여 아침 세수를 말끔하게 끝낸다. 흐르륵 흐르르르륵 새소리가 들어온다. 소리와 인연이 없는 그녀의 귓바퀴는 잇몸 드러내고 웃는 입술처럼 시원스럽게 까져 있다. 그녀는 바닥에 놓았던 플래시를 챙겨들고 동굴을 나선다.
그녀는 재의가 내려간 길을 따라 걷다가 폭포 즈음에서 오른쪽으로 꺾는다. 바삐 걷는 걸음이 수다스럽다. 5분 정도 뛸 듯이 걸었다. 재의의 노란색 셔츠가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그의 걸음은 아주 더디다. 그녀는 숨을 돌리고 속도를 늦춘다.
계단이 나타난다. 재의가 발로 계단을 더듬으며 올라간다. 그녀는 재의의 발을 보다가 종루로 눈길을 돌린다. 종루의 처마를 따라 시선을 옮기면 푸른 바다가 나타난다.
달옥이는 종루로 올라가 종을 친다. 서정암의 아침이 시작된다. 종소리는 더어엉 더어엉 그렇게 규칙적이지가 않다. 덩 덩 더어엉 댕, 바람 많은 날의 풍경처럼 정처 없이 흔들린다. 종채를 미는 그녀의 표정은 한결같이 고요하다. 처진 눈꼬리가 숙인 고개처럼 다소곳하고, 두툼한 콧방울은 각 없는 턱선처럼 조용하다. 귀밑에 꽂은 머리핀에서 큐빅이 소란스럽게 빛난다. 그녀는 종을 치면서 줄곧 재의를 바라본다.
재의는 선방 앞 쪽마루에 앉아 있다. 물병에 달라붙어 있던 이슬이 주루룩 흐른다. 종 터지겠네, 재의가 나직하게 말한다. 예전에 아버지가 그랬다. 쇠를 깨뜨리는 건 우람한 근육의 힘이 아니라 결을 거스르는 소리라고. 휘감아 친 소리가 울림통을 채 돌아 나가기 전에 징을 되감아 치면 쇠붙이는 소리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제 몸을 찢어버린다고. 그러니 징잽이는 소리의 결을 먼저 배워야 한다고 했다. 선창에서 진수식을 할 때 징채를 쥐어주며 아버지가 그랬다. 재의는 가슴을 쓸어내린 후 종루로 간다.
재의가 종루 앞에 서자 달옥이가 종채를 놓는다. 재의가 손을 들어올리자 달옥이가 지팡이를 받아들고, 그의 손에 종채 줄을 쥐어준다. 재의가 멈칫하더니 호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내민다. 달옥이가 쑥스럽게 받아든다. 재의가 종을 치기 시작한다. 더어어엉…… 더어어엉…… 불당의 들뜬 지붕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재의의 귀는 여운이 길게 거슬러올라가는 산 쪽을 향해 있다. 달옥이는 종루에서 내려온다.

“야야, 종 그만 쳐라. 아침공양 하자.”
선방 안에서 쉰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재의는 못 들은 척 종을 친다. 종소리의 여운이 사그라진다. 다시 몸을 실어 종채를 밀려 할 때, 선방의 목소리가 그의 리듬을 끊는다.
“아침공양 안 하냐?”
“보살님이 아직 소제 중이네요.”
불당을 바라보며 대답한다. 달옥이는 걸레를 들고 불당으로 들어서고 있다. 재의가 종을 몇 번 더 친다. 달옥이는 엉덩이를 추켜들고 걸레질을 시작한다. 쉭 쉭 걸레질 소리가 들려온다. 재의는 귀를 세워 걸레질 소리를 듣는다. 이불 홑청을 터는 소리 같기도 하고 절을 마치고 쉬는 한숨소리 같기도 하다. 재의가 다시 종채를 민다. 산으로 올라간 종소리가 돌아올 때쯤 마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만 둬라. 부처님 배고프시단다.”
“밥을 왜 나한테 달래요?”
재의가 신경질을 부린다. 선방 문이 열린다. 노승이 문턱을 힘겹게 넘는다. 흰 런닝셔츠 차림이다. 노승은 문 앞에 놓인 물통을 두 손으로 집어들고 벌컥벌컥 물을 마신다. 입으로 들어간 물은 속 목을 적시고 입가로 흐른 물은 겉 목을 적신다. 물은 마른 몸 쇄골을 적시고 가슴팍으로도 흐른다. 노승은 물통을 놓는다. 물통을 힘겹게 놓는 바람에 통 튀긴 물통에서 물이 쏟아진다. 노승은 손으로 입가를 훔치다가 아예 그 물로 세수를 해 버린다. 허옇게 돋은 머리카락. 흰 물통. 목 늘어진 런닝셔츠. 노승 곁에는 온통 흰색 천지다. 불당 기둥에 붙어 있는 주련의 흰 페인트 글자처럼 손톱으로 긁으면 스르르 벗겨질 것 같다. 손과 발도 창백하다. 더어어엉…… 종이 울린다.
“이놈아 밥 안 먹어?”
“정말 이상하시네. 왜 밥을 나한테 달라고 자꾸 그려셔? 보살한테 손말을 보내지?”
“이놈아, 너만 바라보고 있는데, 저 녀석이 날 봐야 뭐라고 손짓을 할 거 아니냐.”
재의의 얼굴이 붉어진다. 노승은 붉어지는 재의의 얼굴을 본 다음 불당을 바라본다. 달옥이는 바닥을 닦느라 여념이 없다. 재의는 고개를 돌리고 종채를 민다. 더어어엉…….
“벌써 배가 고파요? 해가 이제 방금 떴어요. 적적하시면 예불을 올리세요.”
재의의 말을 듣고, 노승은 쪽마루에 걸터앉아 몸을 쭉 빼서 선방 안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무언가를 꺼낸다. 노승은 희끄름한 막대기를 입으로 가져간다.
“담배나 한 대 태시든가.”
재의가 말했을 때는 이미 노승이 첫 모금을 빨고 난 다음이다. 담배 연기가 재의 쪽으로 흐른다. 재의는 종채를 놓고 노승 앞으로 다가간다. 자기도 담배에 불을 붙인다.
“스님. 안개 냄새가 진한데, 해가 나왔대요?”
노승은 곁에 없다는 듯 침묵한다.
“아침 공양은 거를까요? 오늘은 안개가 짙으니까. 관음보살님 입술에 색이 돌려면 해가 중천에나 떠야 될 거잖아요.”
“맘대로 해라. 밥을 주든 호박을 주든. 공에 들어 죽기 전에 굶어서 죽을란다.”
말하는 노승의 콧구멍에서 담배 연기가 두 줄로 팽하니 나온다. 불당에서는 향냄새가 난다. 향냄새를 따라 재의가 불당으로 고개를 돌린다. 턱을 들고 눈을 가늘게 뜬다. 보이지 않는 눈은 언제나 전방 삼십도 각도의 하늘을 향해 있다. 마른 걸레질 소리가 들려온다.
“칠월 백중 되려면 이제 한달 하고 보름 남았는데, 스님, 참말로 그럴 거래요?”
“그랴. 깔끔하지. 너도 갈래?”
“글쎄요. 생각해 볼게요.”
재의가 웃는다. 한참 말이 없다가 노승이 말한다.
“주련은 어쩌?”
“일 없어요.”
노승은 물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피식 웃는다.
“상좌는 언제 와요?”
“글쎄다. 그 놈이 오긴 올 것 같니?”

달옥이는 관음보살 상을 향해 절을 올리고 있다. 햇살이 세살문 열린 틈으로 들어가 석상의 얼굴과 가슴께를 비추고 있다. 재의는 생각한다. 해가 더 오르면 아랫배 위에 다소곳이 올리고 있는 관음보살의 두 손이 희끄름하게 환해질 것이다. 관광객이 많아지는 11시 무렵이 되면 어둠의 옷을 완전히 벗을 것이다. 연잎처럼 푸른 한기를 말끔하게 벗고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올려 엄지발가락을 살며시 드러낼 것이다. 햇살을 받고 단풍 들었던 입술은 해거름 무렵부터 천천히 붉은 기운을 잃어갈 것이다. 재의는 눈을 비빈다. 아직도 관음보살 입술이 햇살을 받으면 처녀 입술처럼 붉어질까? 고장난 텔레비전 브라운관처럼 희부옇기만 할까? 불당 마루의 네모난 구멍 속에서 파도는 여전히 무서운 흰색 빨판을 내밀고 있을까? 관광객이 줄지 않는 걸 보면 관음보살은 여전히 입술을 곱게 빛내고 있는 모양이다. 세월이 쌓였으니 관음보살은 해가 져도 붉은 입술을 내밀고 있을지도 모를 일. 도둑들이 호시탐탐 관음보살 상을 들어내려고 한다는 얘기를 그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불당에서 두둑 두둑 소리가 들려온다. 절하는 사람의 무릎 관절에서 나는 소리다. 달옥이의 우람한 몸에서는 절을 할 때마다 뼈마디 어긋나는 소리가 들려온다. 재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마루에서 일어난다. 바지 입고 절하는 색시들의 엉덩이는 참 섹시했는데. 팬티 자국. 엉덩이 살. 엉덩일 구경하기에는 치마보다 바지가 좋았지. 치마는 다리 사이의 옅은 구멍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바지는 색이 밝을수록 좋았고. 눈으로 더듬다 보면 손으로 더듬고 싶어져서 침이 바짝바짝 말랐는데. 히히. 달옥이처럼 펑펑한 절옷을 입고 있으면 팬티자국이고 다리 사이의 구멍이고 하나도 안 보이지. 달옥이의 까실까실하던 아랫도리에 또 손을 넣어보고 싶다. 그녀가 펑퍼짐한 절옷을 입고 있다는 건 어젯밤 처음 안 사실이었다.
재의는 불당으로 간다. 손을 내밀고 바람을 잡으며 주춤주춤 걷는다. 불당 앞 계단에서 신발을 벗고 불당으로 올라선다. 콰릉. 콰릉. 파도 소리가 들린다. 불당 바닥의 중앙에 있는 네모난 구멍에서 올라오는 소리다. 바위 틈 위에 지어진 이 불당에서 파도 소리가 멈추는 날은 없다. 재의는 마룻바닥에 발을 붙이고 더듬더듬 걷는다. 바닥이 눅눅하다. 네모난 구멍 테두리가 발에 밟힌다. 재의는 앉아서 구멍 테두리를 더듬는다. 달옥이는 걸레를 들고 불당에서 나간다. 재의는 구멍을 덮고 있는 문을 열고 허리를 숙여 고개를 넣는다. 바람이 솟으면서 재의의 머리카락을 들어올린다. 퐈르릉. 퐈르릉. 바다의 잔기침 소리가 들려온다. 천길 낭떠러지 속에 들어 있는 공적의 세계. 그 세계로 통하는 길에 문이 생긴 건 상좌가 사라진 다음이다.
구멍에서 고개를 빼고 뚜껑을 닫은 다음 몸을 일으켜 불상 앞으로 간다. 관음보살 석상은 늘 있던 그 자리에서 손에 잡힌다. 돌부처를 불당 안에 모시는 건 복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그래서 언젠가는 불상이 저절로 지붕 없는 산 속으로 갈 것이라고들 한다 했다. 부처가 바다 속에서 불쑥 솟았다는 말이나, 부처가 솟아난 구멍이 지금의 불당 구멍이라는 말처럼 부질없는 소문일 수도 있다. 하여간, 어찌됐든, 누군가 불상을 훔쳐 가려면 이 구멍까지 훔쳐가야 한다고 스님은 말했다.

눈을 잃고,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고, 냄새도 맡아지지 않는 것 같아서, 손에 잡히는 게 무엇인지 도대체 알 도리가 없어졌을 때 재의는 죽음을 잠깐 만났다. 그 구멍으로 몸을 날려버렸던 것이다. 죽음은 간단했다. 퉁, 퉁, 멎은 의식 사이로 몸이 날았다. 아, 바위에 부딪쳐 터져 죽거나, 가까스로 바닷물을 만나 배가 찢어져 죽을 줄로만 알았는데, 그 고통을 어떻게 견디나 했는데, 뛰어내릴 때의 현기증만 참으면 끝나는 거구나. 중력이 휘발되면서 입술이 벌벌 떨리는 느낌. 죽음을 만나기까지의 순간이 그토록 짧았기에 재의는 도중에 자기가 심장마비로 먼저 숨이 끊어지고 믿기 싫었던 영혼만이 하락하다 둥둥 다시 퉁겨져 올라오는 걸로 알았다. 죽음이 이런 거라면 다시 죽어도 좋아. 그는 참으로 죽음 앞에서 의연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놈아, 죽을래? 정말 죽을래?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묻는 순간 몸이 들려 올라갔다. 손을 뻗어보니 몸을 싸고 있는 것은 꼴 망태 같은 그물이었다. 피식. 피식. 스님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상좌가 구멍으로 몸을 던져 죽으려 했다면 저 영감탱이가 가만있지는 않았을 테지. 재의는 불상을 향해 절을 올린다. 그의 무릎관절에서도 둑 둑 소리가 난다. 도독, 도독, 해삼을 씹는 소리 같다. 절을 멈춘다. 아버지가 새벽 어장에서 봐 왔던 해삼을 초고추장에 찍어 씹었을 때 잇사이를 파고들던 그 미끌거림이 다시 느껴지는 것 같았던 것이다. 상좌가 공적의 세계로 들어갔다면, 바다 밑으로 몸을 던졌다면, 해삼이 그의 눈구멍으로 들락날락하고 있을 것이다.
재의가 본 세상의 마지막 풍경은 이런 것이었다. 온 산 가득한 아카시아 꽃이 한나절만에 전부 져 버릴 정도로 바람이 심한 날이었다. 파도가 선창 안의 배들을 종이조각처럼 구겨놓더니 사람 하나를 게워 놓았는데 그게 아버지의 뜯겨진 시체였다. 송장 살을 좋아한다는 갈치들이 뼈마디까지 파먹진 않았지만 그 몰골은 너무나 흉칙했다. 시체에 너덜너덜 걸려 있는 옷이 아니었더라면 재의는 끝내 그 사람을 아버지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파도가 던져 놓은 해변에서 해삼들은 골 속 빈자리를 찾으려고 몸을 비틀고 있었다. 골 파먹기를 좋아한다는 그것들은 아버지의 눈구멍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골속에 자릴 잡지 못한 것들은 구멍 밖으로 밀려나고 있었고 일부는 바닥으로 나와 몸을 통통하게 불리고 있었다. 아버지 옷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도 해삼의 몸짓인 것 같아 눈이 저절로 감겼다. 화병으로 귀가 먹는다거나, 답답증이 벙어리를 만든다는 말을, 마음이 막히면 몸이 터진다는 말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공양간에서 틱 틱 접시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 플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두부 부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재의는 불당 마루에 앉아 손을 뻗고 구멍에서 올라오는 바람을 쏘인다.
“재의야, 공양 준비 됐단다.”
노승이 말한다. 재의가 마당으로 내려서자 노승이 다시 말한다.
“달옥이 얼굴에 웬 수줍음이 저리도 많노. 참 예쁘네.”
텅. 짜각. 상을 놓는 소리가 거칠다. 재의가 상 앞에 앉는다. 달옥이가 재의의 손을 잡고 수저 놓인 자리로 끈다. 재의가 수저를 들자 노승이 묻는다.
“몇 글자나 남았냐?”
“안 새긴다니까요.”
“이놈아. 주련은 갈아 놓고 가얄 것 아니냐.”
“가든지 말든지 뭔 상관이래요. 스님 가고 나면 그때나 새기지 뭐.”
재의는 젓가락으로 두부를 집는다.
“상좌는 언제 와요?”
“이메일인가 뭔가로 물어 봤다면서. 컴퓨터가 말 안 해주니?”
노승이 살짝 비꼰다. 재의는 수저를 국그릇에 넣어놓고 눈쌀을 찌푸린다. 달옥이는 밥알을 씹으면서 재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리고 노승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독순술을 하듯, 달옥이는 두 사람의 입술 움직이는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상좌가 죽었단 말 진짜래요?”
“또 그 소리냐. 주련 새겨 오면 알려줄게.”
노승은 상에서 물러난다. 담배를 물고 마당으로 내려선다.
마당 끝은 바다다. 깎아지르는 절벽 앞에 바다가 펼쳐져 있다. 날이 좋으면 제주도가 보인다는 곳. 노승은 바다를 바라보고, 불당은 노승 등을 바라보고 있다. 불당 기둥에는 효봉의 오도송이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적혀 있다. 海底燕巢鹿抱卵 火中蛛室魚煎茶 此家消息誰能識 白雲西飛月東走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 속 거미집에 물고기가 차를 다리네, 이 집안 소식을 누가 알까, 흰 구름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재의가 밥을 다 먹고 수저를 놓는다. 달옥이는 재의가 새벽에 길어온 물을 찻주전자에 붓는다. 재의는 바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내민다. 노승이 어느새 몸을 돌려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달옥이와 재의가 절에서 내려간다. 재의가 앞서고 달옥이가 뒤따른다. 뒤에서, 달옥이는 재의의 걸음걸이를 지켜보며 섰다 걸었다 반복한다. 그들이 절 마당에서 바다 쪽 계단으로 내려설 때 개경게가 시작되더니 시멘트 길로 들어서자 금강반야바라밀경여시아문일시불재사위구욱 기수급고독원여대비구중천이백액오십인구이시세존식시저의지발입사어대성걸식…… 독경소리가 자리를 잡는다. 영감탱이. 경도 안 읽고. 재의는 벗나무에 걸려 있는 스피커를 향해 귀를 돌린다. 스으. 스으. 테이프 돌아가는 소리가 섞여 들린다.
재의는 발음 분명하고 숨소리 고른 테이프 속의 독경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한다. 저 영감탱이가 정말 백중이 되면 구멍 문을 열고 몸을 던져버리려나? 담배를 입에 대더니 독경은커녕 목탁도 두드리지 않고, 염주를 굴리지도 않고……. 재의는 독경 소리를 따라 경을 왼다. 하이고사보리일체제불급제불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개차경출수보리소위불법자즉비불법, 테이프 속의 낭랑한 독경을 따라가려니 숨이 막힌다.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른다.
한때는 숨이 길어 270자 반야심경을 서너 번만에 주루륵 왰던 적이 있었다. 금강경 첫구절 여시아문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32개 품을 쿡 찌르면 툭 튀어나오게 외웠다. 지금은 불당 기둥의 주련처럼 낡고 바래어 안개가 진하면 둥둥 떠내려갈 것처럼 가볍지만 15년 전의 스님은 경 읽는 소리가 단아했고, 그 긴 금강경을 하루 반나절만에 파라핀 판에다 옮겨 적을 정도로 어깨 힘이 좋았다. 파라핀 판에 스님이 철필로 새겨준 경을 받아들고 재의는 손끝으로 글자 읽는 연습에서부터 글자를 거꾸로 파 옳게 찍히도록 양각하는 것까지를 모두 스님한테서 배웠다. 배우고 싶어 배운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한숨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했던 일이었다. 손으로 실체를 만져야 느낄 수 있는 감각의 아름다움을 물론 그때는 원치 않았다. 다시 불당의 구멍으로 몸을 날려버리고만 싶은 날들이었다.
그런데 스님 말대로, 금강경 반야심경을 새기고 나자 잃어버린 눈이 손끝에서 생겨났다. 손끝의 눈이 열리자 귓속에서도 길이 열렸다. 퐈르릉. 퐈르릉. 불당의 파도 소리가 꼭 뭘 파라는 말처럼 들렸다.

길은 언제나 사이에 있었다. 나무와 나무, 섬과 섬, 소리와 소리, 오늘과 내일. 길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고요와 고요 사이에도 길은 있었다. 길은 지문에 난 얕은 골을 따라 흐르는 운명처럼, 그러나 고요하게, 무엇과 무엇 사이에 단지 놓여만 있을 뿐이었다. 그 길에 발을 내 딛을 때마다 매번 불당의 구멍에 몸을 던졌을 때 느껴지던 현기증이 되풀이되었다. 눈이 멀었다는 절망을 자기에겐 어둠만 볼 수 있는 특별한 눈이 생긴 거라는 위로로 돌려 생각하기까지는 참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발끝에 길이 차이지 않는 내리막은 언제나 허방이었다. 오르막에선 길이 발을 마중했지만, 내리막에선 발이 길을 찾아 헤맸다. 걸을 때마다 길은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았다. 주저앉아 손으로 길바닥을 더듬으며 기어간 길도 참으로 길었다.
어머니는 공양간에서 밥을 짓고, 재의가 파서 새긴 금강경 반야심경 목판에 잉크를 발라 글자를 찍어냈다. 불자들이 시주를 하고 들고 가는 것은 금강경 반야심경의 글자가 아니라 눈을 감고도 길을 읽게 해준 부처님의 영험, 재의의 내력이었다. 재의는 지금도 가끔씩 생각한다. 그때 목판을 들고 그럴 것이 아니라 목사가 주고 간 점자 교본으로 점자를 배웠더라면 어땠을까. 맹학교 중등부에 입학을 했으면 어땠을까.
스피커에서 나오는 독경 소리는 여전히 낭랑하다. 영감탱이가 숨이 짧아져서 경을 안 읽나? 재의는 숨을 길게 내쉰다. 소리들 사이로 걸으면서 소문에 의지해서 더듬어 온 세월이 15년이었다.
여시아문(如是我聞). 금강경 첫구절. 나는 이렇게 들었다. 무엇을 그렇게 들었단 말인가. 상좌 자식은 정말로 번뇌를 잊으려고 그 공적의 세계로 들어갔을까. 누구는 상좌가 절간을 버리고 서울로 갔다고 한다. 누구는 계를 받으러 본찰로 돌아갔다고 한다. 스님은 휴가를 보냈다고 했다가 말을 바꿔 자살을 했다고 했다. 칠월 백중이 되면 불당의 구멍으로 들어가겠다고 하는 스님의 말은 어찌 들으면 상좌를 따라가겠다는 말로도 들린다. 들리는 것이라곤 오로지 파도 소리와 방금 전의 파도 소리를 덮는 또 다른 파도 소리 같은 소문뿐이다.
이런 얘기도 들려온다. 상좌에게 손님이 찾아온 다음 날이었을 것이다. 달옥이가 아침 청소를 하려고 보니 스님 방석이 없더라는 것이다. 불당 바닥의 구멍을 살짝 막아놓은 방석이 없어졌더라는 것이다. 그 방석을 누가 밟았겠는가. 방석과 함께 바다 속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이 누구겠는가. 상좌는 사라지고 관음보살 상은 그대로 남아 있다. 소문처럼 상좌를 부추겼다는 도둑이 그 방석 위에 올랐을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들어냅시다, 상좌가 그렇게 방석 앞으로 도둑을 보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상좌가 관음보살 상을 팔아먹기 바로 전에, 자기 안의 부처를 깨닫고 그 방석에 발을 올렸을 수도 있다. 겁을 먹은 도둑은 관음보살상을 놓아두고 줄행랑을 놓았을 것이다. 아버지의 시신을 그렇게 했듯이, 파도가 무엇을 게워내 해변으로 던져주기 전까지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진실은 가슴으로 흐르고, 거짓은 콧구멍으로 흥 새어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거짓이든 진실이든 그 모든 말들이 일단 귓속으로 들어와 버리면 재의는 그 많은 말들을 가슴으로 안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곰곰 생각해 보니 상좌가 도장을 새겨 달라고 한 때가 그 무렵이다. 도장을 뭐에다 쓰게? 속세 이름이 뭔데? 그렇게 따지고 묻자 도장은 다음에 새기자고 하더니 떠나 버렸던 것이다. 또 이런 생각도 들었다. 달옥이가 문을 닫고 세수하는 소리를 바지 벗고 뒷물하는 소리로 들었는지도 몰라. 그래서 달옥이를 떠난 것인지도 몰라. 그렇지 않았으면 왜 달옥이가 상좌의 방에서 울고 있었겠어.
상좌가 떠나고, 달옥이가 많이 울었다. 공양간 옆에서 들리는 울음소리를 듣고 재의는 달옥이에게로 갔다. 울음소리가 너무 애처로워 다가가 등을 토닥여줄 셈으로 손을 뻗었는데 손이 닿은 곳은 가슴께였다. 재의는 너무나 황망하고 미안해서 손을 잽싸게 거뒀다. 그런데 달옥이가 손을 잡아주더니, 손바닥에, 괜찮아요, 라고 손가락으로 적었다. 몸에 전기가 왔다.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는 거구나. 귀머거리 벙어리랑…….
잠깐 멈춰서서 생각을 오래 하고 있던 재의가 다시 걷기 시작하자 달옥이가 웅웅 짝짝 입으로 손바닥으로 소리를 만들더니 뛰어내려가기 시작한다. 산 밑에서 손님들이 올라오고 있나 보다. 재의는 달옥이의 발자국 소리 속도로 손님들이 어디까지 왔는지 가늠해 본다. 천천히 지팡이로 길을 읽으며 내려간다.
달옥이가 문을 연다. 매표소 문의 자물쇠를 풀고 들어가 집표통을 꺼내 나온다. 표내는 곳이라고 씌어진 흰색 나무통을 길 가운데 앉히는 소리가 요란하다. 상위에 수저와 그릇을 놓을 때처럼, 설거지통에서 수저와 그릇을 찾을 때처럼, 재의가 길을 걸을 때 딱 딱 딱 딱 지팡이로 소리를 만드는 것처럼, 달옥이는 어디에서든 소리를 짓는다. 그 소리가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지를 듣지 못하니 방귀도 잘 뀌고 트림도 잘 올린다.
아버지와 아들로 보이는 두 사람이 매표소 앞으로 온다. 달옥이는 표 두 장을 끊어서 두 사람에게 건네고 돈을 받는다. 표를 집표통에 넣고 방금 바삐 내려온 길을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재의가 천천히 내려오고 있다.
재의는 매표소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깡통 건물인 도장방 문을 열고 들어간다. 창문을 연 다음 책상 앞에 앉았다가 몸을 등받이에 젖히면서 부채를 편다. 상좌의 도장을 파려고 하니 속세의 이름을 모르겠고, 달옥이의 도장을 파려고 하니 성을 모르겠다. 도장을 하나 만들어주고 싶은데.

10시 무렵 여남은 명이 왁자하게 떠들며 올라간 뒤로는 손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매표소에서도 별다른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담밸 피울까. 라디오에서는 쉭쉭 잡음만 거세게 나온다. 스피커가 찢어진 것인지, 어느 접점이 떨어졌는지, 알 도리가 없다. 아예 먹통이면 냅다 던져버릴 것인데 말 못하는 벙어리 마냥 쉭쉭거리거나 웅웅거리니 무슨 소리가 잡힐 것도 같아서 처분을 못하고 있는 중이다. 상좌가 메일을 받았으면 라디오를 사올 것이다. 라디오를 켰다 껐다 하고 있을 때 똑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린다. 달옥이가 듣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어젯밤에 여러 번 불렀던 것처럼, 달옥이야? 무슨 일이야? 말을 하려는데 어린 아이 목소리가 들린다.
“아빠, 정말이야? 장님인데 도장을 새겨?”
열흘만에 든 손님이다. 재의는 부채를 접고 큼큼 헛기침을 한다. 속으로 갑자을축을 짚으며 의자를 내놓는다.
“도장 새기시려고요? 앉으세요. 좁지만.“
재의가 의자를 가리키면서 말한다. 그리고 선풍기를 틀어 손님들에게 바람을 보낸다.
“그래, 도장은 뭐에 쓰시려고요?“
“그냥요. 기념으로.“
“어디 쓰실 건 아니고요? 장님이 도장 판다니까 신기해서요? 하긴 요즘은 도장 쓸 일이 드물다죠. 도장은 손도장이 확실해요. 한 이틀 전엔가는 인감도장 잘못 써서 사기 당했다는 사람이 상아로 새겨갔어요. 중국에 놀러갔다가 도장을 파왔는데, 그게 글쎄 컴퓨터로 판 도장이었다지 뭐예요. 컴퓨터로 파니까 푼수하고 글자체만 알아두면 어디서든 똑 같은 도장을 팔 수 있는 거거든요.“
재의는 전각대를 휘리릭 돌리며 휘파람을 분다. 휘리릭 돌던 전각대가 멈춰 선다. 재의는 육면체 전각대를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으로는 책상 바닥을 톡톡 친다. 컴퓨터로 도장 새겼다가 패가했다는 소문은 아직 듣지 못했다. 이렇게라도 폼을 잡지 않으면 손님들이 딴전을 피우니까 그냥 하는 말이다. 세상이 어디 사람을 그렇게 허투루 대하던가.
아이가 말한다.
“아저씨. 컴퓨터라고 다 똑같은 건 아니에요. 글자체는 폰트만 개발하면 얼마든지 독특한 거 넣을 수 있어요. 아빠. 뭐 해. 도장 빨리 파보라고 하지.“
재의가 점잖게 말한다.
“이름이?“
“김하미요.“
“그러니? 여기다 한자로 써 봐. 쓸 수 있니?“
재의는 철필이 달린 파라핀판을 내민다. 아이가 말한다.
“한글로 해 줘요. 김하미요.“
재의는 파라핀 판을 거둔다.
“아드님이 참 딱부러지네요.“
부글거리는 속을 달래며 인재함을 연다. 이름자를 해석하면서 지그시 그들의 운명 길을 짚어보는 아슬아슬함을 느껴본 게 언제 일인가. 고집이 참 세시네요. 이름에 고집이 들어 있어요. 고요한 서정을 사랑하는 성격이네. 그렇죠? 아, 이 이름에는 야망이 큽니다. 신중해지셔야 되겠어요. 이 세상에 이름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이름 있는 사람 치고 고집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고집 없는 사람이 어디 있고, 야망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고요한 서정을 사랑하지 않는 자, 그런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름의 한자와 생년월일을 비교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들려주고, 또 세상 이야기를 전해들으면서 도장 파는 것을 즐기기는 틀렸다. 이렇게 재촉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분이 엇나간다. 잽싸게 파서 던져버려야 하는데, 엇나간 기분 때문에 속이 상해서가 아니라, 엇나간 기분에 끌려 엇나간 칼이 글자를 망치고, 어쩌다가는 손가락을 푹 쑤셔버리기 때문이다.
재의가 서랍을 연다. 서랍에서 칼통을 꺼낸다. 칼통 뚜껑을 열자 1호부터 7호까지 날이 하얀 칼들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다. 그는 1호 칼을 꺼내 왼손 엄지손톱을 살짝 찍어본다. 칼끝이 손톱에 있는 작은 골 사이로 들어가는 듯하다. 날을 갈 때는 아직 멀었구나. 재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1호 칼을 제자리에 꽂고 2호 칼을 든다. 7호 칼까지 차례로 날을 확인한다. 칼날의 끝을 확인하고 나니 다시 말을 붙여보고 싶어진다.
“도장을 이름 새기는 거라고만 생각하면 안 돼요. 이름자가 곧바로 성격이거든요. 성명학이란 게 따로 있잖아요. 부처님도 소언일체법자 즉비일체법 시고 명일체법이라 했으니까. 일체 법이 이름일 뿐이라 했잖아요. 크음. 부처님 말씀이 꼭 그런 건 아니지만, 크음, 사람이 없으면 이름도 없겠나요? 아이가 몇 년 생이에요?”
“열한 살이에요.”
아이의 아버지가 말한다. 재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잔나비, 그러니까 이렇게 버릇이 없지, 입맛을 다신다. 인재함으로 손을 뻗어 검은색 운모 재질을 꺼낸다.
“웬만하면 이걸로 하세요. 도장하나 좋은 걸로 장만해 두면 언제고 쓸 날이 올 거니까요. 이 아이 혼인신고 할 때까지 도장을 쓸라나 모르겠지만요.”
“혼인신고요? 설마 이 애 혼인신고할 때까지 도장을 쓰려고요.”
재의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피식 웃는다. 얼결에 혼인신고라고 해 놓고 나니 달옥이가 어떻게 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이게 말예요, 플라스틱으로 보이는데, 사실은 굉장한 겁니다. 공군 비행사들이 비행기 딱 올라타면 쓰윽 하고 유리 뚜껑이 내려오잖아요? 그 유리거든요. 비행기가 갑자기 푹 솟으면 찬 공기를 만날 거 아니에요. 그럴 때 안개가 끼면 어떻겠어요. 안 되지. 그 유리에다 양귀비를 먹여 염색한 게 이거잖아요. 이 도장 뚜껑은 언제 어느 때든 뻥 뻥 잘 열려요. 싸구려들은 습기가 차서 도대체 열리지가 않지요.”
“그럴까요? 얼마래요?”
“삼만 원. 다른 도장가게에서도 그렇게 받습니다. 제가 특별히 비싸게 받는 건 아니에요.”
“그러죠. 그걸로 해 주세요.”
재의는 재질 뚜껑을 열어 인재 진열장에 넣고 재질을 전각대에 끼운다. 인면을 만지작거리면서 아이 아버지 쪽을 쳐다본다. 그리고 아이에게 건내려고 했던 파라핀 판을 이번에는 아버지 쪽으로 건넨다.
“여기에 아이 이름 좀 적어 주세요.”
아이 아버지가 아이를 보며 망설이더니 파라핀 판을 받는다. 무릎에 파라핀 판을 올려놓고 철필로 金河美라고 판다. 철필에 파라핀 찌꺼기가 묻는다. 재의는 파라핀 판을 받아들고 왼손 엄지로 글자를 더듬는다.
“김자 정자 수자요? 아이 도장을 파신다더니 사장님 걸 파시려고요?”
“아니, 그 이름 말고, 그 밑에다 적었어요. 김하미.”
재의는 다시 파라핀 판을 더듬는다. 金河美. 반듯한 글씨체다.
내가 판을 안 지웠었나? 이런 이름 판 적이 없는데. 재의는 반질거리는 나무토막으로 파라핀 판을 문질러 金正秀라는 한자 이름을 지운다. 김하미 이름을 해석하지 않고 김정수가 누구인지 기억을 더듬어본다. 흔한 이름이긴 한데……. 언젠가 새긴 적 있겠지만 최근에 이 이름을 만난 적은 없다. 누가 도장방에 들어와 장난질을 했을까. 도장방에 올 만한 사람들을 짚어본다. 아이가 생각을 가로막는다.
“아저씨. 진짜로 눈 안 보여요? 그런데도 도장을 팔 수 있어요?”
재의는 1호 칼로 글자를 앉히기 시작한다. 따닥 따닥 말을 주워넘기던 아이가 칼질이 시작되자 한여름 낮달처럼 고요해진다. 재의는 아이가 서 있는 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아 칼질을 숨긴다. 부릴 배짱이 이것밖에 없다.
“아빠. 절루 좀 비켜 봐.“
아이가 제 아버지를 밀치고 방향을 바꾼다. 재의의 칼 솜씨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말겠다는 거다. 재의는 또 의자를 돌려 앉을까 하다가, 이러다가 칼에 찔리지, 마음을 고쳐먹고 칼을 놓았다가 다시 쥔다. 아랫입술에 윗입술이 주욱 밀려 올라간다. 재의는 칼끝을 인면에 대고 왼손 엄지로 칼 받침을 하여 오른손으로 밀고 당기며 이름을 새긴다. 이름 세 글자를 앉히느라 이마에 땀이 솟는다. 눈은 꾹 감고 있다. 어이쿠. 손이 말을 안 듣네. 미안해서 어쩌죠? 오늘은 못 하겠는데. 손님들을 돌려보내 버릴까. 그러고 나면 후회할 줄을 빤히 안다.
도장방에는 실밥 뜯는 소리 같은 칼질 소리만 이어진다. 아이는 움직이는 법 없이 재의의 칼끝을 바라본다. 움직이는 것은 재의의 손과, 중심 기둥에 박혀 왼쪽 오른쪽으로 도는 전각대뿐이다. 육면체 전각대의 왼쪽 상단에는 막음막대가 도장 뚜껑 길이만큼 나와 있다. 재의는 운전수가 핸들을 잡듯 막음막대에 손을 올려놓고 방향을 잡는다.
인면에서 칼을 거둔다. 파라핀 판의 글자를 읽었던 왼손 엄지손가락 안쪽 면으로 인면을 쓰윽 핥는다. 그리고 숨을 후우 내쉰다. 칼질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내 쉬는 숨이다. 숨을 고른 다음 흐읍 소리나지 않게 숨을 참고 다시 칼을 댄다. 뚝. 뚝. 뚝. 칼끝에서 분필가루 하나 정도의,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조각들이 떨어진다. 칼 받침대가 되면서 줄어들기 시작했다가 이제는 작은 호박씨 같아진, 왼손 엄지의 손톱은 닳아질 대로 닳아져서 발꿈치 살 같은 굳은살에 싸여 있다. 인면에는 아주 희미한 파선으로 글자의 윤곽이 앉아 있다.
“글자는 잘 앉았습니다. 앞으로 삼십 분은 걸릴 텐데. 기다릴 수 있죠?”
재의는 1호 칼을 넣고 3호 칼을 빼낸다. 3호 칼은 1호 칼보다 날이 길고 두껍다.
의외로 글자가 잘 된다. 그러니 물어볼 말도 많고 들어야 될 소식도 많아진다. 글자가 안 되는 날은 칼이 엇나갈까 봐 귀가 막힌다. 세상이 너무나 고요해진다. 그런 날은 칫솔로 인면을 싹싹 쓸어서 도장을 넘길 때까지 언제나 노심초사다. 칼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물 위에 글자를 쓴 듯 획이 희미하게 앉으니 손님이 퇴짜를 놓으면 어떡하나 등짝에서 땀이 흐른다.
“관음보살님은 뵙고 오셨나요?”
“예. 그랬죠.”
재의는 사이를 두었다가 또 묻는다.
“서울에서 오셨다고 하셨죠? 서울에서는 요즘 뭐가 유행이래요?”
“글쎄요. 뭘 물으시는 건지…….”
“잠자리가 부쩍 많아졌다죠? 모기가 많아서 그런대요. 잠자리가 일 헥타아르당 모기 백 키로그람을 잡아먹는다잖아요.”
“그런가요? 처음 듣는 얘기네요. 그런데, 저 여자분이 스님 딸이란 얘기가 있던데 그래요?”
“글쎄요. 별별 말이 다 있지 뭐예요. 스님 딸이라는 둥, 스님 각시라는 둥, 정신병자라는 둥. 당사자가 벙어리니 알 수가 없지 뭐예요. 젊은 상좌가 있었는데 그 놈 찾아온 여자라는 말도 있어요. 그런 소문 저 여자도 듣나 몰라. 절마다 오갈 데 없는 보살이 한 사람씩 있잖아요. 그런 여자예요.”
재의는 괜한 소문을 하나 만들어서 이야기한다.
“관음보살을 훔쳐다 팔아먹으려고 했다지 뭡니까. 스님이 자고 일어나서 아침 예불을 올리려고 불당엘 들어갔더니 방석이 없어졌더래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관음보살님이 바다로 들어가 버리는 게 꿈에 나타나 방석으로 그 구멍을 막아놨었는데, 킁, 이 도둑놈이 마지막으로 절을 하고 훔쳐가려고 했었는지 그 방석을 밟고 섰었나 봐요. 하. 도둑놈 인생은 그걸로 끝이었지 뭡니까. 절에 가서 그 구멍 들여다보셨지요? 그 도둑놈이 남편이란 얘기가 있어요. 그 소식 듣고 미쳐버린 다음, 남편 찾으러 왔다는 얘기가 있어요. 따라 죽으려고 했다는데, 스님이 거뒀다죠 아마.”
재의는 왼손 엄지로 인면을 더듬는다.
마지막 한 획이다. 운모를 파고들면서 스스로 갈린 칼끝이 하얗다. 마지막 한 획의 삐침을 정교하게 돋운다. 그런 다음 도장 테두리 원을 다듬는다. 다듬기를 끝내고 칫솔을 꺼내 싹싹싹 구두를 닦듯 빠르게 솔질한다. 거꾸로 새겨진 글자를 손으로 더듬으면서 잠깐 이름을 위해 기도를 한다.
“자. 아이한테 찍어보라고 해요. 처음 도장은 본인이 찍어야 좋다네요. 처음만 어디 그러겠어요. 도장은 항상 자기가 찍어야 돼요. 인주 여기 있어요.”
재의가 내민 인주를 아이의 아버지가 받는다. 아이가 도장을 받아들고 인주를 묻힌다.
“아빠. 어디다 찍어?”
재의가 방명록을 내민다. 방명록 표지의 검은 인조털이 반질반질 닳아 있다.
“여기에 아버지께서 날짜랑 이름을 좀 써주시고, 그 밑에다 좀 찍게 해 주세요.”
아버지가 방명록을 받아든다. 방명록 표지를 열자 정연하게 자리잡고 있는 붉은 과거들이 나타난다. 1989년 10월 5일 박인수. 1989년 10월 6일 김현우. 몇월 몇일 흥남산업. 몇월 몇일 무슨 무슨 친목회. 첫 페이지에 찍혀 있는 1989년의 도장이 아직도 선명하다. 아버지가 인보를 펼쳐 내밀자 아이가 말한다.
“아빠. 무슨 부적 같애. 찍기 싫어.”
아버지가 멋쩍어하면서 도장을 받아 든다. 날짜와 이름을 적은 칸에 도장을 눌렀다가 거둔다. 화선지 위에 갑골문 같은 무늬가 선연하게 찍힌다.
손님들이 돌아가자 재의는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시간을 확인한다. 11시 30분이다. 스님하고 공양을 같이 하려면 천천히 올라가야 될 시간이다.

지난 밤, 달옥이가 청소를 하러 왔을 때였다. 재의는 이메일을 체크하고 있었다. 스크린 리더는 새로 온 편지가 없다는 정보를 반복해서 들려주었다. 달옥이가 다가왔다. 얼떨결에 가슴에 손을 댔을 때 괜찮다고 글자를 적어주었을 때처럼, 재의의 손목을 잡고 손바닥에다 이렇게 적었다. 저도 컴퓨터 배울까요? 재의는 윈도우 메모장을 열었다. 정말 배우고 싶어요? 이렇게 타이핑했다. 타이핑을 마친 다음 오탈자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마우스의 포인터를 문장 끝에다 댔다. 정말 배우고 싶어요 물음표. 스피커에서 물음표까지 읽는 빠른 음독이 들려왔다. 달옥이는 키보드를 자기 앞으로 당겼다. 네. 몇 십 초만에 한 글자를 친 다음 재의가 그랬듯이 마우스 포인터를 그 글자에 가져다 댔다. 스피커에서 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왜요? 재의가 물었다. 달옥이는 타이핑을 하는 것이 오래 걸릴 것 같다고 생각한 다음 재의의 손바닥에다 이렇게 글자를 적었다. 그냥 그러고 싶어요. 그러자 재의는 타이핑으로 대답했다. 내일부터 가르쳐 드릴게요. 그 말을 읽고 달옥이는 고마워요, 라는 말을 한참 동안 입력한 다음 마우스를 그 줄에 가져다 댔다.
달옥이가 집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것은 어머니가 앓아누우면서부터였다.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달옥이는 어머니 시중을 잘 들었다. 재의는 어머니가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오라는지 가라는지 뭘 하라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어머니, 하고 불렀는데 참 너무나 고요했다.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어머니가 돌아가자 달옥이는 하루 한 차례씩 절에서 내려와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해 주었다. 절밥을 싸 가지고 내려와 상을 차렸다. 사십구재 다음날은 상좌가 함께 내려왔다. 상좌는 집에 불을 끊는다면서 부엌의 가스레인지를 치웠다. 혼자 있다가 불을 내면 어쩌냐는 거였다. 그 말은 절로 올라가자는 뜻이었다. 재의는 손사래를 치며 공양 때 맞춰 밥을 먹으러는 갈 테지만 잠은 집에서 자겠다고 했다.
가스레인지를 쓸 일은 없었다. 하지만 부엌이 식었다는 생각이 들자 묘하게도 살이 그리웠다. 상좌가 사라지던 날 우는 달옥이를 달래려다 가슴을 덜컥 만져버렸을 때, 달옥이가 재의의 손바닥에, 괜찮아요, 라고 썼을 때, 불현듯 재의는 자기가 그리워하는 세상의 모든 온기가 그녀에게 모여 있는 듯해 가슴이 복받치는 걸 느꼈다. 부엌에 다시 가스레인지를 설치하면 달옥이가 집에 와 밥을 지어줄 것이다. 그래서 마을로 내려가 사람을 시켜 가스레인지를 다시 연결했다.
사십구재를 지내고, 상좌가 사라지고, 그리고 무슨 변화가 있었던가. 가볍게 발목을 삔 일이 있었다.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으나 재의는 공양시간에 맞춰 절로 올라가던 걸음을 끊고 달옥이를 기다렸다. 그런데 노승이 밥을 가지고 왔다. 이튿날도 노승이 밥을 들고 왔다면, 그 날로 당장 일어섰을 것이다. 이튿날부터는 달옥이가 밥을 가지고 왔다. 다시 연결해 둔 가스레인지를 켜서 국을 데웠다.

지난 밤, 재의가 컴퓨터를 왜 배우려고 하냐고 물었을 때 그냥 그렇게 하고 싶다고 대답을 적어주었던 재의의 손바닥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자기 가슴으로 끌었다. 가슴에 재의의 손바닥을 붙인 채로 부끄러워하며 뒤로 돌았다. 재의는 뒤로 돈 달옥이의 어깨로, 겨드랑이로, 허리로, 엉덩이로 손바닥을 옮겨갔다. 그리고 뒤에서 꼭 안았다. 달옥이가 부르르 떨면서 웅웅거렸다. 재의는 그녀를 안은 채로 가만히 시간을 보냈다.
과연 벙어리와 함께 살 수 있을까. 자신이 서지 않았다. 귀에서는 자기의 고동소리와 달옥이의 고동소리가 섞여 울렸다. 얼굴을 만지고 싶어서 손을 들었는데 달옥이가 입술을 열고 손가락을 물었다. 손끝에 혀가 닿았다. 찻잔처럼 따뜻하고 비누처럼 매끄러웠다. 한없이 부드러운 그 혀를 만지다가 입에서 손을 뺐다.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다. 재의는 달옥이의 가슴에 손가락을 세우고, 뭐라고 쓰면 좋을지 망설였다. 좋은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달옥이가 방에서 나갔다. 욕실 문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걸로 끝나는 걸까? 콰아 콰아 물 끼얹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쉭 쉭. 언제나 그렇듯이 소리로 자기를 말하고 있었다. 그 소리가 얼마나 거칠고 큰지 달옥이는 몰랐을 것이다. 재의는 소리를 들으며 달옥이를 그렸다. 비누칠을 하는구나, 손을 헹구는구나, 앉아서 다리를 씻는구나. 누워서 눈알을 굴렸다.
숲에서 길을 읽을 때처럼, 낯선 길을 걸을 때처럼 조심조심 달옥이의 몸에 길을 내기 시작했다. 달옥이의 목에, 젖가슴에, 옆구리에. 마지막으로 달옥이의 등에 미안, 이라고 적었다. 고심 끝에 선택된 것이 그 말이었다. 무슨 대꾸를 하려고 달옥이가 몸을 돌리려 했다. 재의는 팔에 힘을 주고 달옥이가 몸을 돌리지 못하게 했다. 달옥이가 몸에 주었던 힘을 풀었다. 재의는 뒤에서, 귓속 같이 좁은 달옥이의 길로 자기의 몸을 밀어 넣었다. 빈곳이 채워지는 소리, 귓속의 길이 가슴으로 이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득한 현기증이 일었다.

점심 공양을 하면서 재의가 묻는다.
“스님. 상좌 속세 이름이 뭐래요?”
“왜. 도장 파서 돈 내노라 하려고? 속세 이름이 뭐면 뭐하고 법명을 받으면 뭐 하겠노. 무상이라 해라. 무상.”
“김정수라고. 혹시 아는 이름이래요?”
“흐응. 김정순지 김정님인지 그게 뭐나?”
재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밥을 비며 먹는다. 달옥이는 밥을 먹지 않고 노승의 입과 재의의 입을 바라본다.
달옥이가 상을 물리고 공양간으로 들어가자 재의는 혼자 길을 내려간다. 김정수. 내친 김에 칼질을 더 하기로 했다. 야망이 큰 남자 이름이다. 인연이 묘하니 주목으로 해 줘야겠다. 주목은 땅에 붙어 자라면서 천년을 산다. 이 재질을 쓰면 나중엔 인주를 바르지 않아도 도장이 찍힌다지. 상좌가 떠나면서 적어둔 이름일 거다. 속세로 돌아가 살다 보면 도장이 필요할 테고, 도장 생각을 하게 되면 한번쯤 오지 않고는 못 배길 거다. 재의는 한자 이름을 어떻게 새겨줄지 생각하면서 지팡이로 길을 읽는다. 이렇게 하기로 하자. 김정수신(金正秀信). 이름자 스무획에 인(印)을 넣으면 복 없는 스물여섯 획이 된다. 장(章)을 넣어도 나쁘긴 매한가지다.
도장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인재함을 열고 주목 재질을 꺼낸다. 재질을 전각대에 끼우고 글자를 앉히기 시작한다. 글자를 앉히고 나서 인면을 더듬는다. 지켜보는 사람 없이 혼자 칼질을 할 때는 마치 보이지 않는 사람의 과거를 새기는 것 같다.
재의가 파선으로 글자를 앉히고 있을 때, 달옥이는 어느새 점심 설거지를 마치고 내려와 있다. 매표소 앞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다가 바람이 불 때마다 고개를 돌려 칼질을 하고 있는 재의를 바라본다.
빗방울이 떨어진다. 흙냄새를 맡고 재의가 칼을 거둔다. 밖으로 나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핸드폰을 꺼낸다. 새벽에 했던 것처럼 날씨 예보를 듣는다. 안녕하십니까, 7월 8일, ○○지방의 일기예보입니다. 안내가 시작되자 7번을 누른다. 동부 남해안 지방의 일기예보입니다. 그는 다시 3번을 누른다. 기상특보 사항입니다. 오늘밤 남해 서부 전 해상에 파랑주의보가 발효될 예정입니다. 그는 별표 버튼을 눌러 첫 안내 메뉴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번에는 2번을 누른다. 7월 8일 오후 한 시 ○○기상대 발표, 남해 서부 해상의 날씨입니다. 오늘은 남동 내지 남서풍이 8에서 12 미터로 불겠으며 앞바다는 비가 오겠고 강수 확률 90퍼센트, 예상 강수량은 120밀리미터입니다.
핸드폰을 닫았다가 다시 연다. 064 131을 누른다. 안녕하십니까, 제주지역 일기예보입니다, 제주 등 제주 북부 예보는 1번을……. 그는 1번과 2번을 차례로 누른다. 7월 8일 오후 한 시 제주 기상대 발표 제주 북부 바다의 날씨입니다. 오늘은 남동 내지 남서풍이 10에서 15미터로 불겠으며 앞바다와 먼바다, 비가 내리겠습니다. 강수 확률 90퍼센트, 예상 강수량은 120밀리미터입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제주 북부 바다의 날씨와 남해 서부 바다의 날씨는 대략 비슷하다. 재의는 도장방으로 들어가 도장을 마무리한다.

빗소리가 깡통 건물 지붕을 두들긴다. 눈이 안 보이면 소리에 익숙해져야 하고 숫자에 익숙해져야 한다. 120밀리미터. 내리 이틀은 내리겠다. 모기 소리는 들리지 않고 계곡의 매미소리는 희미하겠다. 상좌 도장을 새겼으니 이제 스님 주련을 새겨야겠지. 재의는 스님이 말해준 주련의 글귀를 떠올린다. 지금의 주련에 있는 효봉의 오도송 그대로다. 海底燕巢鹿抱卵 火中蛛室魚煎茶 此家消息誰能識 白雲西飛月東走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 속 거미집에 물고기가 차를 다리네, 이 집안 소식을 누가 알까, 흰 구름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길쭉한 목판에 글자를 새기고 나면 누군가는 글자에 칠을 입혀야 할 것이다.
재의가 도장방을 나선다. 매표소 앞에 있던 달옥이가 뛰어가 우산을 받쳐 준다. 재의가 살며시 달옥이의 허리를 감싼다. 달옥이가 고개를 숙인다. 두 사람은 매표소로 들어간다.
매표소 깡통 건물 안에는 의자가 둘 놓여 있다. 달옥이가 재의의 손을 잡아 의자 등받이를 짚어준다. 재의는 의자를 더듬어 조심스럽게 앉는다. 달옥이는 재의가 앉기를 기다렸다가 느리게 앉는다. 재의가 손을 내민다. 달옥이가 자기 손을 재의의 손 위에 올린다. 재의가 손가락을 세워 이렇게 쓴다. 도장 갖고 싶다고 했죠. 성이 뭐예요? 달옥이가 재의의 손 위에 이렇게 쓴다. 김. 재의가 다시 달옥이의 손바닥에 이렇게 쓴다. 한자로는 달옥을 어떻게 써요?
달옥이가 손을 거두고 두 손을 비빈다. 재의가 손을 흔들며 재촉한다. 달옥이가 한참만에 재의의 손을 잡는다. 자기 손바닥에 재의의 손바닥을 올린다음 손가락에 힘을 주고 꾹꾹 눌러서 정자체로 한자를 쓴다. 金. 正. 秀. 김에서 정으로, 정에서 수로 이어지는 동안 재의의 표정은 수시로 바뀐다.
달옥이가 부끄러워하며 손을 거둬갔지만 재의는 여전히 손을 내밀고 있다. 그러자 달옥이가 재의의 목을 가만히 끌어안는다. 지난밤 재의가 자기 등판에 미안, 이라고 적을 때 그랬던 것처럼 재의의 등에 네 글자를 적는다. 고마워요. 재의가 피식 웃는다. 허리를 움직거려 고개를 숙이고 달옥이의 두 가슴 사이에 이마를 댄다.
깡통 건물 천장에서 빗소리가 요란하다. 재의가 달옥이의 손을 잡는다. 이렇게 쓴다. 몇 살이에요? 달옥이가 되묻는다. 왜 물어요? 재의가 다시 묻는다. 어디서 살았어요? 달옥이가 또 되묻는다. 왜 그런 것부터 물어요? 두 사람은 수석에 물을 주듯 고요하게 말을 주고받는다. 이름이 새로워지니까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된다. 그들이 오래도록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을 때, 장삼에 가사를 두른, 법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젊은 승이 표 달라는 말을 하지 않고 매표소를 지나쳐 올라간다.



박금산1972년 출생. 고려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졸업. 2001년 문예중앙 신인상에 중편소설 '공범'이 당선되어 등단. 소설집으로 <생일선물>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