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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북한문학] 리라순/ 행복의 무게(1)
이름 관리자



북한문학을 읽자 제5회

딸의 고민



 

리라순(북한 작가)11
1

1

경이가 ㄹ화학공장이 있는 진천역에 내린 것은 저녁녘이었다. 초겨울의 쌀쌀한 바람이 그의 어깨에 스며들었다. 가볍게 몸을 떨며 개찰구로 나온 유경은 살얼음 진 강기슭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 한끝에 남편이 가 있는 ㄹ화학공장의 큰 굴뚝이 저녁 어스름에 멀리 보였다.

‘그인 지금 뭘 하고 있을까?……’

한 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는 남편을 찾아 이렇게 부랴부랴 공장으로 내려온 유경이었다. 남편은 공장 확대실험 때문에 여기에 와 있었던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기에 지친 유경은 엊저녁 연구소의 과학부 소장을 만났었다.

“연구소에서도 근석 동무가 돌아오지 않아 걱정하고 있소. 열흘이면 실험을 끝내고도 남았을 텐데 종무소식이구만. 혹시 실험이 잘 되지 않아 그러는지…….”

그때 과학부 소장이 한 말이었다.

유경이 보건대도 이번 실험은 열흘이면 충분한 기일이었다. 그런데 오늘까지 돌아오지 못하는 걸 보면 그에게 분명 다른 일이 생긴 것 같았다. 혹시 실험에서 실패한 건 아닌지. 어쩌면 말썽이던 위병이 다시 도져 자리에 누워 있을지도 몰라……. 유경의 눈앞에는 밤을 밝히며 실험에 몰두하는 남편의 축간 얼굴과 함께 몸이 불편하여 외진 합숙에 누워 있는 모습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그런 생각들은 불안에 싸인 유경을 못 견디게 괴롭혔다.

가봐야겠어! 당장!…….

그 길로 집에 돌아온 유경은 남편에게 필요한 약이며 모 내의들을 트렁크에 챙겨넣으며 서둘렀다. 그러다가 문득 출장 떠나던 날 아침의 일이 떠올랐다.

“연구사업을 그만두겠다!…… 진심이요?”

그때 유경은 퇴원한 지 얼마 안 되는 어린애를 안고 조용히 다독이기만 했었다.

“그래요. 촉매연구도 가정생활도 모든 게 저에겐 힘에 부쳐요.”

지치고 피곤에 몰린 아내의 모습에 근석의 목소리는 약간 누그러졌다.

“정 힘들면 얼마 간 쉬시오. 내 당신의 연구과제까지 함께 밀고 나갈 테니…….”

“아니, 그만두세요! 제가 연구하던 알콜법은 아직 먼 장래의 과제에요. 그것 때문에 당장 공장 확대실험에까지 들어간 당신의 아민법에 지장을 주고 싶진 않아요.”

잘라매는 듯한 유경의 목소리는 아까와는 달리 단호했다. 근석은 설복하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물론 당장 아민법을 생산에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사실이오. 그러나 귀한 아민보다 어디에나 흔한 알콜로 ‘ㅈ’촉매를 합성할 수 있다면…….”

유경은 앓고 난 뒤 몹시 창백해진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고집스레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알콜법은 아직 학술적으로 정립되지 못한 착상에 불과한 것이에요. 당장 생산을 중지해야 할 화학공장의 실태는 가능성보다 현실성이 있는 아민법을 먼저 완성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 않나요.”

근석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공동연구를 계속 밀고 나간다면 빠른 시일 내에 가능성을 현실성으로 바꿀 수 있다고 보오. 당신만 물러서지 않는다면 말이오.”

유경은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제발 저를 내버려두세요. 전… 지쳤어요…….”

애원에 가까운 유경의 눈빛을 마주보던 근석의 표정은 굳어졌다.

“두뇌의 부족으로 연구사업을 포기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학사인 당신이 모든 게 힘들다고 사직한다면…… 그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라 앞에 재세로 되는 거요.”

유경은 반발적으로 긴 눈섭을 치켜올렸다.

“재세한다고요? 어쩌면 당신이 그런 말을…… 저에게 연구과제만 있는가요? 지금은 시약, 실험기구, 연구조건만이 아니라 가정을 유지하기조차 힘든 때에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전 여성이에요…….”

근석은 담배를 피워 물었다. 둘 사이에는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근석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잘 돕지 못했소. 하지만 가지 않겠다는 사람을 강제로 이끌수야 없지. 당신에게…… 실망하게 되는구만.”

그렇게 떠나간 남편이었다. 유경은 그때 남편의 실망 어린 그 눈빛에서 잃어버린 소중한 그 무엇인가를 안타까이 찾고 기다리는 은근한 고뇌도 엿본 듯싶어 가슴이 아려왔다.

열흘이면 그이는 돌아올 것이다. 그러면 성공의 환희는 오늘의 이 무겁고 싸늘한 공기를 다 날려보낼 것이다. 어렵긴 하지만 이 고난이 극복될 때까지 알뜰한 주부가 된다면 그이만이라도 근심없이 연구사업에 전념하게 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열흘이 지나고 한 달이 넘도록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고 유경은 기다리기에 지쳐 이렇게 짐을 싸들고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눅눅하고 차가운 강바람이 불어왔다. 날은 점점 더 어두워왔다. 유경은 조급해지는 마음에 쫓겨 걸음을 더욱 다그쳤다.

그때 전조등을 환희 켜고 마주 달려오던 자동차 한 대가 유경의 앞에서 삑 멎어섰다.

“유경 선생님 아닙니까?”

차창이 열리며 ㄹ화학공장 운전사가 둥실한 얼굴을 내밀었다. 촉매연구로 몇 번 공장에 내려온 터여서 유경은 노동자들하고도 낯이 익었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이 밤중에 내려오셨습니까?”

유경이 머뭇거리자 운전사는 알 만하다는 듯 머리를 끄덕이며 벙싯 웃었다.

“근석 연구사 선생님을 찾아오셨군요.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이번에도 다 성공한 연구성과가 뭐 큰 이익이 없다면서 대담하게 포기했다면서요?”

“예?!”

유경은 너무도 뜻밖의 소식이 눈이 커졌다.

‘포기하다니? 무엇을?……’

“그이가 지금 공장에 있는가요?”

다급하게 묻는 유경에게 운전사는 조향륜을 툭툭 두드려 보였다.

“글쎄, 내 그래서 이렇게 길 떠나는 게 아닙니까. 연구사 선생이 무슨 새 시료를 가지려 이틀 전에 석정으로 떠났다는데 어디 돌아와야지요. 길가에서 고생할 것 같아 우리 기술발전 부기사장 동지가 이 차로 마중가라고 해서 가는 길입니다.”

석정이라면 여기서 한 2백 리 가량 되는 곳이다. 그 먼길을 혼자서 걸어 가다니…….

자동차가 어둠속으로 사라진 후에도 유경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어째서 아민법을 포기했을까? 그리고 새 시료라는 것은?

유경은 생각이 혼란된 속에서도 추운 밤길을 걷고 있을 남편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 그리고 초조하고 불안했다. 그 초조와 불안은 촉매연구를 포기하고 과학기술통보실에 돌아앉은 그때부터 그를 무시로 괴롭혀 온 그 불안과 비슷한 것이었다.

새 직무를 맡은 초기에는 모든 일이 정상궤도를 따라 흘러가는 것 같았다. 한가한 시간과 여유있는 생활조직, 정상적인 출퇴근과 기술서적들의 분류, 맡겨진 업무만 처리하면 하루 일이 명백하게 끝나는 기술통보실의 부원 자리는 연구과제와 복잡한 사색 그리고 실험수치들에 묻혀 돌아가던 유경에게 가정주부의 의무를 충실히 실행할 수 있는 큰 혜택을 베풀고 있었다. 모자라는 시간 때문에 엉망이 되었던 살림이 다시 정돈되고 절약과 실용성을 위주로 하여 오던 음식차림이 단조로움을 깨고 성의껏 밥상에 올랐다. 새벽이면 늘 아래층에서 물을 길어올리곤 하던 남편의 물바께쓰도 제가 들고 나섰으며 매일이다시피 신소 받던 아이의 ‘건강수첩’도 제때에 정리하여 탁아소로 보내곤 했다. 물론 가정을 위한 살림살이 배낭도 가끔 지곤 했지만 한 송이의 꽃망울처럼 싱싱하게 자라는 아들을 바라보면 그 피곤도 가뭇없이 사라지곤 했다. 익어가는 복숭아처럼 발그스레한 두 볼, 유난히 생기 도는 별 같은 눈, 성의껏 해입힌 고운 옷……. 귀엽고 건강하게 자라는 아이의 모습은 유경에게 어린애를 가진 어머니의 무한한 행복을 느끼게 하곤 했다. 그래, 이것이 여성이 아닐까? 엄혹한 오늘날 가정살림을 도맡아 나서고 건강한 아이를 키우면서 남편들을 여전히 사회적 의무에 충실하도록 떠미는 여기에 여인들의 강인성과 아름다움이 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러나 유경의 생각과는 달리 그의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자신을 스스로 기만하고 있다는 허무함으로 하여 까닭없이 반발심이 솟구치곤 하였다. 어쩐지 원인 없이 온몸이 곤욕을 치른 것처럼 시름시름 아파나기도 했다.

유경은 모든 것이 귀찮았다. 거기에다 이제는 돌아왔어야 할 남편까지 돌아오지 않으니 갑갑한 속마음은 더욱 새까맣게 타들어갔던 것이다.

공장 굴뚝이 가까이 바라보이는 자그마한 등성이를 숨차게 오른 유경은 땀이 내돋은 이마가 축축해진 것을 느끼며 손수건이 있는 봄가을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뭔가 딴딴하고 동글동글한 것이 짚였다. 만져보니 삶은 밤이었다. 유경의 입가에는 저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났다. 아들 초성이가 아버지에게 준다고 손에 굴리며 아끼던 것을 어머니의 주머니에 넣은 것이었다. 늘 남의 집에 맡기고 출장가는 데 습관이 되어서 이번에도 선뜻 떨어진 아들애였다.

“엄마, 언제 오나?”

헤어질 때 아들애가 눈을 깜박이며 묻던 말이었다.

“세 밤 자고 오마. 그 동안 탁아소에도 잘 가고 동무들과도 잘 놀아야 한다.”

아이를 받아 안으며 중학 동창생이고 소아과 의사인 미영이 푸념 섞인 핀잔조로 한마디 했다.

“모르겠구나. 너희들의 생활은…… 남편은 늘 나가 살지, 아이는 남의 집에 살다 싶이 하지. 헌데 이번엔…….”

이때 아이의 되알진 목소리가 두 여인을 놀라게 했다.

“우리 엄만 박사야! 그래서 출장 가는 거야!”

순간 유경은 무거운 쇠뭉둥이에 머리를 호되게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뭐, 박사라구? 내가?!…….’

그 외침은 그 어떤 신성한 믿음을 저버렸다는 어린 넋의 항변처럼 유경의 가슴을 후볐다.

지금 이 시각에도 유경의 귓전에는 ‘박사’라는 그 말이 떠나지 않고 맴돌고 있었다. 그와 함께 자기 집 벽에 나란히 걸린 두 개의 학사증이 우렷이 떠올랐다. 그것은 대학연구원을 졸업하면서 받은 자기의 학사증과 새 촉매연구에서 받은 남편인 근석의 학사증이었다. 얼마나 보람 있던 날들이었던가.

……유경이 처음으로 근석을 알게 된 것은 어느 여름방학 열차칸에서였다.

대학연구원에서 공부하고 있던 유경은 졸업논문에 첨부될 새 촉매제에 대한 이상적인 합성수치를 확인할 일이 생겨 화학공장이 있는 진천행 열차에 올랐었다.

차가 떠나자 책을 펼쳐든 유경은 복잡한 반응식들과 기호들에 정신을 집중했다. 화학 분야에서 기본은 촉매연구라는 것을 확신한 그는 이상적인 촉매제를 연구하려는 높은 목표를 걸고 그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 유경 선생이 여기 있었군요!”

유경은 보던 책에서 눈길을 들었다. 그 앞에는 건장한 체구의 청년이 서 있었다. 짧게 깎은 머리, 선이 굵은 구릿빛 얼굴, 무척 강인해 보이는 꾹 다물린 입…… 어디선가 본 듯했으나 잘 생각나지 않았다.

“저 누구신지?……”

“하급생 리근석입니다.”

청년은 제식동작처럼 몸을 꼿꼿이 편 채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목덜미에서 번들거리는 땀을 닦으며 다행스러운 듯 싱긋 웃었다.

“온 열차를 다 뒤졌습니다. 앉아도 되지요?”

유경은 그제야 생각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연구원에서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고향으로 가는 길인가요?”

“예 그쯤 됩니다…….”

어정쩡한 대답을 하고난 청년은 호주머니에서 밤 몇 알을 꺼내 쭈삣거리며 유경이 앞에 내놓았다. 그리고는 슬쩍 말을 돌렸다.

“사실은… 이번 길에 방조 받을 일이 좀 있어서…….”

“저에게요?”

“예. 이겁니다.”

청년은 동의를 얻기라도 한 듯 옆에 끼고 있던 책 한 권을 선뜻 내놓았다. 그것은 촉매합성에 관한 새로운 연구방법의 소논문이었다.

설명을 서두르며 부지런히 옷주머니를 더듬던 청년이 이마의 땀을 삑 문지르며 딱한 눈길로 유경을 마주보았다.

“하, 이런…… 만년필을 두고 왔구만.”

유경은 웃음을 감추며 책갈피에 끼웠던 자기의 만년필을 슬며시 밀어놓아 주었다.

어줍게 만년필을 받아쥔 청년은 드디어 설명을 시작했다. 그의 설명에 귀기울이던 유경은 놀랐다. 그가 들고 온 이 촉매제 연구는 앞으로 이상적인 촉매제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배태된 현실적인 연구방법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관심을 끄는 것은 이 새로운 연구방법이 ‘ㅈ’라는 새 촉매합성을 위한 기초연구에 중심을 둔 유경의 졸업논문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그것이었다.

“가능한지는 모르겠습니다. 너무 엄청난 연구 테마가 아닌지…….”

유경은 경탄의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니, 전 놀랐어요. 기발한 착상입니다. 미흡한 점이 있긴 하지만 시도가 새롭고 또 현실적인…….”

청년은 흘러내리지도 않는 앞머리를 패기나게 쓸어넘겼다. 짧은 머리는 그가 손을 떼자마자 다시 빳빳이 일어섰다.

“그래서 유경 선생을 찾아온 겁니다. 이전처럼 병사의 의무를 지키는 일이라면 이렇게 방조를 청하는 일이 없겠지만…… 촉매합성 분야에서야 유경 선생이 선배가 아닙니까.”

“제대군인인가요?”

청년은 싱긋 웃었다. 유경은 그의 소논문에 다시 눈길을 주었다.

“이것을 완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겠는데…….”

촉매합성 분야는 화학공업 분야에서도 가장 힘들고 중요한 첨단분야였던 것이다.

“물론 힘들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보람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왕 본 바에는 끝까지 도와주십시오.”

청년은 제대군인답게 시원하게 청했다.

“저야 뭐…….”

하지만 유경은 생각했다. 불 같은 인간, 이런 정열의 인간은 반드시 해낼 것이다.

“그럼 좋아요. 제 힘껏 돕겠어요.”

순간 청년의 두 눈에서는 이름할 수 없는 환희의 격정이 번쩍 하고 빛났다. 유경은 불의에 그가 자기의 손을 덥석 잡을 것 같아 당황했다. 그러나 청년은 밀어놓았던 밤알을 유경에게 내밀었을 뿐이었다.

“어서 드십시오!”

그는 입을 가리며 웃음 짓는 유경의 손에 밤을 놓아주며 자기도 흡족하게 웃었다.

열차는 어느덧 자그마한 간이역에 멎어섰다. 조용한 역 구내는 유경이네에와는 반대쪽으로 향한 객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다시 알려드립니다. 평양으로 떠나는 제2열차는 곧 출발하겠습니다. 곧 출발…….”

역 구내에 울리는 열차방송원의 목소리를 들은 청년은 갑자기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났다.

“전 이젠 돌아가야겠습니다.”

미처 물어볼 새도 없이 헤덤벼치며 차에서 뛰어내린 청년은 반대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열차를 향해 달렸다.

“어쩌려고…….”

차창에 붙어 선 유경은 두 손을 모아쥐고 청년을 지켜보았다. 용케 열차에 뛰어오른 청년은 유경이 쪽으로 몸을 돌리고 손을 흔들었다.

그랬었구나!…… 누구나 즐겁게 고향으로 떠나는 그 방학조차 탐구의 세계로 이어가는 사람, 그 짧은 시간을 놓치지 말자고 온 열차를 뒤지며 여기까지 왔다가 되돌아서는 그, 유경은 그 청년의 남다른 열정에 탄복했다.

그 청년의 모습이 멀리 사라지자 유경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보던 책을 펼쳤다. 그런데 책갈피에 끼웠던 만년필이 보이지 않았다. 유경은 그제야 흥분한 그 청년이 만년필을 그냥 주머니에 넣고 갔다는 것을 알았다. 유경은 줌 안에 든 밤알들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방학이 끝난 이후부터 그들은 열차에서 토론된 그 소논문을 놓고 자주 만나곤 했다. 유경은 그의 새로운 연구방법에 자기의 모든 심혈을 기울여 사심없는 방조를 주었다. 가끔 유경은 자기의 졸업논문과 근석의 새 착안에 기초한 앞으로의 연구목표를 두고 그와 허물없이 논쟁도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비상한 그의 두뇌와 부정할 수 없는 확고한 논리에 감탄하곤 했었다.

어느 날 근석은 무람없이 유경에게 물었다.

“유경 선생은 어째서 촉매연구를 택했습니까? 여성으로서 좀더 쉬운 과제를 맡을 수도 있겠는데…….”

유경은 부드러운 눈매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촉매연구를 택했답니다. 가장 힘겨운 첨단분야를 개척하는 여성으로서 조국의 과학발전에 기여하고 우리 장군님의 사랑을 받는 그런 연구사가 되고 싶었어요.”

근석은 경의가 비낀 눈기로 유경을 바라보았다.

“그랬구만요.”

열정적인 그들의 탐구의 세계가 깊어갈 무렵 유경은 연구원을 졸업하고 기초화학연구소로 배치받아 가게 되었다. 떠나는 날 근석이 정류소까지 그를 바라다주었다.

“그 동안 많은 도움을 주어서 고맙습니다.”

“뭘요, 오히려 동무의 열정에 제가 이끌렸지요. 앞으로 그 논문을 훌륭히 완성하길 바랍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2

부지런히 읍거리를 벗어난 유경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길을 가늠해 보듯 눈을 찌푸렸다. 추위에 웅크리고 있던 보름달이 마침내 어둠이 깃든 산마루에 떠올랐다. 은은한 달빛에 화학공장의 은빛 배관들이 또렷이 눈에 안겨왔다. 불어오는 바람결에 코를 찌르는 화학공장 특유의 냄새도 풍겨왔다. 그 냄새는 어쩐지 유경에게 잃어버렸던 안정감을 되찾아주었다. 이젠 떠나버린 지 거의 한 달이나 되어오는 자기의 실험실에서도 코를 찌르는 이와 같은 냄새가 늘 배어 있곤 했던 것이다. 또다시 실험 직전에 느끼곤 하는 오랜 연구사들의 몸에 밴 긴장감이 그의 심장을 높뛰게 하였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빨라지던 그의 발걸음은 공장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보자 납덩이를 매단 것처럼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늘 기쁨에 겨워 오곤 하던 이 길. 그런데 오늘은?…… 유경은 단순한 보통 아낙네의 걸음으로 남편을 찾아가야 하는 오늘의 자기 처지가 불만스럽고 또 서글퍼졌다.

‘늘 이렇게 그이를 찾아가야 하는 것이 나의 운명인가?……’

유경은 과학탐구의 열정으로 가슴 불태우며 처음 근석을 찾아갔던 운명적인 그때 일이 떠올랐다.

……연구원을 졸업하면서 학사학위를 받은 유경은 연구소에 배치받자마자 오래 전부터 구상해 오던 새로운 촉매제인 ‘ㅈ’을 합성하기 위한 연구에 달라붙었다. 이악한 노력으로 인차 자기의 실력을 보여주었으며 일정하게 연구성과도 올렸다.

그러나 탐구의 세계에 빠져 있는 유경에게도 인생의 화창한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결혼?! 내가?!……

“결혼이란 신중해야 하는 거야. 바로 이상과 생활을 일치시키려는 너 같은 학사처녀들이 문제지.”

중학 동창이긴 하지만 결혼생활에선 선배인 미영의 훈시였다.

“글쎄, 과학에는 정열과 시간이 필요하지만 난 일생을 결혼하지 않고 연구에 몰두하는 것은 반대해. 어째서 이상적인 생활을 꾸리지 못하겠니. 난 꼭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유경이 던진 이 말은 행복한 미영의 신혼생활에 대한 호기심도 포함된 자기의 장래생활의 아름다운 표상이었다.

“그러게 문제라는 거야. 가정을 가져야 하는 우리 여성들에겐 이상보다 현실이 더 중요하거든. 남편, 아이, 가정살림…… 넌 웃는구나! 글쎄 두고 보렴. 그때면 다 알게 될 거다.”

유경은 진심으로 충고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유경은 미영의 견해를 부정하고 싶었다. 가정에도 충실하고 지금껏 매혹되어 심혼을 바쳐온 촉매연구에서도 성공한 그런 행복한 가정의 여성이 어째서 될 수 없단 말인가. 바로 그러한 행복을 담보해 주는 결혼의 풀이방정식은 어떤 것인지?…… 하지만 그 방정식을 모색하는 유경에게는 관계없이 훌륭한 대상들이 소개되어 왔다. 그의 미모와 총명함에 현혹된 총각들이 직접 찾아오기도 했다.

유경은 왜인지 선뜻 응하게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매번 거절하고 나면 사람들의 호의를 무시하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다. 어떤 때는 맞춤한 대상자라고 생각되어 대답을 주려는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안개처럼 그를 에워싸고 방해를 놓곤 했다. 유경은 마치도 자기를 감싸고 있는 미지의 힘에 이끌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누구에겐가로 다가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도 소논문변론 준비 때문에 여느 날보다 일찍 출근하였는데 책상 위에 두툼한 등기편지가 놓여 있었다. 첫 순간 그는 의아해졌다. 자기에게 이런 등기편지를 보낼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겉봉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생화학연구소 연구사 리근석.”

순간 유경의 심장이 후두두 뛰었다. 지금껏 그를 잊고 있은 것이 놀랍고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유경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편지를 펼쳤다.

“‘ㅈ’촉매에 의한 탄화수소의 방향과정에 관한 연구.”

그는 흠칫 놀랐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연구하고 있는 주제와 꼭 같은 근석의 완성된 논문 원고였던 것이다. 유경은 허둥거리는 마음을 다잡고 서둘러 논문을 읽어 내려갔다.

“……현재 세계적 추세는 무기합성으로부터 유기화합물로 전환시키는 방향이다. 여기서 걸리는 문제는 촉매이다. 다른 나라에서 만든 ‘ㅈ’촉매합성은 우리 나라 실정에 불합리한 것이다. 때문에 우리의 원료인 ‘아민’에 기초하여 ‘ㅈ’촉매를 합성하기 위한 연구를 심화시켜 우리 나라에서도 이상적인 촉매제를 대량적으로 생산하는것은 우리 시대 과학자의 본분이며 의무가 아닐 수 없다…….”

논문원고를 든 유경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이 논문은 본격적인 연구에 이른 유경의 ‘ㅈ’촉매연구에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촉매에 매혹을 느낀 유경은 오래전부터 그것을 합성하기 위한 연구를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때 그에게서 학술적 방조를 받던 근석이 그 촉매를 합성할 수 있는 이론적 기초를 세웠다는 논문을 먼저 보내온 것이다. 끝까지 그의 논문을 읽어간 유경은 마지막 장에 덧붙인 근석의 짤막한 편지에 눈길을 모았다.

“원고를 보아주어서 감사합니다. 아직 빈 구석이 있고 해결해야 할 문제점들이 있지만 오래 전부터 유경 동무가 진행해 오던 연구에 도움이 될것 같아 이 원고를 보냅니다. 직접 찾아가 드리고 싶었지만 등기로 보냅니다.”

유경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첫 순간, 당황하던 감정이 점차 가라앉고 이상하게도 마음에는 차분한 안정감이 찾아왔다.

유경은 다시금 그의 논문을 따져보았다. 그가 편지에 쓴 것처럼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점들이 있긴 하지만 그의 연구성과는 확실히 놀라운 것이었다. 더욱이 공감되는 것은 그의 이 논문이 과학연구사업은 단순한 실험실적 연구에 그칠 것이 아니라 실천에 응용해야 한다는 입장에 튼튼히 서 있는 그것이었고 철저하게 우리의 원료에 의거해야 한다는 주체적 입장이 명백한 것이었다.

유경은 그의 논문원고를 두고 충격을 받았던 자신이 송구스러웠다. 이런 인간의 성과를 지지하고 기뻐할 대신에 당황해하다니……. 유경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다. 어떻게 하든지 과학의 세계는 점령하여야 한다. 이 논문을 참고할 것이 아니라 나의 성과까지 합쳐 ‘ㅈ’촉매에 대한 공동연구를 해야 한다.

결심이 서자 유경은 지체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껏 연구해 오던 귀중한 실험자료들을 걷어 안고 근석을 찾아 떠났다.

뜻밖에 유경을 만난 근석은 좀 놀라긴 했지만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 성미에 이렇게 찾아올 줄 알았습니다.”

“아이참, 그래서 저에게 편지를 했군요.”

유경은 능청스러운 그를 가볍게 흘겨보았다.

“옳습니다. 여기에 배치받은 후 유경 동무를 찾아가려고 했지만 동무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근석은 구내 정원에 있는 등받이의자로 유경을 이끌었다. 유경이와 나란히 앉은 그는 거북스러운 몸가짐으로 눈앞에 드리운 어린 아카시아 나뭇가지를 꺾어 들었다. 유경은 그가 기계적으로 한 잎, 두 잎 따내는 아카시아 잎을 바라보며 스스럼없이 이야기 했다.

“저에게 보낸 논문원고를 보았어요. 고마웠습니다. 하지만 전 의견을 달리해요. 누구를 돕고 말고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하루빨리 새 촉매제를 세상에 내놓는 것이 선차가 아니겠어요? 그래서 전 우리가 힘을 합쳐 공동연구를 진행한다면 지금보다 연구성과가 더 커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찾아왔어요. 동의하실지?……”

잎사귀를 뜯고 있던 근석의 손이 멎었다.

“공동연구요?”

그의 눈길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유경에게 못박혔다. 근석은 정색하여 물었다.

“동문…… 자신이 지금 무엇을 제기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유경은 당장 구멍을 뚫을 것 같은 그의 눈길에 주춤했지만 여전히 자세를 흩어뜨리지 않았다.

“공동연구입니다 ! 우리가…….”

말끝을 채 맺기도 전에 근석은 조용히 웃었다.

“즉흥적인 결심은 인차 후회를 낳는 법입니다. 나쁘게 생각진 마십시오. 물론 동무와 함께 공동연구를 한다면 그보다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촉매합성에서야 선배이고 그 연구에서 누구보다 인정되고 있는 동무인데 나와의 공동연구 때문에 그 재능이 묶여진다면…….”

유경은 그에게 도전적인 눈길을 던졌다.

“전 우리의 공동연구에 무엇이 장애가 되는지 이해할 수 없군요.”

근석은 유경의 단호한 어조에 놀란 듯했다. 그러나 여전히 못 미더운지 미간을 좁히며 쭈뼛거렸다.

“또 다른 문제가 있는가요?”

또렷한 유경의 질문에 근석의 구릿빛 얼굴이 차츰 물들기 시작했다. 그는 눈길을 떨구며 몇 개 붙어 있지 않은 타원형의 아카시아 잎을 성급하게 뜯어버렸다. 어째선지 그 행동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만 같았다. 유경의 가슴은 이상한 예감에 조여들었다. 그리고는 마지막 잎을 던지며 단호히 머리를 쳐드는 근석을 두려움에 찬 눈길로 쳐다보았다.

“유경 동무, 공동연구는 어차피…… 우리 두 사람의 결합까지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예?”

그 말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유경은 가슴부터 후두두 뛰었다. 그 다음에야 놀란 가슴을 부여안으며 후다닥 일어섰다. ‘아니 이제 뭐라고? 결합이라니?!……’ 당혹감에 사로잡힌 유경은 그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불시에 달아오른 귀뿌리를 숨기며 한옆으로 돌아섰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문제였다. 오직 새 촉매제를 위한 공동연구만을 생각하며 허심탄회하게 찾아온 유경이었다. 그런데 근석은 이러한 유경에게 너무도 놀랍고 엄청난 문제를 제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근석의 제의에도 일리는 있었다. 한 생을 바쳐야 하는 과학탐구의 길에서 공동연구를 진행한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사심없는 방조는 물론 자기 개인의 귀중한 연구성과도 서슴없이 묻어버릴 줄 아는 과학자의 양심과 자기 희생성을 동반해야 한다. 하물며 젊은 청춘남녀가 공동연구를 해야 한다면 서로가 자기의 심장까지도 주어야 할것이다!

‘서로의 심장을 준다는것은…….’

유경은 노을처럼 붉게 물든 뺨에 한 손을 가볍게 가져다 대었다. 유경은 그가 두려웠다. 하지만 불덩이 같은 열정의 인간인 그의 존재가 온몸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탐구와 사색으로 빛나던 열정적인 그의 두 눈, 높은 실력과 뛰어난 두뇌, 힘겨운 촉매연구에 한 생을 바치려는 그의 각오……. 어째서 지금껏 이러한 근석에 대하여 모르고 있었을까?

“제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자기 소리 같지 않은 근석의 목소리에 유경은 그쪽으로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근석의 발밑에 쌓인 타원형의 동그스름한 아카시아 잎이 시야에 안겨왔다. 수북이 쌓인 그 잎사귀들이 그 순간 두 사람의 인연처럼 느껴 지는 것이 이상했다. 그 인연은 처음 열차에서 있은 학술적 문제로부터 쌓이고 쌓여 오늘은 공동연구에까지 이른 게 아닐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유경의 심장은 금시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세차게 뛰었다. 이 모든 것이 생활의 순리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귀결이건만 심장은 왜 이다지 쌍다듬이질 하듯 뛰는 것일까?

유경은 얼어붙었던 입술을 가까스로 움직였다.

“그래도…… 공동연구는 해야겠지요?”

순간 거북하게 굳어져 있던 근석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그는 그 환희와 격동을 터뜨릴 그 무엇을 찾기라도 하듯 급히 품속을 더듬었다. 그런데 그가 꺼내든 것은 뜻밖에도 만년필이었다.

“이것이 기억납니까?”

유경은 그것이 열차칸에서 자기와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동의도 없이 그냥 훌쩍 주머니에 넣고 갔던 만년필이란 것을 알아보았다.

“언젠가는 꼭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을것 같군요. 그렇지요?”

이글거리는 근석의 눈길과 마주치는 그 순간 유경은 지금까지 어디론가 자기를 이끌어가던 그 보이지 않던 미지의 힘이 어디서부터 오던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는 것 같았다.

그들은 기꺼이 결혼하였다. 그와 동시에 공동연구에 들어간 그들 부부는 우리 나라 원료인 아민법에 의해 ‘ㅈ’촉매를 합성할 수 있는 이론적 기초를 완성하여 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밝고 햇빛이 비쳐드는 맞은편 벽에는 이미 받은 유경의 학사증과 함께 근석의 학사증이 나란히 걸리게 되었다. 얼마 안 있어 신문에까지 소개된 연구사 부부의 신혼가정에는 아들이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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