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시인 이경림(인천작가회의 지회장 대행)회원이 엽편소설집 <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이룸)을 펴냈다.
이경림 시인은 1989년 시 「굴욕의 땅에서」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 시작, 1992년 첫시집 『토끼찾기』, 1995년 시집 『그곳에도 사거리는 있다』,1997년 시집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등의 시집을 상재한 바 있다.
시인이 틈틈이 쓴 이번 엽편소설들은 시인 특유의 날카로운 은유와 상징을 통해우리의 주변적 삶을 도려내기도 하고, 평이한 진술 속에 촌철살인의 언어를 구축하여 엽편 이야기의 덕목을 잘 구현하고 있다. 회원들의 일독을 권한다.

緣
그는 족히 오십은 되어 보였다. 내가 남쪽으로 난 역사의 문을 힘겹게 열고 들어섰을 때 거
의 동시에 동쪽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은백색 머리의 그가 보였다. 연회색 신사복 차림의 피
부가 희고 코가 우뚝한 그가 개찰구에서 표를 사고 있는 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약간
곱슬의 은백색 머리가 형광등 불빛 아래 유난히 반짝거렸다. 그는 내 곁에 와서 약간 머뭇
거리며 물었다.
―시청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
―한 시간 정도……
―감사합니다.
그는 지갑에서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어 개찰구에 밀어넣었다.
―city hall
순간 나는 아까 그와 내가 나누던 대화가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분명
그는 내게 그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한국어로 들렸을까? 과연 나는 그에게 영어로 말하긴
한 걸까?
그는 벽에 붙은 전철 노선표를 뚫어지게 보더니 휘적휘적 개찰구 쪽으로 가서 구멍에다 표
를 밀어넣고는 플랫폼 쪽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나도 부랴부랴 그가 나간 그 개찰구를 지나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그는 플랫폼의 끝
자락쯤에서 서 있었다.
그는 바람에 양복 윗도리가 약간 펄럭이는 것을 한 손으로 누르고 전철이 오는 방향으로 눈
길을 주고 있었다. 그는 나로부터 아주 멀리 서 있었다. 그의 발치에 비둘기들이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나는 그의 쪽으로 가까이 가려고 걸었다. 긴 세월이었다. 나는 아주 오래 걸어
그에게로 갔다. 그는 그저 먼 산을 보거나 전철 오는 쪽으로 고개를 기웃해 보거나 구두코
를 내려다보거나 하였다. 그는 그저 그렇게 있었다. 가까이서 본 그의 얼굴은 약간 지쳐 있
었다. 미간에 협곡 같은 주름이 패어 있었다. 그의 와이셔츠 깃에 묻은 찌든 때가 보였다.
그의 왼손에 들려 있는 다 낡아 쭈글쭈글해진 가방이 보였다. '싸아'하고 바람 소리가 들렸
다.
그때, 전철이 들어오고 동시에 그와 나는 그 속으로 빨려들었다. 그는 내가 앉은 자리에서
대각선으로 마주보이는 의자에 앉았다.
그는 가지고 온 신문에 코를 박고 있었다. 내 속에서 누군가 말했다. '저 버릇은 여전하군'
'저녁도 굶었을 거야, 먹는 일에는 도통 관심이 있어야 말이지' '도무지 주위에 관심이라곤
없는 저 표정하구…….'
그는 머리를 차창에 기대고 이내 잠이 들었다. 그의 등뒤로 수세기가 쏜살같이 달아나고 잇
었다. 그의 손에서 신문이 스르르 미끄러져 털석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와 헤어진 지 대체 얼마나 되었을까? 오십 년? 백 년? 천 년?
문득 한 슬픔이 앙가슴을 후벼팠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아, 그때 전철이 서고 몇몇 사
람들 틈에 섞여 문을 빠져나가는 그가 보였다. 안 돼! 나는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순
간 문이 닫히고 계단 쪽으로 막 돌아서는 그의 옆모습이 아득하게 잡혔다. 터널 속을 통과
하는 바퀴 소리가 크게 들리고 그가 끝없이 어딘가로 계단을 오르는 발자국 소리가 천둥처
럼 들렸다. 가슴이 미어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