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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유실천위원회] [자료]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 답사
이름 자유실천 이메일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 답사】자료  

 

■ 행사 내용

1. 일시 : 2016년 6월 11일(토) 12시~오후 5시

2. 장소 : 마석 모란공원(민족민주열사 묘역)

3. 행사 순서 : 단체로 점심 식사. 전태일 열사와 이소선 어머니 묘소 참배. 민중의례. 나머지 묘역 자유롭게 답사. 간단한 소감 발표와 해산.  

    

■ 오시는 방법

○ 대중교통 이용시 : 청량리역→ 망우역(경춘선 환승)→ 마석역 하차 1번 출구→ 건너편 버스정류장에서 30, 93, 30-8, 1330-2, 1330-4, 1330-44 승차→ 2곳 지나 모란공원 하차→ ‘풀향기 쌈밥’에 집결(031-591-4835)

○ 묘역 주소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경춘로2118번길(화도읍 월산리 246-6)

전화 : 031-594-6362

 

■ 민족민주열사 명단(122분)

  

강민호, 강희철, 계훈제, 고재욱, 고정희, 곽태영, 권재혁, 권중희, 권희정, 금진현, 김경숙, 김귀정, 김근태, 김기설, 김기욱, 김남식, 김남준, 김말룡, 김미영, 김병곤, 김봉환, 김상옥, 김상원, 김성수, 김순조, 김시자, 김애정, 김영자, 김용갑, 김종배, 김종수, 김종하, 김주현, 김진균, 김진수, 김처칠, 김태환, 김헌정, 김현준, 남현진, 도강호, 류정하, 류한림, 문성환, 문송면, 문익환, 민병일, 박기래, 박동진, 박래전, 박상윤, 박영재, 박영진, 박용길, 박윤정, 박종철, 박태순, 배동복, 선경식, 성완희, 송광영, 송석창, 송철순, 신길수, 안동근, 안치웅, 양갑세, 양회성, 엄성준, 우동민, 우종원, 유구영, 유순조, 윤용헌, 윤주형, 이경환, 이덕인, 이범용, 이상림, 이성수, 이소선, 이오순, 이옥순, 이정미, 이춘자, 이형관, 장진수, 장창옥, 장현구, 전응재, 전용철, 전태일, 정성범, 정유미, 정태수, 정해진, 정형기, 제종철, 조영관, 조영래, 조용술, 조정식, 조현식, 주우길, 진철원, 차봉천, 천덕명, 천세용, 최웅, 최응현, 최종길, 최종진, 최진욱, 하재승, 한경석, 한상근, 한희철, 허광만, 허세욱, 홍근수, 홍민희, 홍성엽 (이상 122위)  

 

    ■ 민족민주열사의 삶

 

 

강민호 90.04.04 (당시 25세) 노태우정권 노동열사

동지는 한신대학 시절 모범적인 생활 태도를 견지하여 많은 동료와 후배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아왔다. 동지는 이 땅의 구체적 현실에 눈을 뜨게 되면서 민주화 운동에 헌신적으로 앞장서 왔으며 구로구청 부정투표함 사건에선 최후의 순간까지 투쟁하다가 2년형을 선고 받기도 했다. 동지는 노동운동을 하고자 대학졸업장을 거부하고 노동자의 삶을 자기의 삶으로서 받아들이기로 작정하고 노동현장으로 뛰어들었다. 동지는 입사한지 7일째 되던 날 야간작업을 하다가 연신기 주위에 있는 폐선을 치우기 위하여 1.5m 되는 연신기 기계 사이의 통로를 지나다가 매고 있던 폐선이 회전하는 연신기에 휘말리면서 몸도 따라 들어가 비명소리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운명하였다. 이와 같은 참변은 기업주가 안전실태를 수시로 점검하고 안전교육과 안전시설에 대해 점검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면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강희철 03.04.13 (당시 41세) 노무현정권 사회운동

동지는 ’62년에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지역에서 청년 노동자들의 의식화와 조직화를 위해 젊음을 다 바쳤다. 또한 ’00년부터는 전국연합 조직위원장, 정치위원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평생을 조국의 통일과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의 길에 바쳐왔다.

’03년 전국연합 중앙집행위원회 회의 도중 뇌출혈로 입원한 동지는 미국에게 빼앗긴 주권회복과 진보정치 승리를 위한 그 길에서 동지와 함께 해온 수많은 동지들의 눈물 섞인 방문과 간절한 바램에도 불구하고 42세의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계훈제 99.03.14(당시 78세) 김대중정권 사회운동

어린 시절 독립군의 모습을 지켜보며 민족의 현실에 눈을 뜬 그는 임시정부로 갈 계획으로 국경을 넘다 일본 헌병에 붙잡혀 지원병 훈련소로 압송됐다. 그 뒤 평양 근처 채석장에서 중노동을 하면서 `’민족해방협동단’이란 항일운동단체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했다.’45년 해방되자 고 장준하선생의 권유로 백범 김구 선생 밑에서 일을 했다. 백범의 영향 아래 신탁통치 반대투쟁에 나섰고, 백범의 남북협상을 지지하며 삭발을 하기도 했다.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 때는 ‘국대안 반대투쟁’을 이끌었다. 동지는 5·16 쿠데타가 일어난 뒤 민주화운동의 가시밭길을 걷기 시작한다. 3선개헌반대투쟁위 상임위원, 「사상계」 편집장, 민통련 부의장을 지내며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앞장섰다. 이 과정에서 3차례나 투옥됐고, ’80년에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도피생활을 했다. 그 후에도 민통련 의장, 전국연합 상임고문을 역임하며 한반도의 혁명적 변화와 민주화를 위해 평생 동안 투쟁을 계속했다. 동지는 지난 ’95년 고문 등으로 얻은 지병인 폐질환이 악화돼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병상에서도 나라를 먼저 걱정하던 선생은 자서전 `나의 투쟁, 나의 일생’을 집필하기도 했으나 끝내 마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항상 흰 고무신에 작업복으로 민주화운동 현장을 누볐던 옷차림이 말해주듯 동지는 저항정신과 청렴성, 도덕성의 상징이었다.

 

고재욱 91.08.03 (당시 21세) 노태우정권 학생열사

동지는 서울에서 출생하여 ’89년 신구전문대에 입학하였다. 5대 총학생회 사회부장으로 활동하면서 학내민주화 투쟁을 주도하였다. 학내민주화 투쟁을 주도한 이유로 학교에서 제적되기도 하였다. 총학생회 사회부장으로 활동하면서 학교 측의 기만적인 태도에 혈서를 쓴 후 상처가 깊어 병원에서 치료 중 경찰에 의해 강제 연행되어 9명의 동지들과 함께 구속되었다. 이후 집행유예로 출소한 동지는 복적 투쟁을 진행하다 ’91년 8월 수련회 도중 물속에 뛰어 들었다가 심장마비로 운명하였다.

 

고정희 88.05.13(당시 28세)노태우정권 사회열사

’88년 1월 이후 청와대, 미대사관, 백악관, 독일대사관 등에 ‘노태우 부정 집권’을 고발하는 투서를 한 동지는 ’88년 3월 서초 경찰서 대공과 직원 2명에 의해 연행되어 ’87년 대통령 선거가 부정선거라는 내용의 투서를 청와대 등에 보낸 경위 등을 조사받았다. 동지는 조사를 받던 중 은평구의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입원되었다가 이후 강남 성모병원에 옮겨져 치료를 받던 중 5월 13일 오후 5시 40분경에 병원 건물에서 떨어진 채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동지의 가족들은 연행된 경위와 정신병동에서 치료받는 과정 등이 자살로 보기 어렵고 경찰 조사를 받던 중 정신 병원에 강제 입원조치 되었고 유서가 발견되지 않는 등 자살 징후가 없었으며, 사고 현장 목격자가 병원 관계자 외에는 없는 점, 사고현장이 제대로 보존되지 않고 추락지점에 혈흔 등이 별로 없었던 사실을 들어 의문을 제기하였다. ’01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진상조사를 하였으나, 아직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곽태영 08.12.01 (당시 72세)이명박정권 사회열사

동지는 열아홉의 나이에 백범 김구선생 묘소에서 암살범 안두희를 응징하기로 결심하고 안두희를 10여년 동안 추적, ‘65년 강원도 양구에서 육박전을 벌여 응징하기도 하였다. ’60년 국학대학(뒤에 고려대에 통합됨) 재학 때는 민족통일학생연맹 의장으로 4월혁명의 선봉에서 조국의 반외세 민족자주통일운동에 앞장섰으며 ‘75년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상임이사, ’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에서 인권위원장으로 재야운동에 투신하였다. 동지는 ‘88년 사월혁명연구소 기획위원장으로 민족민주연대투쟁에서 활약했고 ’98년 사월혁명회로 확대 개편 이후 공동의장과 조국통일위원장으로 자주․민주․통일의 사월혁명 완수에 헌신적 노력을 다하였다. 2000년 육순이 넘는 나이에 박정희흉상 철거와 박정희 친필 탑골공원 삼일문 현판 철거 그리고 박정희기념관건립반대 등 후배들에게 몸소 독립운동가로서 의사로서 통일운동가로서 열정적으로 우리 곁을 떠날 때까지 투쟁하였다.

 

권재혁 69.11.04 (당시 45세) 박정희정권 사회운동

동지는‘25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다. 해방직전 중학생 신분으로 사회주의계 독립운동 모임 장소 문지기를 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웠다.‘50년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56년 미국 유학을 떠나‘57년 10월 오리곤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에 전학하여 계속 박사과정을 밟았다.‘60년 4월 혁명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육사 경제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63년 6.3사태 후 ‘민주사회동지회’에서 이일재 선생 만나 노동자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동지는 노동자와 청년학생들을 살리기 위해 우리민족의 운명이 남의 손안에 있고 남의 군사적 보호 밑에서 유지되고 있는 것을 민족적 치욕의 극치라고 생각하고 남한 독자적인 노동자 중심의 정당을 건설하여 독재정권과 맞서야 된다는 생각에 동의하는 동지들과 조직을 만들어갔다. 또한‘68년 1월‘남조선해방전략당’문건을 작성하고 동학의 조직운영 형태인 접과 포의 형식으로 조직을 운영하였다. 중앙정보부 ‘통혁당’조사시에 동지가 준비 중인 조직이 중앙정보부에 알려져 소위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으로 조작이 되었다. 동지는 ‘남조선해방전략당’당수로 지목되어‘69년 11월 4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집행을 당했다.

 

권중희 07.11.16 (당시 71세)노무현정권 사회열사

동지는 1982년 백범 암살범 안두희가 잡지를 통해서 자신의 역적행위를 부인한 것에 격분하여 안두희에 대한 추적을 시작, 87년 대로상에서 ‘정의봉’으로 안두희를 응징하였고 이에, 구속, 출소한 이후에도 여러 차례 백범 암살에 대한 진상규명 운동을 진행하였다. 93년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자서전을 집필하고 2004년에는 미국정보당국의 백범 암살배후 근거를 찾기 위해 출국하기도 하였다. 출국 후 2월 1일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조사를 시작하였지만 주요내용이 파기되어 귀국, 그해 7월 민족정기구현회를 설립하였다. 2004년부터는 주한미군철수운동본부 고문, 6.15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고문 등 통일운동 일선에서 활동하였으며 2007년 11월 16일 자택에서 집필 중 운명하였다.

 

권희정 96.04.07 (당시 23세) 김영삼정권 학생열사

동지는 성신여대에 입학한 후 불교학생회 회장, 총학생회 활동을 하며 그 누구 못지않게 열정적인 활동을 해왔다. 동지가 총학생회 정책국장으로 활동하던 ’96년 성신여대 총학생회는 ‘예결산안 공개’, ‘등록금 소위원회 재개’ 등을 요구하며, 학원자주화투쟁을 시작하였다. 이에 학교 측이 학생들의 요구는 외면한 채 학생들에게 위협을 가하자 그 당시 총학생회 정책국장이었던 동지는 총학생회장과 함께 학원자주화투쟁을 승리로 이끌겠다는 각오로 학교 측이 즉각 협상에 나올 것을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을 시작하였다. 동지는 단식 도중 급격히 건강이 안 좋아진 상태에서 감기까지 걸려 가슴이 답답하다는 등의 통증을 호소하였으며, 급기야 4월 7일 새벽 1시경 고대 안암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지만, 밤 11시 30분경 갑작스런 심근염으로 운명하였다.

 

금진현 (자료없음)

 

 

김경숙 79.08.11 (당시 21세)박정희정권 노동열사

동지가 ’71년 광주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73년 서울에 상경하였다. 동지가 근무하던 YH무역은 ’75년 5월 노동조합을 결성하였다. YH무역은 1백만원의 자본금으로 불과 2년만에 노동자 400여 명, 1년 순이익 13억원이라는 한국최대의 가발업체로 성장하였다. YH는 민주적인 노동조합을 파괴하기 위해 ’79년 3월 30일 위장폐업을 단행하였다. 이에 맞선 노동조합의 투쟁은 1차 폐업을 저지 시켰다. 이후 동지는 노동조합 후생부 책임담당으로 헌신적으로 조합을 이끌어 나갔다. 8월 사측은 마지막 카드로 2차 폐업을 단행하였다. YH 노조를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각계인사가 신민당 총재와 면담하여 신민당에서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동지는 신민당사 농성 3일째 밤, 경찰의 폭력진압에 맞서 투신했다. 그리고 이 투쟁은 생존권을 짓밟는 악덕기업주를 처벌하기는커녕 정당한 폐업철회 투쟁을 벌이는 노동자들을 폭력으로 탄압, 동지를 죽음으로 내몬 군사독재정권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을 뿐 아니라 부마항쟁으로 이어져 마침내 18년에 걸친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도화선이 되었다.

 

김근태 (자료 없음)

 

김기설 91.05.08(당시 26세)노태우정권 사회열사

동지가 운동에 접하게 된 것은 ’88년 9월 성남 민청련 창립대회에서 김근태씨의 강연을 듣고서부터이다. ’91년 1월부터 전민련에서 사회부장으로 일하게 된 동지는 궂은 일, 드러나지 않는 일을 도맡아 했다. 속초 동우전문대 사건이 터지자 누구보다 먼저 현장에 달려가 외롭게 투쟁하던 학생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또한 노동자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신뢰를 갖고 있던 동지는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곁에서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며 헌신적으로 그 일에 뛰어들어 원진레이온 사태가 사회 쟁점화 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노태우정권의 반민주적, 반민중적, 반민족적 폭압을 새삼 인식하였다. 동지는 강경대 동지의 죽음 이후 범국민 대책회의에 참가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던 중 분신을 결행하였다

 

김기욱 02.04.02(당시 39세) 김대중정권 노동열사

동지는 대우종합기계(전 대우중공업)에 입사해 ’87년 노동자대투쟁을 경험하면서 노동자라는 존재가치를 알게 되었고 오랜 기간 노동조합 간부로서 열성적인 활동을 했다. 노동문화운동이 노조운동의 일부가 아니라 독립된 영역이길 바랬던 인천 노동문화일꾼들의 노력으로 인천노동자 노래패 연대체계는 차츰 독자적인 사업을 창조해 나갔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동지는 ‘노둣다리의 일원으로서, 인천 노동문화연대체계의 대표로서 활동했다. 이런 노력 속에서 인천의 노동문화운동은 전국적으로 모범이 되기도 했으나, 동지의 업무는 늘 과중돼 있었다. 동지는 간암말기라는 판정을 받고 투병생활 중 운명하였다.

 

김남식 05.01.07(당시 81세) 노무현정권 사회운동

동지는 충남 논산에서 '25년 태어났다. 일제하 향리에서 중등교육을 받고 해방 후에는 진보진영에서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휴전 후 고등교육 과정을 마쳤으며 고려대 아시아문제연구소, 통일부, 국제문제조사연구소, 평화연구원 등에서 현대사와 통일 관련 연구활동을 했다. 이러한 과정은 그야말로 순경(順境)과 역경(逆境)의 반복의 연속이었으며 결코 순탄한 생활이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역사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반드시 바르게 발전해 가리라는 확신 속에 항상 낙관주의적 삶을 추구해 왔다. 이러한 삶의 과정에서 현대사와 관련된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글을 쓸 수 있었다. 또한 '00년에 인터넷 신문 「통일뉴스」상임고문을 맡아 6.15남북공동선언이 열어준 공간에서 통일뉴스를 통해 많은 논문과 칼럼 등을 기고했으며, 또한 국내는 물론 일본에까지 수많은 강연을 다녔다. 숱한 저술과 강연, 그리고 대담과 대화를 통해 일관되게 '민족주의'와 '민족 자주권'을 설파. 옹호해 왔다. 6.15공동선언 이후 발표한 글과 강연록 등을 모아 「21세기 우리민족 이야기」(2004)를 펴냈다. '05년 1월 「21세기 우리민족 이야기」 일본어판 번역을 위해 일본을 방문했다가 심장마비로 운명하였다.

 

김남준 02.01.18(당시 36세) 김대중정권 사회운동

동지는 여주지역에서 민중정치연합, 진보정치연합 여주대표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민중후보로 출마하였다. 우리문화연구소와 민예총 여주지부 사무국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이천노동상담소 활동 중 운명하였다.

 

김말룡 96.10.03(당시 69세)김영삼정권 사회운동

동지는 전두환 등의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6차례의 구속을 당하는 등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의 산 증인이다. 특히 정치깡패들의 위협으로 죽음의 고비를 넘긴 적도 수없이 많으며, 5.16 쿠데타, 5.18 쿠데타와 같이 민주주의가 유린되는 상황에서 구속 등 온갖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동지는 8차례에 걸친 투옥에도 굴하지 않고 이 땅의 노동자 권리를 위해 초지일관 싸웠다. 자유당 치하인 50년대 말 노총개혁의 깃발을 들고 앞장서서 투쟁하면서 민주노조운동을 주도했고, 4.19 혁명 이후에는 노총 위원장직을 수행했다. 이후 가톨릭 노동상담소와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에 재직하면서 노동자들과 서민 대중의 권리향상에 헌신한 명실상부한 ‘한국 노동운동의 산 증인’이었다. 특히 14대 국회 동안 환경노동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보여준 의정활동과 노동자의 권리 향상을 위한 헌신적인 자세는 전국의 노동자들에게 깊은 감동과 존경을 모아왔다. 또한 ’94년 벽두를 뜨겁게 달구었던 국회의원 ‘돈봉투 사건’은 동지의 결단이 아니었다면 단순한 관행으로 넘어가고 말았을 사건으로 동지의 일관된 정의와 용기를 한눈에 볼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동지는 그러던 중 ’96년 10월 3일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운명했다. 동지는 사망 전날 민주노총 투쟁본부 회의에서 밤 10시까지 각 단사 위원장들과 함께 노동법 개정문제와 관련한 회의를 갖기도 했다.

 

김미영 07.03.26 (당시 38세) 노무현정권 노동열사

동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노동자의 길로 들어선 이래 믿음직한 여성노동자로, 밝고 당찬 성정으로 세상의 차별과 맞서 싸웠다. 사회적으로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비정규직 차별과 저임금으로 고통받는 여성노동자의 열악한 노동현장을 발로 뛰면서 조직하고 열성적으로 노동조합 활동을 하였다. 동지는 전국여성노조 인천지부 사무국장으로 조합원의 근황과 고충처리에도 앞장서는 등 역할을 충실히 하여, 조합원과의 조직을 견고히 유지하며 진정한 노동운동가로 성장하였다. 특히, 학교비정규직의 정규직화 투쟁과, 열악한 청소 분회의 근로조건 개선 교섭투쟁은 뛰어난 선동력과 현장지도력을 발휘하여 단단한 조직을 만들어내며 노조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 바쳐 살아왔다. 그러던 중, 동지는 조합 활동을 하다 쓰러져 영영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동지를 아끼고 사랑하는 많은 이들의 아픔 속에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김병곤 90.12.06(당시 37세)노태우정권 사회운동

’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사건으로 군사법정에서 이철, 유인태, 김지하 등과 함께 21세의 가장 어린나이로 구속되어 사형이 구형됐으나 동지는 최후진술 첫마디에서 사형이 구형된 것에 대해 “영광입니다”라고 외침으로써 많은 감동을 줬다. ’87년 12월 구로구청사건으로 구속되어 교도소 생활을 하던 중 건강에 이상을 느껴 교도소와의 싸움 끝에 외래진료를 받았으나 진행성 위암3기로 판명돼 ’88, ’89년 두 차례의 수술을 받았으나 ’90년 12월 6일 오랜 투병생활 끝에 그토록 바라던 민주세상을 보지 못한 채 운명했다.

 

김봉환 91.01.05 (당시 52세) 노태우정권 노동열사

동지는 '77년 원진레이온에 입사하여 갓 태어난 딸과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였던 성실한 노동자였다. 그러나 입사 후 차츰 몸이 쇠약해지더니 급기야 CS2 중독 초기증상인 두통과 소화불량, 손발이 저리는 등 여러 증상으로 '83년 원진레이온에서 퇴사하였다. 그 후 건물 경비 등으로 생활을 꾸려 나가던 중 두통, 마비증세에 시달리다 '89년 쓰러져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하고, 원진레이온의 직업병 문제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자 자신의 병이 원진레이온 근무시절 생긴 것이 아닐까하여 '90년 10월 진료를 받아본 결과 '이황화탄소 중독의증 및 고혈압'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동지는 자기의 병이 직업병임을 알고 원진레이온 회사 측에 산재요양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회사 측은 '이황화탄소 중독의증 및 고혈압'이라는 진단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지가 근무하던 원액 2과가 유해부서가 아니라는 이유로 절대로 요양신청을 해줄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동지는 노동부에도 산재요양신청 허가를 요구했으나 노동부는 회사를 두둔하며, 접수조차 거부하였다. 동지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적인 싸움으로 마침내 '91년 1월 5일 노동부로부터 요양신청서를 접수하라는 통보를 받았으나, 바로 그날 운명하였다.

 

김상옥 94.02.19(당시33세) 김영삼정권 노동열사

 

 

김상원 86.05.26 (당시 33세)전두환정권 노동열사

동지는 ’86년 3월 10일 근로자의 날을 맞아 당시 영등포 산업선교회에 집결해 있던 노동자들이 영등포로터리까지 진출해 벌이던 대규모 노동자 가두데모 직후 경찰관들이 비상 순찰 중이던 상황에서, 집으로 가던 중 불심검문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중앙파출소로 불법적으로 강제 연행되었다. 중앙파출소에서 그곳 소속 경찰관들로부터 전신을 폭행당하여 피투성이가 되어 식물인간이 된 채 영등포경찰서에 의해 영등포 시립병원에 행려환자로 위장, 입원되었다. 영등포경찰서 및 중앙파출소 경찰관들의 철저하고도 조직적인 은폐아래 중환자실에서 77일간을 신음하다 5월 26일 33세의 젊은 나이로 운명하였다.

 

김성수 86.06.21 (당시 18세)전두환정권 학생열사

동지는 ’86년 3월 서울대에 입학한 이후 지리학과 ‘철학인의 모임’에서 활동하였으며, 총연극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사회과학 세미나를 하고 정부비판적인 연극에 참여하였다. 또한 각종 집회·시위 등에 참여하는 등 시위 중 두 차례 연행되었다가 훈방된 일이 있었다. ’86년 6월 18일 자취방으로 걸려온 정체불명의 사람의 전화를 받고 집을 나간 후 행방불명되었고, 그 후 3일이 지난 6월 21일 부산 송도 앞바다 방파제 앞 바다 속에서 바위틈에 세 개의 시멘트 덩어리를 달고 눕혀져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이 해녀에 의해 발견되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당시 매달려 있던 콘크리트 덩어리는 직접 물에 가지고 들어가기는 매우 어려워 사망 또는 의식불명 상태에서 타의에 의해 수장되었을 개연성이 상당하다고 밝혔다.

 

김순조 01.05.18 (당시 36세) 김대중정권 노동열사

삼양통상에서 노조민주화투쟁을 하다 해고를 당한 동지는 그 과정에서 만난 동지들과 함께 안양지역노동자회 활동을 시작했다. 그 뒤 현장에서 산재사고로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가 있었지만 안산으로 이전하여 ‘안산 한벗 노동자회’, 노동자 산악회 ‘산을 찾는 사람들’, 안산지역 노동자 축구단 ‘해맞이’등 안산지역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통일투쟁에 앞장섰다. 동지는 이후 태양금속에서 세 번째 해고당한 뒤 창흥정밀에 입사하여 노조민주화를 위해 앞장섰다.

세 번이나 되는 해고투쟁 속에서도 꿋꿋하게 동지를 일으켰던 것은 “공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랑하는 동지들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동지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김시자 96.01.13(당시 35세) 김영삼정권 노동열사

동지는 ’89년 한국전력 한일병원지부장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어용노조 퇴진, 노조간부정년연장 무효와 등 한국전력노조 민주화에 앞장서왔다. 작지만 단아한 용모에 언제나 순박한 웃음을 띤 동지는 노동조합의 일이라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헌신적으로 일해 나가면서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순리적으로 하나씩 문제를 차근차근 풀어나갔던 노동자였다.

어용노조 집행부는 ’96년 1월 7일 ‘규약위반’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사유를 내걸고 징계위원회 개최와 출석을 통보하였다. 그리고 1월 12일 오후 2시경, 경주 보문단지내 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한국전력노조 54차 중앙위원회 첫 번째 안건으로 김시자 동지와 오경호 동지(광주전력지부 위원장) 2인에 대한 징계를 결의할 예정이었다.

어용노조 집행부의 짜여진 각본대로 징계가 이루어지기 직전, 동지는 변론을 통해 “징계는 부당하다”,“이런 선례를 남겨서는 안 된다”,“이런 상태로 그냥 있으면 노조 민주화는 이루어지지 못 한다”는 말을 남긴 채 아무도 모르게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동지는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은 채 불덩어리가 되어 회의장 안으로 뛰어 들어 부당함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하였다. 분신 후 병원에 이송하였으나 ’96년 1월 13일 새벽 3시 4분에 운명하였다.

 

김애정 13.03.24 (당시 36세) 박근혜정권 사회열사

비정규직 노동자였습니다. 00의료원 중앙공급실 비정규직 노동자. 8년을 일했지만, 재계약에 재계약을 했지만 끝내 정규직이 되지 못하고 아웃소싱되어 아르바이트로 전환된 비정규직 노동자. 청년회에서 노동인권 교육을 진행할 때 청년회 회원들에게 그래도 난 노동자여서 자랑스럽다 말하며 열심히 설명하는 노동자. 고용 계약서를 쓰지 않아 자신이 정규직인지 비정규직인지 모르는 회원에게 이것저것 꼼꼼히 설명하며 권리를 설명하는 노동자. ‘전 청년운동보다 노동운동하면 더 잘할 것 같지 않아요?’하며 천직을 찾았다며 웃던 동지. 청년운동이 끝나면 학교비정규직으로 들어가 다시노동자가 되고 싶다던 그 사람이 바로 김애정동지입니다.

 

 

김영자 93.09.11(당시 50세)김영삼정권 농민운동

동지는 ’66년 서울대 농대 농가정학과를 졸업한 뒤 정읍농고에서 후학양성에 힘을 쓰다가 ’69년 대학시절부터 고민해온 고된 농사일과 봉건적 억압에서 고통받고 있는 여성농민의 권익향상을 몸소 실천하기 위하여 상계동에서 비닐하우스 시설원예 농사를 시작하였다.

이로부터 동지는 농업을 살리고 예비농업인의 실습터이자 농업기술지도소, 나아가 예비농민들의 어머니로서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시작하였다. ’75년 지역에서 지역탁아소와 어머니 자치활동으로 작은 공동체의 모범을 만들었고, ’77년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가톨릭농촌여성회’ 설립에 산파역할을 했으며 초대회장을 역임하였다.

가농여회는 ’85년 가톨릭여성농민회로 성장하였고 동지는 다시 회장을 맡아 열성적인 활동을 하였다. 이후 동지는 성남에서 지역운동을 지도하여 각종 연합단체의 공동대표로, ’80년 민주화운동을 지도하였다. 이후 전국여성농민회 경기도 총무를 역임하였다. 노태우군사정권에서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남편이자 동지인 김준기 선생의 뒷바라지와 자녀교육 등으로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90년 성남 ‘큰우리 소비자협동조합’ 이사장으로 농촌운동과 생협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93년 동지는 갑작스런 위암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93년 9월 11일 운명하였다.

 

김용갑 90.03.28(당시 24세) 노태우정권 학생열사

동지는 동우전문대 입학해, 대학신문사 기자로 활동하면서 도서관문제 등 학내문제에 관심을 갖고 취재 활동을 했고, 편집자율권을 요구했으며, ‘동우학원민주실천위원회’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동우전문대학(이하 동우대)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 가입을 추진하였다. 동지는 ’89년 11월경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된 후, 장학금 및 부동산투기 등 재단비리를 밝히기 위하여 학내집회를 여는 등 재단비리문제 해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동지는 ’90년 3월 27일 오후 3시부터 오후 11시 25분까지 학생들과 술자리 후 속초시 도로공사연수원 앞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90년 3월 29일 학교 폭력배 문종석은 자승용차로 치어 사망했다고 자수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대학교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폭력학생들로 하여금 민주화운동권 학생들에게 학내비리와 부실한 교육여건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폭력을 행사하고, 협박을 가하도록 했으며, 대가로 폭력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고, 사망 당일 학교 측이 골치 아파하는 총학생회 발대식 예정일이서 사망의 원인이 된 교통사고에 학교 측이 개입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아직도 동지의 ’90년 3월 28일 새벽 1시경부터 새벽 2시경까지의 행적은 전혀 밝혀내지 못하였다.

 

김종배 99.08.27 (당시 36세) 김영삼정권 노동열사

동지는 ’82년 성균관대학교 역사교육과에 입학하여 학생운동을 시작하게 되면서 사범대 학생회장으로 교생실습비 비리를 밝혀내는 투쟁, 전방입소거부투쟁을 주도적으로 이끌기도 하였다. 동지는 이후 ’86년 7월 민민투 검거 때 징역을 살고나와 ’87년부터는 노동현장으로 뛰어들어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발을 내딛게 되었는데 길지는 않았지만 여러 노동현장을 거쳐 ’89년 YMCA 노동교육실에서 활동하였고 ’90년부터 전노협 조직·쟁의·총무·조사통계·정책국 등에서 활동하였다. 동지는 전노협과 동지를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다. 치열한 현장 투쟁과정에서 ’86년에는 집시법 위반으로, ’91년 5월에는 ‘박창수열사 옥중살해 진상규명’ 투쟁으로 구속되기도 하였고, ’97년에는 공공연맹준비위, 공공연맹에서 정책국장·대외협력국장, ’99년 3월부터 통합 공공연맹에서 교육국장으로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99년 8월 27일 불의의 사고로 동지들 곁을 떠났다.

 

김종수 89.05.04(당시 23세)노태우정권 노동열사

서광노동조합은 ’88년에 부평과 구로의 통합대의원대회를 열었고, 이때 선출된 부평공장 출신 위원장은 구로지부 집행부를 꾸리지 않았다. 이에 구로지부 조합원들은 조속히 꾸릴 것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5월 3일 회사 측과 협상한 결과 ‘쟁의기간 임금 90%이상 지급,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노조간부 3인에 대한 징계처리를 최대한 가볍게 한다’고 약속하였으나 다음 날에 약속을 번복하여 협상이 결렬되었다. 당시 쟁의부장이던 동지는 이에 격분하여 “민주노조 사수하자” “셋방살이 노동자의 서러움은 싫다” “동지들을 처벌하지 말라”고 외치며 분신하였다. 동지는 이날 밤 11시 30분경, 차마 눈을 감지도 못한 채 공안정국의 ‘무노동 무임금’ 논리와 회사, 본조의 지부탄압에 온몸으로 항거하며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갔다.

 

김종하 89.09.15(당시 28세)노태우정권 노동열사

동지는 ’85년경에 인천 서구 경동산업에 입사하여 일하면서 ‘디딤돌’이라는 노동자 친목 모임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국면에서 8월 17일부터 30일까지 2주간에 걸쳐 사측의 노동법을 무시한 해고와 부서 이동, 일방적인 단체협약 체계 관행에 항의하여 완강한 파업투쟁을 전개하였으나 사측은 경찰을 동원하여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8명을 구속하고 500여명을 일방적으로 해고하였다. 해고자들은 ’89년 8월 31일부터 부당한 징계철회를 요구하며 농성을 하였다. 사측은 농성자들의 대화요구를 거부하고 매일같이 구사대 200여명을 동원하여 폭력을 자행하고 해고자들의 가족까지 짓밟았다. 해고자 3명이 부평에서 연행당한 상황에서 9월 4일 3시경 사측은 경찰과 200여명의 구사대를 동원 강제 해산시키고자 하였다. 강현중 동지가 나와 같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은 오른편에 싸우다 감옥에 갈 사람은 왼편에 서라며 죽음을 각오한 투쟁을 결의하자 동지는 태극기를 목에 두르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절을 하고 어머니의 노래, 애국가를 다함께 불렀다.

동지와 김종하 동지 등 3명은 함께 본관3층 징계사건의 주모자인 이사실에 들어가 마지막 담판을 하려하였다. 하지만, 징계를 받지 않으면 구속시켜버리겠다는 뻔뻔스런 대답에 동지는 이사를 잡고 불을 켜 분신 항거하였다.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던 동지는 9월 15일 오전 9시 반경 운명하였다.

 

김주현 (자료 없음)

 

김진균 04.02.14 (당시 67세) 노무현정권 사회운동

행동하는 지성의 표본, 진보적 학술운동과 민주적 교수운동의 대부, 민중운동의 한복판에 선 민중의 벗’ 동지는 이렇게 불렸다. 동지의 학문적 관심은 민족적, 민중적 사회과학을 일구는 것이었다. 동지는 민족과 계급이라는 두 개념을 버팀목으로 하여 비판적인 노동·조직·산업사회학을 구축하는 데 힘썼다. 동지는 ’80년 전두환 군사정권에 의해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수난은 동지를 조직가·실천가로서 변모시키는 자양분이 되었다.

’82년 문을 연 개인연구실인 ‘상도연구실’은 산업사회연구회로 성장하며 당시 진보학술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80년대 후반 이후 진보적 교수운동과 학술운동의 큰 틀로 자리잡은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와 ‘학술단체협의회’의 창립과 발전에도 동지의 노고가 컸다.

동지는 전노협·민주노총·사회진보연대·진보네트워크센터·전국민중연대 등의 고문 또는 대표로 일하며 민중운동의 든든한 버팀목 구실을 하였다. 동지는 ’80년대 이래 기층 민중운동단체들에 대한 든든한 후원자였다.

동지는 사회의 약자들에 대한 변치 않는 사랑을 남은 이들에게 부탁하며 먼 길을 떠났다.

 

김진수 71.05.17 (당시 22세) 박정희정권 노동열사

당시 (주)한영섬유는 서울시에서 할당한 수출 초과달성으로 많은 이윤을 남겼으나 노동자들에게는 수건1장이 고작이었다. ’70년 12월 28일 점심시간 식당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사측은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공장가동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위장폐업으로 노동자 200명을 해고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사측은 동지를 말 안 듣는 노동자로 분류하고 주시하였다. 매수된 구사대는 3월 18일 오후 3시경 일과시간 중 만취상태로 동지와 동료를 폭행했으며, 노조 일을 적극적으로 하던 동지를 불러 노동조합 탈퇴를 강요하였고 이에 불응하자 드라이버로 머리를 쳐 의식을 잃게 만들었다. 병원에 이송된 동지의 상황에 대하여 제대로 의사에게 알려주지 않고, 사건을 숨김으로서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고 동지는 5월 17일 운명하였다.

 

김처칠 91.08.22 (당시 35세)노태우정권 노동열사

’90년 8월부터 시작된 합동물산 노동조합의 지도급제 철폐 투쟁은 1년여의 과정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었다.

악덕 기업주의 파렴치한 부당노동 행위에 맞서 굳은 결의와 동지애로 노조를 이끌던 동지는, ’91년 7월 10일 차고지가 없어 성산대교로, 그리고 장마로 인해 다시 양화대교 다리 밑으로 이전하면서 택시 노동자의 권익과 생존권을 위해 하루 세끼 밥도 먹지 못한 채 한 달여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자리를 비우지 않고 선봉에서 온몸을 아끼지 않고 투쟁하였다. 또한 각계와 언론사들을 돌아다니며 업주의 부당함과 파업투쟁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조합원들이 생계투쟁을 나간 뒤 일부 간부들만 남은 상태에서 한강에 투신하였고, 행주대교 근처에서 시신을 인양하였다.

 

김태환 05.06.14 (당시 39세)노무현정권 노동열사

동지는 “세상의 정의가 서지 않는다면, 차라리 이곳에서 모든 것을 묻으리라”는 마지막 글을 남길 만큼 평소 노동자들을 위해 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였다.

수안보파크호텔노조를 설립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한국노총 충주지부장으로 지역연대투쟁에도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다. ‘05년 충주지역레미콘 노동자들은 노동3권 보장과 운송단가 인상 투쟁을 진행하였으나 교섭은 파행을 거듭하였고 사측은 대체차량을 투입하였다. 동지는 이에 항의하며 충주레미콘노조 및 충주지역 노동자와 함께 “레미콘노동자 노동자성 인정과 운송단가 인상, 단체협약 체결을 위한 결의대회”를 개최하고, 충주사조레미콘 회사 앞으로 이동해 특수고용직 노동3권 보장 요구와 파업 중 대체근로 투입에 항의하며 대체차량을 온몸으로 막았다. 그러나 사측과 경찰 공권력은 차량을 가로막던 동지에게 돌진하여 무참히 짓밟아 버렸다. 동지의 죽음은 800만 비정규직 노동자와 특수고용직 노동자의 비참한 삶을 전 사회에 알려냈다. 

 

김헌정 10.05.04 (당시 47세)이명박정권 노동열사

동지는 진정한 혁명가이자 노동해방을 위해 끝까지 싸워나간 시대의 표상이었습니다.

고인의 열정은 늘 활화산처럼 타올랐고 그 뜨거움은 동지들에게는 늘 어두운 밤 광대한 평야를 밝히는 등불이었으며 적들에게는 지옥의 불구덩이 보다 무서운 불길이었습니다.

고인의 영민함은 늘 동지들의 자랑이었고 믿음이었습니다. 하여 우리는 패배를 두려워하지도 않았으며 승리의 길이 어떤 것인지 고인을 통해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누구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오로지 신념과 끝 모를 투지로 헤쳐 나갔고 고인의 초인적인 노력과 투지 속에서 노동자들은 새로운 삶과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되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세상의 이치라는 것이 누군가의 기쁨과 행복이 있기 위해선 그것을 위해 분투하는 다른 누군가의 피눈물과 고뇌가 따르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초인적인 노력과 투지라는 것은 어쩌면 그만큼 다른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었는지 문득 돌아보게 됩니다.

동지가 우리와 함께 한 수 십 년의 삶이 우리에게 해방과 자립의 길이었던 만큼 어쩌면 동지에게는 그만큼의 초인적인 고뇌와 고통의 삶은 아니었는지 그래서 그것이 고인의 몸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하면 가슴이 하염없이 무너집니다.

 

김현준 (자료 없음)

 

남현진 91.02.03 (당시 22세) 노태우정권 학생열사

동지는 ’88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에 입학하여, ‘민족사상연구회’와 영어과 학회 활동을 하며, 5공화국 비리 척결, 노동운동 탄압중지, 통일선봉대 활동 등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서 실천하였다. 또한 총학생회 간부로 활동하면서 외대 운동권의 정책방향 수립과 각종 집회 시위의 실무를 담당하는 등의 역할을 하였다. 당시, ‘임수경 방북사건’을 계기로 공안기관으로부터 한국외대 학생운동권은 표적이 되어 있어서, 동지도 학내의 핵심적인 학생운동권이었기 때문에 내사나 수사대상이 되었을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태였다.

’90년 11월 동지는 군에 입대하여 군복무를 하던 중, 2월 3일 경기도 소재 소속부대 쓰레기장 부근 철조망 울타리 밖 인근 야산에서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맨 상태로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사망 전 부대 지휘관들이 학생운동 전력 사실을 알고 관찰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헌병대가 사망사고 현장과 목을 맨 끈의 출처를 조작한 개연성이 높고 선임병이 구타한 사실과 구타에 의한 상처가 났으며, 사건 당일 점심 전후로 구타당한 사실을 확인했다. 사망 현장인 야산에서 구타했을 가능성과 기무부대의 관찰 가능성은 자료부족 등으로 확정하지 못하였다.

 

도강호 09.01.15 (당시 74세) 이명박정권 사회운동

1935년 5월 30일 경북 성주군 월항면 용각동 묵산 출생

1957년 동아대학교 사학과 입학

1959년 동아대학교 학보사 기자, 동아대 사회과학연구회 활동

1960년 4월혁명 동아대 주역으로 참여, 동아대 학내민주화운동 주도, 후진성극복학생연구회 활동, 동아대 학내민주화운동 관련 제적

1961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민족통일학생전국연맹 활동, 민통련 활동 관련 구금

1972년 공안사건 구속

1997년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 상임의장,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부의장

1998년 사월혁명회 상임의장

2009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고문

사월혁명회 감사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 고문

2009년 1월 15일 원광대 산본병원에서 운명

동지의 삶과 죽음

 

4월혁명 참여. 범민련 등 평생을 통일운동에 헌신하다 운명

 

류정하 91.08.03 (당시 25세) 노태우정권 학생열사

동지는 전남 고흥에서 출생하여 ’86년 신구전문대에 입학하였다. ’90년 총학생회 총무부장으로 활동하며 학내 민주화 투쟁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동지의 역할 때문에 학교에서 제적되었고, 학원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의 학교 측의 기만적인 모습 때문에 혈서와 삭발로 항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학내 백골단의 새벽 침탈로 9명의 동지들과 함께 구속된 뒤 출소한 동지는 수련회 도중 고재욱 동지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고 구하기 위해 물속으로 뛰어 들어갔으나 심장마비로 운명하였다

 

류한림 12.03.24 (당시 48세) 이명박정권 사회열사

약력 1965. 3.1 충북 충주시 성내동 159번지 출생 1983. 3 충주대학교 입학 1995~1996 (주)신도개발 설립 2007~2011 인천 대왕조경 근무 2008. 3 ‘안티 이명박’(이명박 탄핵 범국민운동 본부) 카페 서울지부장

 

문성환 (자료 없음)

 

문송면 88.07.02(당시 15세)노태우정권 노동열사

‘87년 12월 영등포 소재 협성계공에 입사한 동지는 불과 2개월 만에 수은중독증상을 보여 6개월의 투병 끝에 사망에까지 이르게 됐다. 고향 충남 서산에서 상경한 동지는 야간고등학교를 갈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이 회사에 들어와 하루에 11시간씩 압력계 커버의 신나세척, 페인트칠, 온도계의 수은주입 작업을 했다. 이러한 작업과정에서 수은이 새어나와 작업장의 공기가 수은증기로 온통 뿌옇고 바닥에도 액체가 된 수은이 널려있는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노동부는 형식적인 개선명령만 내려놓고 어떠한 실질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작업 중에도 불면증, 두통, 허리와 다리의 통증 등의 증세가 나타났으나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전신발작으로 악화된 후 4군데의 병원을 전전하고서야 서울대병원에서 수은 및 유기용제 중독 진단을 받았다. 이 진단에 따라 가족들은 4월 7일 노동부에 산재요양신청서를 냈으나 회사의 방해에 놀아난 노동부는 10일 만에 산재요양신청서를 반려하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이 일이 신문을 통해 알려지면서 6월말에야 요양승인이 나왔으나 산재지정병원으로 옮긴지 이틀 만에 동지는 운명했다. 당시 동지의 나이는 만 열다섯 살이었다. 

 

문익환 94.01.18(당시 76세) 김영삼정권 사회운동

동지는 한마디로 암울했던 과거 군사정권 시절을 거치며 줄곧 재야 민주운동을 주도해 온 정신적 지주였다.

성직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종교적 분위기에서 성장했고 사회진출 후에도 평범한 목회자로서 신학대 강단에 섰던 동지가 유신정권의 압제에 분연히 맞서 민족민주운동에 첫 발을 내딛은 것은 지난 ’74년 10월 반유신 재야단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가하면서 부터였다. ’89년초 전민련의 출범 후에는 전민련 고문을 맡는 등 재야운동의 대부로서 큰 업적을 남겼다. 동지는 ’89년 3월 통일문제를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직접 논의하기 위해 방북하였다.

이 사건은 통일을 구두선처럼 외치면서 실제로는 탁상공론만 일삼았던 당시 정부 당국자들을 준엄하게 꾸짖고 또한 민족의 통일의지를 온 민족에게 호소하기 위한 의거였다.

동지는 기회만 있으면 ‘분단 50년 이내에 통일을 이루지 못하면 분단이 고착된다’며 통일운동에 남다른 집념을 보였다. ‘통일은 됐어’라고 힘주어 외치던 동지는 유신의 압제에 분연히 맞서고 이후 치열한 반독재 투쟁과 통일운동으로 일관해 오신 민족의 큰 별이었다.

 

민병일 97.02.15(당시 39세) 김영삼정권 빈민운동

주거환경개선과 주택공급의 명분 속에서 진행되던 택지개발사업지구에 살던 동지는 그 택지개발사업으로 삶의 자리를 빼앗기고 쫓겨나야 한다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95년부터 투쟁의 대열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주택철거로 인해 어려워져가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노점에서 닭꼬치장사를 해왔다. 그러던 ’97년 2월 2일 관할 관청도 아닌 신갈파출소의 노점단속으로 동지는 장사도구를 빼앗겼고 그 장사도구를 되찾기 위해 경기 용인시 소재 신갈파출소에 찾아 갔다. 그리고 파출소 경찰관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해 두개골이 8cm가량 함몰되는 중상을 입었다. 곤봉에 맞아 뇌사상태에 빠져 있던 동지는 심각한 외출혈로 인해 자꾸 부어오르는 뇌의 혈액순환을 원활히 하기위해 두개골을 열어 놓은 처참한 상태로 산소호흡기로 숨을 쉬게 하여 생명을 유지하던 중 끝내 운명하였다.

경찰 측에서는 의경이 동지를 밀어서 다쳤다고 발표하였으나 정황이나 의사판단으로 보아서는 곤봉에 맞아 머리가 8cm함몰되었다는 것이 옳은 것으로 보여진다. 그간의 정황을 종합해 볼 때 이번 사건이 단순한 실수에 의해 저질러진 우발적 범죄라고 보지 않는다.

이것은 김영삼 정권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교사행위’이다.

 

박기래 12.01.13(당시 87세) 이명박정권 사회운동

고 박기래 선생은 1926년 전북 남원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1939년 일본으로 건너가 후지모토철공소 견습공으로 일하며 이마미야 직공학교를 다니는 등 주경야독 생활을 해왔다.

1945년 9월 귀국한 선생은 중앙대학 정치학과를 다니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의용군에 입대, 전투에 참여했다가 지리산에서 체포, 3년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60년 4.19혁명 당시 전국혁신청년동지회에서 활동했다.

이후 1972년 민주수호동지회 회장을 역임했으나 1974년 통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구속,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83년 무기로 감형, 1991년 출소, 17년간 복역했다.

선생은 출소 뒤 2000년 안산통일학교 교장, 2001년 평양 8.15민족통일대회 참가, 6.15안산본부 고문 등 경기도 안산시 지역에서 통일원로로 활동했다.

 

박동진 04.02.13(당시 42세) 노무현정권 노동열사

동지는 서울지역의료보험노조 창립 후 법규부장, 사무국장을 역임하며 열성적인 활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해고되기도 했던 동지는 복직 후에도 사회보험노조 서울본부장을 역임하며 노조활동을 벌였다.

’00년 6월, 박태영 이사장이 부임하여 노동조합에 무쟁의선언을 강요하고 노동조합의 반발을 악용, 공권력투입을 요청하여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하였으며 공단은 비리부패의 거대한 집단먹이사슬로 조직화되었다. 동지는 이러한 노조탄압에 반발하였고 9명의 동지들과 함께 해고칼날에 희생되었다.

부패비리구조의 정점에 있었던 박태영의 이임식을 저지하려 했고, 이 건으로 고발당한 동지는 긴긴 수배생활로 들어갔다. 해고된 후 40살 늦깍이로 시작한 동지의 신혼생활은 8개월만에 끝이 났다. 수배생활은 그 흔한 건강검진도 허락하지 않았으며, 고단한 수배생활과 출생도 보지 못한 아이와 아내에 대한 그리움은 동지의 정신과 육체를 갉아먹고 있었다. 고통에 지쳐 처음 병원을 찾은 것이 사망하기 바로 한 달 전이었다.

 

박래전 88.06.06 (당시 25세)노태우정권 학생열사

’80년 누이의 가슴팍을 도려내고 죄없는 민중을 난자한 학살원흉이 대통령으로, 국회의원으로 권좌에 앉아, 그 피묻은 손으로 ‘민주’를 떠드는 비극적인 땅! ‘명예회복-보상’ 운운하며 또다시 광주민중항쟁을 능욕하는 학살원흉 노태우와 ‘진상조사는 하되 처벌은 원치 않는다’는 보수야당이 피의 광주를 놓고 벌이는 정치야합과 88올림픽의 휘황찬란한 팡파레 속에 ‘환경미화’란 미명으로 이 땅 민중들의 생존권은 무참히 짓밟히고 있었다. ’88년 당시 숭실대학교 인문대 학생회장으로 활동하던 동지는 광주학살 진상규명과 분단올림픽 반대, 공동올림픽 쟁취, 6·10 남북학생회담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에 앞장섰다. 그러던 ’88년 6월, 민중해방의 신새벽을 앞당기기 위해 싸웠던 동지는 숭실대학교 학생회관 옥상에서 제 한 몸 불살라 학살원흉에게 민주의 불벼락을 내렸던 것이다. “저의 뒤로 저와 같은 죽음이 뒤따라서는 안됩니다”라는 절규로 우리 모두의 투쟁을 촉구하며 ’88년 6월의 불꽃으로 타올랐다.

 

박상윤 04.12.30 (당시35세) 노무현정권 노동열사

’87년 20살 나이에 6월항쟁 관련 시위로 구속되면서 이후 노동운동에 들어서게 됐다. ’88년 남북공동올림픽개최요구 시위로 두 번째 구속이 됐고, ’92년부터는 한국빠이롯트만년필에 입사하여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 활동을 전개했다. ’99년부터 본격화된 비정규·미조직 노동자 조직과 투쟁을 통해 상용직, 재능교사, 학습지, 보험모집인, 서울대시설관리, 한국통신계약직, 방송사비정규, 동부시장, 서울지역중소기업일반노조, 덤프연대 등 수많은 미조직·비정규노동자들의 조직과 투쟁에 헌신했다. ’02년 민주노총 서울본부 사무처장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04년 12월 30일 운명하게 될 때까지 쉼 없는 활동으로 인해 5년째 내리 건강악화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했다.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에서 사람을 중심에 놓지 않고 분열하는 모습을 참으로 안타까워했다. 이렇듯 자신을 돌보지 않고 운동에 헌신하던 동지는 참으로 따뜻한 사람이었다.

 

박영재 (자료 없음)

 

박영진 86.03.17 (당시 26세) 전두환정권 노동열사

동지는 어린 시절을 중학교를 중퇴할 정도로 어렵게 살아왔다. 그러나 동지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23세 되던 해, 야학을 다니면서 진실의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후 시흥에 있는 동도전자에 다니면서 노동자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단결된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동일제강에 입사해 민주노조 건설에 핵심적 역할을 해낸 동지는 신흥정밀에 입사했다. 신흥정밀은 당시 부당노동 행위 및 임금 착취에 대하여 조금만 항의를 해도 구타를 하고 욕설을 퍼부으며 해고시키는 무법천지의 회사였다. 동지는 동일제강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직 작업과 현장 실태 파악에 전력투구했다. 당시 여러 상황들이 동지를 힘들게 하였지만 동지는 노동자들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탁월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헌신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86년, 신흥정밀은 임금인상투쟁을 시작했고 공권력이 투입됐다. 그 과정에서 동지는 경찰과 회사 측의 폭력적인 탄압에 맞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살인적인 부당노동행위 철회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며 분신했다. 동지는 병원에서 동지는 “전태일 선배가 못다 한 일을 내가 하겠다. 1천만 노동자의 권리를 찾겠다.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라는 유언을 남기며 운명했다.

 

박용길 11.09.25 (당시 93세)이명박정권 사회열사

한 평생을 겨레의 평화로운 삶과 통일을 위해 노력한 동지는 ‘85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를 결성하였고,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등 소위 재야민주통일운동이 총 망라된 단체의 결성을 주도한 문익환 목사와 함께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민주화 운동을 펼쳐나갔다. 1995년엔 한반도 핵위기, 전쟁위기로 민족 앞에 크나큰 위협이 놓였을 때, 김일성 주석 사망 1주기를 계기로 북쪽 동포를 위로하고 남과 북에 평화와 통일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방북행을 택하였고 김주석 추도식에 참석한 후 판문점을 통해 귀환해, 옥고를 치루기도 하셨다. 이후 동지는 통일맞이, 민화협, 통일연대,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에서 활동하며 남북민간교류를 활성화며 한평생을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에 헌신하였다.

 

박윤정 08.11.28 (당시 32세)이명박정권 노동열사

민족민주 전사, 청년노동운동가 박윤정 동지는 한국학생운동에 자신의 이십대를 고스란히 바쳐왔다. 동지는 외대학보사, 한국외대언론협의회 의장, 한국외대 조국통일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서울동부지구총학생회연합,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집행간부로 수년간 학생운동에 헌신하였다. 동지는 우리민족끼리를 사상적 조직적 구심으로 받아 안고 조국의 자주민주통일을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도 마다 않고 투쟁해온 신념과 의리의 인간이었다. 동지는 침체와 답보, 나태와 안일을 증오하며 혁신과 창조를 사랑하고 패기와 열정에 넘치는 열혈청년 일꾼으로, 솔직하고 순수한 성품을 지닌 일꾼으로 동지들과 대중들 속에 기억되고 있다. 한국변혁운동이 발전하자면 청년세대가 노동운동에 뛰어 들어야 하며, 혈기왕성한 청년세대가 노동운동의 선봉에 서서 투쟁해야 한다는 것이 동지의 신념이었다.

2006년 오랜 학생운동을 마감한 동지는 노동운동가로 살기로 결심하고 민주노총 일꾼으로 일하였다. 민주노총 총무국, 선전국에서 활동하며 헌신적으로 투쟁하던 동지는 2008년 민주노총 전국노동자대회를 준비하던 중 급성 폐렴 증세를 보여 11월 12일 입원하여 보름간의 힘든 투병을 하다 11월 28일 끝내 숨을 거두었다.

 

박종철 87.01.14(당시 23세) 전두환정권 학생열사

동지는 서울대 언어학과에서 학생회장을 맡아 중심적으로 학생활동을 전개하다 ’86년 노학연대 투쟁에 참가하는 과정에서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시위로 구속되어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출소하였다. 출소 이후에도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동지는 ’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 의해 연행되었다.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추위’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 위해 동지가 연행된 것이다. 동지는 14일 오전 물고문, 전기고문을 받았고, 11시 20분경 중앙대 용산병원에 옮겨졌는데 의사가 검진했을 당시 이미 숨져 있었다. 경찰은 초기 발표에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터무니없는 얘기를 하며 발뺌을 하였으나 부검 결과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치안본부는 고문담당자를 축소은폐하고 가족의 허락도 없이 벽제화장터에서 시신을 화장해 버리는 등 증거인멸을 시도했다. 이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부영 전민련 상임의장과 천주교 정의평화구현 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에 의해 고문살인의 은폐사실이 밝혀지고 이로 인한 범국민적 투쟁의 결과 결국 치안본부는 고문살인의 은폐, 조작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태순 92.08.29 (당시 26세) 노태우정권 노동열사

동지는 이미 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사회과학서적들을 탐독하여 기초적인 사회인식이 되어 있었고, ’85년 3월 한신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한 후 재학 중 반독재 민주화운동, 노동자 권익을 위한 민중운동을 지향하는 언더 써클에 가입하여 각종 시위 등에 참가하였다. ’89년 5월 20일 수원지검 점거농성으로 인해 징역 1년 6월의 형을 선고받고, 출감 후 ’91년 2월 19일 군 입대 영장의 수취를 거부하고(’92년에도 입영거부), 소규모 영세사업장에 다시 위장취업을 하였으나 신분 제약으로 인해 노조 설립 등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고 병역기피와 비합법 조직운동으로 공안기관의 미행, 감시를 심하게 받게 되었다. 공안기관에 의해 추적당하던 중 ’92년 8월 29일 부천시 수영기계에서 퇴근한 후 행방불명되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과정에서 동지는 ’92년 8월 29일 당시 시흥역내 열차사고 사망자의 지문과 동일인으로 확인되었고 동지의 시신은 신원불명의 변사자로 분류되어 가매장된 후 용미리 무연고자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다가 ’02년 마석모란공원민주열사묘역으로 다시 안장되었다.

 

배동복 99.05.17 (당시 36세) 김대중정권 노동열사

1963년 5월 인천 출생 동인청중학교 졸업, 정석 고등학교 중퇴 1991년 롯데기공 입사, 풍물패 활동 1996년 8월 영창악기 입사 풍물패 ‘어울림’ 창단, 초대 회장 역임 1999년 5월 17일 사고로 운명

 

선경식 (자료 없음)

 

성완희 88.07.08(당시 29세)노태우정권 노동열사

동지는 ’87년 8월 동료 이기만씨와 함께 파업을 주동한 후 회사 측의 계속적인 탄압에 맞서 싸웠으며 ’87년 12월과 ’88년 2월 두 차례나 부당해고를 당했으나 동지와 그의 동료들의 헌신적인 투쟁을 통해 복직을 쟁취했다. 그러나 이기만씨가 자신의 복직투쟁을 도와준 혐의로 2월 2일 해고되자 자신의 일보다 더 열심히 복직투쟁을 전개했고, 결국 노동부와 지방 노동위원회에서도 복직판정과 복직명령을 받게 됐다. 그러나 강원탄광측이 이를 무시, 거부하자 6월 22일 이기만씨는 단식에 돌입했고 동지도 동료들과 함께 복직투쟁에 참여했다. 이기만씨의 생명을 건 단식 8일째인 6월 29일 “이대로 두면 우리의 이기만이가 죽는다”며 동지는 동료 5명과 함께 휘발유 1통, 석유 1통을 들고 노조사무실에 들어가 문 2개를 못질하여 폐쇄하고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12시반경, 두 차례나 문을 뜯고 창문을 깨고 구사대원들이 진입을 시도하자 동지는 “들어오기만 하면 분신하겠다”고 말하였으나 ○○○이 “할테면 해봐라”고 무시하며 쇠파이프와 각목을 들고 난입했고 동지는 휘발유를 끼얹고 성냥불을 그었다. 동지는 화염에 싸인 채 “부당해고 철회하라” “인권탄압 중지하라” “광산쟁이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 외치며 밖으로 뛰쳐나가 노조 앞 큰길에 쓰러져서도 “강원산업에 제발… 민주노조 좀… 건설해 주십시요”라며 절규했다. 동지는 온몸 75% 3도 화상을 입고 10일간 죽음과 싸우다 7월 8일 아침 7시20분 끝내 운명했다.

 

송광영 85.10.21(당시 27세)전두환정권 학생열사

동지는 중학교 졸업 후 평화시장 통일사에서 재단사로 일했다. 회사 재직 시에도 민중생존권 수호를 위해 활발한 노조 활동을 했다. 검정고시로 대학에 입학한 동지는 ‘실존주의 철학연구회’ ‘경제문제연구회’ 등 동아리를 창설하고 학원민주화와 반독재민주화를 위한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동지들의 모임에서는 언제나 광주학살에 대한 현 정권의 책임을 묻고 즉각 퇴진을 요구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85년 9월 17일 동지는 비가 내리는 중 몸에 불을 붙인 채 시커먼 연기를 뒤로 하고 달려 나가며 “학원악법 철폐하고 독재정권 물러가라!”,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민중생존권 수호하고 독재정권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질주하다 쓰러졌다. 주위에 모인 사람들에게 애국가를 불러 달라고 요청하여 주위에 모인 학우들이 혹은 울며 혹은 무릎을 꿇은 채 어깨를 걸고 쏟아지는 빗속을 뛰면서 그의 유언일지도 모르는 “학원 안정법 철폐하라, 민중 생존권 수호하라, 군부독재 물러가라”라는 시위를 벌였다. 동지는 9월 18일 병상에 찾아온 민주인사와 학생에게 “왜 오셨습니까! 오시지 말고 밖에서 싸워 주십시오. ” 라며 투쟁을 독려하였다. 동지는 10월 21일 새벽에 운명했고, 학교에 분향소를 설치하려고 했으나 경찰의 저지로 분향소를 설치하지 못하고 장례식 또한 경찰의 방해로 영결식 없이 묻히게 되었다.

 

송석창 03.08.04 (당시 39세) 노무현정권 노동열사

’03년 8월 4일 오후 8시경 동지는 근무하던 국민연금관리공단 남원지사 사무실에서 스스로 목을 매 목숨을 끊었다. 명확한 업무 기준도 없이 매월 3천 건에서 4천 건의 소득조정 업무와 납부예외를 공단으로부터 강요당하던 끝에 제도개선의 절규를 남긴 채 산화하였다. 국민연금관리공단은 소득조정업무와 납부예외자에게 소득신고 하도록 독려하는 업무(납부예외자 축소)도 같이 추진하였으며 더욱 심각한 것은 ’02년 연말부터 단기실적평가를 새로 도입하였다. 단기실적평가로 인하여 지사별 경쟁이 심화되면서, 지역가입자 자격담당직원들은 수천 건에 달하는 소득조정대상자 모두에게“보험료를 올리겠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보내고 특별한 이의가 없으면 곧바로 한꺼번에 보험료를 상향하는 파행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조합원들은 편법을 동원해서라도 실적을 올리라고 은밀하게 압박하는 관리자들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여, 상당한 부담을 억누르며 전산에 공단이 권장하는 신고기준을 입력하면서 살아왔다. 동지는 이에 대해 양심상 상당한 심리적 스트레스를 겪고 있었으나 해당지사장 등 몰지각한 관리자들은 ’03년 1월에만도 4천여 건, 6~7월에 3천여 건의 소득조정을 실시한 동지에게 무려 5천여 건의 대상 건을 모두 소화하도록 실정경쟁을 강요하는 데에만 열을 올리는 등 사지로 몰아내었다. 마침내는 극심한 업무부담으로 인하여 평소에 심리적 중압감에 시달리던 동지는 안타깝게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동지는 죽음의 순간까지 이 땅 노동자 농민 서민을 위한 국민연금제도를 걱정하며 이 땅을 떠났다.

 

송철순 88.07.17(당시 25세)노태우정권 노동열사

세창물산에서는 ’88년 6월 28일부터 임금인상과 어용 노사협의회 타도를 위한 싸움을 시작하였다. 회사 측이 휴업조치를 단행하자, 노조 사무장이던 동지는 열악한 근로조건 개선과 파업기금 마련을 위한 연대집회를 준비하던 중, 허술하기 짝이 없는 슬레이트 지붕 위에 현수막을 설치하기 위하여 작업을 하다가 지붕이 내려앉으면서 공장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후, 동지는 동료 노동자들과 이웃 노조원들의 안타까움과 분노 속에 결국 17일 밤 9시 45분경, 25세의 생을 마감했다. 다음 날 세창물산 건물 벽에는 동지가 걸어놓은 ‘사장 놈이 배짱이면 노동자는 깡다귀다’라는 현수막이 비에 젖으며 나부끼고 ‘노동자의 서러움, 투쟁으로 끝내자’라는 내용의 현수막이 채 걸리지 못한 채 지붕에 남아 있었다.

 

신길수 98.05.27 (당시 42세) 김대중정권 노동열사

동지는 동아엔지니어링에 입사하여 8년 동안 노조위원장을 지내며 공익노련 부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일하는 사람이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동아그룹 계열사였던 동아엔지니어링은 부채문제로 인한 계속적인 경영위기 속에서 IMF가 본격화 된 이후 상여금 삭감과 임금체불 등을 하던 중 급기야 ’98년 5월 9일 부도가 났다. 부도로 인해 퇴직금조차 받기 어려운 상태가 되어, 직원들의 생계는 나날이 어려워진 상황 속에서 동지는 생존권 사수를 위한 투쟁을 전개하며 5월 23일에는 노동자 종묘집회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5월 25일에 집을 나간 후 5월 27일 새벽, 집 근처 야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안동근 01.09.05 (당시 41세) 김대중정권 노동열사

동지는 ’94년 전국콘크리트믹서트럭협회를 결성하고 사무총장을 역임하면서 7여년간 전국을 순회하며 레미콘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쉼 없는 투쟁과 조직사업을 벌였다.

동지는 건설기계(믹서트럭, 덤프트럭)에서 자동차로의 이관 저지투쟁, 완전개별(실명)로 개별보험 가입 허용, 레미콘 운반단가(사용료) 산출 등 셀 수 없이 많은 투쟁들을 벌여 레미콘노동자들의 권익을 향상시켰다.

’00년 9월, 전국건설운송노동조합의 설립을 주도한 동지는 인천지부 사무국장을 역임하고 10월부터는 인천지역 레미콘노동자들의 노조인정을 위해 투쟁하였으며 ’01년 4월부터 전국레미콘노동자 상경투쟁을 주도하였다.

그러던 중 부천 유진레미콘 투쟁현장에서 회사가 사주한 용역 깡패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하고 이로 인하여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 후 완치되지 않은 몸으로 서울역 광장에서 있었던 전국건설운송노동조합 총파업 출정식에 사회자로 참석하기도 했던 동지는 증상악화로 서울대학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 41세의 젊은 나이로 운명하였다.

 

안치웅 88.05.31 (당시 24세) 노태우정권 학생열사

동지는 ’82년 3월 서울대 무역학과에 입학하여, 서울대 학술동아리 ‘대학문화연구회’ 등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83년 10월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유인물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같은 해 11월 3일 학생의 날 학내 시위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관악경찰서에 연행되었다. 또한 ’85년 6월 29일 구로공단 내 대우어패럴 근로자들의 농성에 참여하였다가 구속되어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위반죄’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김해교도소에서 수형 생활을 하다가 ’86년 7월 4일 만기 출소하였다. 북파공작 특수부대원이라는 박모씨는 “’86년 여름경 학생운동을 하였던 안치웅이라는 대학생을 납치·살해한 후 저수지에 수장했다”고 서울방송(SBS)에 제보하였으나, 박모씨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여 진위를 확인할 수 없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과정에서도 거의 진상규명이 되지 못한 상태이며 가족들은 아직도 애타게 동지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양갑세 10.12.29 (당시 36세)이명박정권 노동열사

충남 당진에서 태어난 양갑세 동지는 당진 상고를 졸업하고 동화은행에 입행하였다. 입행 후에 바로 사무금융연맹 동화은행 노조에 가입하여 조합원으로서 열심히 활동하였다. 특히 IMF 외환위기 상황에서 동화은행이 퇴출될 위기에 처하자 누구보다도 열심히 생존권 사수와 동화은행 회생을 위해서 투쟁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당시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해서 결국 동화은행은 퇴출되고 동지는 생존의 벼랑에 놓이게 되었다. 해고 이후 건설일용직 노동자의 삶도 살았다. 1999년 정릉신협에 입사하면서 금융노동자로서 제2의 삶을 살게 되었다. 정릉신협에서도 신협노동자로서의 고용안정과 권리 쟁취를 위해서 모범적으로 민주노조를 결성하고 초대 사무국장과 제3대 지부장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뿐만 아니라 민주노동당에 전 조합원이 함께 입당하여 지역중심의 노동자 정치세력화 사업에도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2010년 사측의 극심한 노동탄압에 의해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이후 이곳 마석모란 공원에 영면하였다. 항상 홀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효준이와 다연이를 사랑했고, 동지들에게는 언제 밝은 웃음과 따뜻한 마음으로 대했던 참 노동자였다.

 

양회성 09.01.20 (당시 58세) 이명박정권 빈민운동

본인이 직접 요리하며 일식당을 운영하던 양회성 열사는 두 아들과 함께 일식당을 꾸리며 살아가는 것이 소원이셨다. IMF로 인해 몇 차례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가족들과의 약속, 아들들과 이루고 싶었던 꿈을 생각하며 꿋꿋이 살아오셨다. 2004년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빚을 내어 용산국제빌딩 옆에 삼호복집을 차렸다. 새 출발의 기쁨도 잠시, 용산에 가게를 연지 이년 만에 재개발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5,6년은 더 걸릴 것 같던 개발이 벼락치기처럼 진행되면서, 철거용역 깡패들에 의한 행패가 시작되었다. 대책 없이 쫓겨나야 하는 상황에 맞서, 2008년 3월 전국철거민연합 산하의 ‘용산4지구 상공철거민 대책위원회’를 건설하여, 강제철거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셨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작한 전철연 활동을 통해, 자신의 생존권 문제를 넘어서, 잘못된 개발악법을 바꾸겠다는 열의를 다하셨다.

2009년 1월 19일, 양회성 열사는 구청의 외면과 조합과 용역의 폭력에 내몰리던 세입자들과 함께 용산 남일당 옥상에 ‘망루’를 짓고, “여기, 사람이 있다”, “대책 없는 살인개발 중단하라”, “철거민 주거,생존권 보장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점거농성에 돌입하였으나, 만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경찰특공대가 투입, 무자비한 살인진압과정에서 대형 화재참사가 발생하여 사망하셨다. 2010년 1월 9일, 355일 만에 치러진 장례 후에야, 이곳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엄성준 05.04.29 (당시 35세) 노무현정권 농민운동

농민운동가 故 엄성준 동지는 지난 4월 29일, 봄 농촌활동 준비를 위해 진천지역에 답사를 진행하러 온 성신여대, 서경대, 한성대 학생동지들과 함께 농민학생 연대사업위원회 회의를 마친 뒤, 저녁 10시경 진천을 떠나 학생 2명을 차에 태우고 숙소인 백곡면 갈월리 노신마을 마을회관으로 이동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진천에서 백곡으로 향하는 34번 국도 중 급격하게 휘어진 언덕 고가도로(진천읍 장관리 일송정 부근)에서 마주 오던 고속의 무쏘 차량이 갑자기 바깥쪽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그 충격으로 휘어져 180도 회전함과 동시에 그 엄청난 힘으로 튕겨 나오던 무쏘차량 뒷부분과 고 엄 동지의 차 운전석 부분이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사고 후 차체형태나 사고규모를 볼 때 차량에 타고 있던 3명 모두가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함께 타고 있던 학생들은 다행히도 목숨을 건졌습니다. 학생들의 진술에 의하면 사고당시 故 엄성준 동지는 촉각을 다투는 위태로운 급박한 상황에서도 두 명의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핸들을 반대로 꺾었다고 합니다. 故 엄성준 동지는 소중한 두 명의 학생의 생명을 지켰지만 정작 자신의 목숨은 잃고 우리 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우동민 11.01.02 (당시 44세) 이명박정권 사회운동 (추모비 옆 나무)

우동민 동지는 1968년 10월 24일 서울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3일 만에 심한 고열로 뇌성마비장애를 입어 20대 중반까지 집에서 지내다 지인의 권유로 안산에 있는 장애인시설 명휘원에 입소해 5년 동안 시설에서 생활. 이후 동지는 시설에서 나와 그룹홈에서 지내며 자립생활을 준비하던 중, 2005년부터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 창립에 함께하고 성북센터의 대외협력 간사를 맡아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동지는 2005년 장애인 시설인 정립회관 민주화투쟁, 2006년 활동보조인제도화 투쟁, 2008년 성람․석암 재단 시설비리 척결 투쟁,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 투쟁 등 수많은 현장에서 동지들과 함께 투쟁했습니다. 2010년 12월 3일 ‘장애인활동지원법의 올바른 제정과 국가인권위원회 현병철 위원장 사퇴 촉구’ 인권위 점거농성 중 열사는 폐렴 증세로 응급실로 후송되었습니다. 그러나 12월 8일 한나라당이 장애인활동지원법을 날치기 통과하자 이에 분노한 열사는 ‘한나라당 규탄 기자회견’ 항의방문 투쟁에 앞장섰으며, 결국 병세가 악화해 2011년 1월 2일 오전 10시에 급성폐렴으로 운명하셨습니다. 우동민 동지는 언어장애가 심해 평소 말은 많이 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호탕한 웃음과 푸근한 모습으로 주위 사람들을 보이지 않게 챙기고, 때로는 엉뚱한 행동과 농담으로 지친 동지들에게 작은 웃음을 주곤 하였다. 무엇보다 이명박 정권이 출범하면서 사회적인 차별과 양극화의 심화 속에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더욱더 비참한 생활로 내몰고, 장애인 역시 질곡의 구렁텅이로 내몰리는 현실에서 동지는 우직한 실천으로 묵묵히 현장을 지켰고 중증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위해 장애인 차별철폐를 위해 앞장서서 투쟁했다. 동지는 돌아가신 뒤 그해 으뜸 장애인활동가에게 주는 ‘정태수상’을 수상했습니다. ‘앞도 보고, 옆도 보고, 뒤도 보고 그렇게 함께 갑시다’라며 우직하게 현장을 지키던 열사의 정신은 장애해방 새 세상을 앞당기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화장 후,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추모비 옆 나무에 안장

 

우종원 85.10.11 (당시 23세) 전두환정권 학생열사

동지는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한 성품을 가진 청년이었고 서울대 운동권에서 핵심적인 위치에 있던 동지는, 이 사회의 심각한 모순과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고민과 자기 성찰의 와중에도 항상 주위의 친구들을 다정다감하게 위해주고, 때로는 기지에 찬 유머로 자주 주위 사람들을 유쾌하게 해주었다. ’85년 8월에 예비군 훈련을 위해 집에 와 있던 중 민추위 관련으로 수배된 사실을 알고 26일에 집에서 나왔으며, 그 이후 10월 12일 경부선 철로 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채 발견됐다. 사망 전 7월 27일 형사들이 집을 찾아왔고, 9월 27일에는 중앙일보에 발표된 민추위 관련 용의자 수배명단에 이름이 게재되었다. 10월 12일 대구 시경 소속 형사가 집에 찾아와 동지의 어머니를 만나, 빨리 자수시키라는 요지의 말을 하기도 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함께 발견된 메모지에 기재된 유서와 비슷한 내용의 글은 동지의 필적으로 밝혀졌으나 주민등록번호를 써놓은 필적은 판별할 수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또한 화장이 끝난 다음날인 10월 14일자 안기부 보고서에는 화장을 진행하는 과정까지 자세히 기재되어 있어 안기부에서 정보수집활동을 한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으나, 언제부터 안기부가 개입하였는지는 국정원 조사 비협조로 확인할 수 없었다.

 

유구영 96.05.02(당시 39세)김영삼정권 노동열사

동지는 ’78년 청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 행정학과에 입학하였고 대학에서 유신체제의 모순을 인식하고 ’81년 졸업과 동시에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간암 중기의 하늘이 무너지는 선고가 내려지기 전날 밤에도 동지는 민주노총의 핵심적 과제 중의 하나이면서 동지의 최대 관심사의 하나였던 노동자 정치세력화 방안을 새벽 4시까지 정리했다. 동지가 민주노총의 정책기획국 부국장으로 활동하며 꿈에도 염원하는 민주노총 건설이 실현되고, 자신의 땀이 밴 그 조직이 이제 막 새롭게 활동을 펼치려던 참이었던 ’96년 5월 2일, 그의 병세가 악화되어 여러 번의 입원과 치료에도 불구하고, 결국 동지는 새벽 2시 25분경, 아직 채 못 피운 서른아홉 살의 짧은 생애로 운명하였다.

 

유순조 02.03.08 (당시 52세) 김대중정권 노동열사

동지는 ’50년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10대에 노동을 시작, 20대에 참담한 노동현실에 눈을 뜨고 많은 노동현장을 전전하다 ’84년 이천전기에 입사했다. 동지는 ’87년 노동자 대투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투옥되었고 3차에 걸친 해고를 투쟁으로 무력화시켰다. 그 후 ’98년 금융위기 때 정리해고를 반대하고 생존권을 지키려다 다시 투옥됐다. 저들의 해고와 투옥 등 모진 억압으로도 진실을 향한 동지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이천전기 해고이후 인천지역해고자협의회에서 활동하면서 인천지역 해고노동자들의 투쟁에 헌신적으로 활동했던 동지, 자그마한 체구에 푸른 수의 같은 작업복을 입고, 입가엔 늘 귀까지 걸리는 웃음을 짓던 동지, 동지의 말과 행동은 화려하고 분주하지 않았지만 그 환한 미소로 해고투쟁을 같이하는 동지들에게 늘 커다란 힘을 주었던 동지, 투쟁과 긴장으로 점철된 동지의 삶에 어느새 암이라는 무서운 병마가 찾아들었고 처절한 투병 끝에 ’02년 3월 8일 운명했다.

 

윤용헌 09.01.20 (당시 49세) 이명박정권 빈민운동

‘미락정’. 윤용헌 열사가 10년 가까이 중구 순화동에서 장사하던 한정식 식당이자, 가족이 함께 살고 있는 집이었다. 유들유들한 성격의 열사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미락정’에 온갖 정성을 쏟으며 열심히 일해 왔다. 2005년 순화동에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영업을 하는 상가들이 있음에도, 동네는 철거용역 깡패들에 의해 폐허가 되었다. 2006년 겨울, 결국 철거용역깡패들과 집행관이 미락정에 들이닥쳐 물건을 빼앗아갔고, 그 뒤 다시 가게를 열지 못했다. 결국 열사는 하루아침에 빼앗겨 버린 주거권과 생존권을 되찾기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서 투쟁 했다. 서울, 경기 곳곳의 철거지역과 투쟁 현장들에서 앞장서 투쟁하였다.

2009년 1월 19일, 닷새 후에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가족들에 남기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열사는 자신과 다르지 않은 처지에 놓인 용산 철거민들의 망루 투쟁에 연대하고자 함께 남일당 옥상 ‘망루’에 올랐다. 그러나 ‘여기, 사람이 있다’는 이들의 외침은, 만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경찰특공대가 투입되어 진압하였고, 무자비한 살인진압과정에서 대형 화재참사가 발생하여 사망하셨다.

2010년 1월 9일, 355일 만에 치러진 장례 후에야, 이곳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윤주형 13.01.28(당시 37세) 이명박정권 노동열사

동지는 2007년 기아차 화성공장에 비정규직으로 입사하여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비정규직 철폐와 현장조합원들을 위해 투쟁했다. 2010년 회사의 탄압으로 인해 해고된 뒤에도 ‘기아자동차 해고자 복직 투쟁위원회’(기아해복투)를 만들어 해고자 전원복직과 사내하청 노동자 정규직 전환을 위해 투쟁했다. 2011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2012년 쌍용차 대한문 농성장 투쟁에 연대했고, 비정규직, 정리해고, 노조탄압 없는 세상을 위해 싸우고 있는 동지들과 함께 결성한 공투단에도 헌신적으로 앞장 서 싸웠다.

너무도 맑고 환한 웃음을 간직했던 동지는 4년간의 해고생활과 투쟁에도 불구하고 2012년 임단협 투쟁에서조차 복직이 되지 못하자 많이 힘들고 외로워하다 스스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언제나 밝고 활기찬 모습으로 동지들을 만났던 윤주형 열사여, 그래서 더 사무치게 아프고 그리운 윤주형 열사여! 아름다운 청년, 동지는 누구보다 맑고 환한 웃음으로 우리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간직될 것입니다

 

이경환 86.06.05 (당시 19세) 전두환정권 학생열사

’86년 5월은 이 땅의 반외세, 반독재, 반독점 투쟁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 4월 들어 성대의 전방입소거부 투쟁으로 점화된 불꽃은 서울대의 전방입소 거부 투쟁, 의대 도서관 점거기도로 이어졌고 5월에 들어서는 5.3 인천항거, 부산 미문화원 점거, 한미은행 점거 등 투쟁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 와중에 서울대의 김세진, 이재호, 이동수, 박혜정 열사가 분신, 투신으로 죽어갔고 동지는 그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그들이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원인이 무엇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원인이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는 미·일 외세와 이에 영합하여 민중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군사독재정권 및 매판 독점자본이라는 결론을 얻어내게 되었다.’67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대성학원에서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동지는 ’86년 6월 서울 청량리 맘모스 호텔 옥상에서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투신했다.

 

이덕인 95.11.28 (당시 28세)김영삼정권 빈민운동

동지는 ’95년 7월 인천시가 아암도에 군사보호시설 지구 철조망을 제거하자 이 지역에서 전국노점상연합회 동지들과 함께 장애인의 자립기반 마련을 목적으로 노점을 시작하였다. 인천시와 연수구는 아암도에 친수공간을 조성한다는 이유를 들어 용역회사를 고용, 경찰의 비호아래 1,500여명을 투입 생존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던 수 십 명의 노점상들을 11월 24일 오전 7시 한겨울 추위에 내모는 철거를 집행하였다. 노점상들은 철거를 막아낼 수 없다고 보고 10월경에 건설해 둔 망루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전개하였다.11월 25일 저녁 동지는 고립 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외부에 소식을 알리고자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외부로 탈출을 결심한다. 동지는 동료와 함께 저녁 8시 45분경 탈출을 시도 먼저 망루를 내려오다, 동료는 경찰이 자신들을 발견하고 망루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듯하여 동지에게 먼저 가라고 손짓한 후 다시 망루위로 올라갔다. 이것이 동지의 마지막 생전모습이었다. 망루를 떠난 지 3일 뒤 11월 28일 오전 10시경 동지는 농성장 근처의 아암도 앞바다에서 극도의 허기 그리고 추위와 싸우면서 근근이 버티던 동료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동지의 죽음은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이범영 94.08.12 (당시 40세)김영삼정권 사회운동

동지는 ’76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신 후 청년운동의 미래를 위해 적극적 활동하였다. ’84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집행국장으로 활동 후 민청련과 한청협 의장을 역임하시고 ’94년에 지병으로 운명하였다. 그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위대한 사상가도, 뛰어난 경세가도, 불세출의 지략가도 아니었다. 더더구나 천재의 광휘가 번뜩이는 타고난 글쟁이도 아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바 그는 마흔 해를 살다간 사람의 자연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장점과 동시에 많은 단점을 내보이며 열심히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던 수다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그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흔치 않는 삶을 산 사람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하지 못한다. 그는 개인의 안일과 욕망을 뒷전으로 밀쳐놓고, 이 사회와 세계를 뒤바뀌고자 했던 혁명가, 운동가, 활동가였다.

 

이상림 09.01.20 (당시 72세) 이명박정권 빈민운동

이상림 열사는 1986년부터 용산구 한강로 2가에서 ‘한강갈비’집을 운영, 1993년부터 같은 자리에 막내아들 내외와 함께 ‘레아호프’로 업종 변경하여, 20여 년간 한 곳에서 장사를 하며 살아오셨다. 가게 위 비좁은 옥탑에서 생활하면서도, 아들내외와 일구는 가게에 온갖 정성을 쏟아가며, 하루하루 열심히 가족을 위해 살아오셨다.

그런 그의 평범한 소시민으로서의 삶은 2007년 경 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레아호프가 있는 한강로2가가 ‘도시환경정비사업지구’로 지정, 사업시행인가와 관리처분인가가 나게 되면서, 철거용역 깡패들에 의한 협박과 폭행, 영업방해로 세입자들이 대책 없이 쫓겨나기 시작하자, 열사는 잘못된 개발의 현실을 깨닫고 분노하셨다. 이에 이상림 열사는 철거민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2008년 3월 전국철거민연합 산하의 ‘용산4지구 상공철거민 대책위원회’를 건설, 노구에도 불구하고 초대 위원장을 맞으며, 대책 없는 강제철거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셨다.

2009년 1월 19일, 이상림 열사는 구청의 외면과 조합과 용역의 폭력에 내몰리던 세입자들과 레아호프 옆 남일당 옥상에 ‘망루’를 짓고, “여기, 사람이 있다”, “대책 없는 살인개발 중단하라”, “철거민 주거,생존권 보장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점거농성에 돌입하였으나, 만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경찰특공대가 투입, 무자비한 살인진압과정에서 대형 화재참사가 발생하여 사망하셨다.

2010년 1월 9일, 355일 만에 치러진 장례 후에야, 이곳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이성수 09.01.20 (당시 51세) 이명박정권 빈민운동

유난히 사람을 좋아하던 이성수 열사는 2007년, 용인 수지에서 13년을 살아오던 집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하루아침에 철거당했다. 13년 전에도 강제철거 당해 쫓겨났는데, 두 번째 강제철거를 당한 것이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자녀가 돌아오니 집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뻥튀기’ ‘즉석 생과자’를 파는 노점으로 가정을 일궈오던 열사는, 노점단속과 탄압에 시달려오던 삶도 원망스러운데, 가족의 삶터인 집마저 빼앗긴 것에 분노하였다.

부서진 집에서라도 쫓겨날 수 없다며, 천막을 짓고 살면서 주거권 쟁취를 위해 투쟁하였다. 노점상 투쟁에도 앞장섰고, 전철연에 가입하여 다른 지역 철거투쟁과 사회 문제들에 대한 투쟁에 연대하면서, 반드시 투쟁에서 승리하여 주거권을 쟁취할 것을 다짐하였다.

2009년 1월 19일, 열사는 자신과 다르지 않은 처지에 놓인 용산 철거민들의 망루 투쟁에 연대하고자 함께 남일당 옥상 ‘망루’에 올랐다. 그러나 ‘여기, 사람이 있다’는 이들의 외침은, 만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경찰특공대가 투입되어 진압하였고, 무자비한 살인진압과정에서 대형 화재참사가 발생하여 사망하셨다.

2010년 1월 9일, 355일 만에 치러진 장례 후에야, 이곳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이소선 11.09.03 (당시 83)이명박정권 사회열사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께서 겪으신 핍박과 투옥과 수난이 엄청나게 컸지만,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 엄청난 일을 해냈으니, 바위를 깬 계란이자 얼음을 뚫은 불꽃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고난에 찬 투쟁을 통해 어머니께서 이루신 성과와 얻은 명예가 엄청나게 큰 것은 우리 모두의 자랑이요, 기쁨입니다. 무엇보다 노동자는 물론 모든 깨어 있는 민중으로 하여금 살아 있는 전태일이 되게 함으로써 인간해방의 초석을 놓았으니, 전태일 동지와 이소선 어머니가 이룬 최대의 성과입니다. 그래서 이소선 어머니는 한 아들을 잃고 수천수만의 아들딸을 얻었으며, 노동자의 어머니, 민중의 어머니,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었으니, 이런 보람과 영광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어머니! 이승에서의 이별이 한없이 슬프지만 어머니께서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전태일과 여러 동지들을 만날 것이니, 어찌 슬퍼만 할 수 있겠습니까. 부디 편히 쉬소서! 편히 쉬소서! (장기표 추모 글 가운데)

 

이오순 94.01.26(당시 68세) 김영삼정권 사회운동

’85년 경원대에 다니던 막내아들 송광영 동지가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학원안정법 철폐하고 전두환은 물러가라!”를 외치며 분신하여 운명한 뒤 경원대 신문사의 인터뷰에서 “난 민주도 모른다요, 동지가 다 뭐다요, 우리 광영이가 죽으면 무슨 소용 있다요.”라고 말씀해 만인의 가슴을 울린 동지는 서울 기독교병원에서 화마와 싸우면서도 조국의 자주화와 민주화, 통일을 부르짖는 아들 광영과 조국의 어머니로 살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민주화를 위한 여러 투쟁에서 동지는 ‘감동의 황색 가죽가방’으로 불리우며 백골단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91년에는 유가협 부회장직을 수행하며 회원 조직화에 앞장서다 강경대 동지 치사 경관 공판 도중 부당한 공판에 항의하다 법정소란 혐의로 1년 6월동안 수배생활을 하였다.’94년 문익환 목사님의 서거로 충격을 받고 “나 죽으면 광영이랑 문목사님 묻혀 계신 마석모란공원에 묻어주고, 꽃일랑 차라리 종이꽃으로 해줘. 문목사님처럼 많은 통일의 씨앗을 뿌리고 죽어야 하는데, ’95년까지만 사셨어도 이렇게 슬퍼하지 않았을 텐데.”라고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느끼다 결국 심장병으로 운명하여 마석모란공원에 목사님과 함께 묻혔다.

 

이옥순 01.02.23(당시 47세) 김대중정권 노동열사

정읍에서 태어나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열아홉의 나이에 서울로 올라온 동지는 ’70년대 여성노동운동의 중심이었던 원풍모방에서 운동의 삶을 시작했다. 끊임없는 열정과 노동자들에 대한 사랑으로 당시 정부에서 추진했던 기업별노조 정책으로 어려웠던 일마다 조합원들과 단결된 힘으로 원풍모방 노조를 지켜왔던 동지는 투쟁 과정에서 여러 차례의 해고, 구속을 당하기도 했다. 동지는 출소 후에도 여성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고 85년 서울노동운동연합 결성 후 부의장으로서 의장직무대행을 하며 3년 동안 수배생활을 하기도 했다. 동지는 ’91년, 장기수 권낙기 선생과 결혼하여 장기수 선생님들의 든든한 벗이 되기도 했다. 동지는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3008인 여성선언’을 위해 동지들을 만나 뜻을 모아 ’99년 통일을 여는 여성모임인 ‘금강초롱’을 묶어내고 통일운동을 시작했으며, 70년대 민주노동운동동지회 사무국장을 역임하며 ’70년대 노동운동가들의 힘을 모아 사회에 기여하고자 했다. 이렇게 평생을 노동운동, 통일운동에 헌신했던 동지는 폐암을 선고받게 되었으나 동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이제 시작이다!”라며 전국연합 대외협력위원장 등 활동을 전개하다 ’01년 2월 23일 운명하였다.

 

이정미 06.08.19 (당시 39세)노무현정권 노동열사

1966년에 태어난 동지는 93년 청구성심병원에 입사, 교육선전부장으로 활동을 시작 96년 노동조합 위원장으로 당선 병원노동조합 운동에 헌신하였다. 98년 IMF 시기에는 청구성심병원 사측의 임금체불과 노동조합 와해공작 과정에서 식칼테러와 위장폐업 등 부당노동행위에 맞선 투쟁을 전개했다. 투쟁을 통해 부당해고 조합원 전원 복직을 이루었으나, 사측은 부당노동행위와 집단 따돌림을 통해 정신적 고통을 주었다. 정신질환 집단산재 인정 투쟁을 전개 최초로 산재 인정을 받았다. 이 중심에 동지가 있었다. 중소병원 사업장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몸소 절감한 동지는 전국보건의료 노조 부위원장으로 방지거 병원 투쟁 등 중소사업장의 투쟁에 헌신적으로 결합한다. 위암 수술 이후에도 치료와 활동을 병행하며 미조직센터 활동 준비에 참여하였으나 암이 악화되어 투병생활 중 운명하였다

 

이춘자 11.12.17(당시 52세)이명박정권 사회운동

동지는 1981년 서울대 국문과 입학 후 ’84년 노동현장에 투신, 구로동맹파업에 함께하였다. ’86년 조직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한 동지는 ’90년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노동자우리역사학교를 운영하며 구로 지역에서의 노동운동, 기아자동차노조, 철도노조의 민주화투쟁에 헌신적으로 연대, 현장을 조직하였다. ’04년 노동자교육단체 ‘서울노동광장’을 설립하고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해 20일 넘는 끝장단식을, 한미FTA 저지를 위해 노동자 3만 서명과 1천인 선언 활동을, 노동자강사단을 꾸려 현장 연대투쟁을 진행하는 등 한평생을 노동해방과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해 헌신하다 갑작스런 뇌출혈로 운명하였다.

 

이형관 97.09.21 (당시 25세) 김영삼정권 학생열사

군산대 신문사에서 대학언론운동을 펼치던 동지는 크게 화내는 일이 없고 쉽게 흥분하지 않는 고요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동지였다. 동지는 ’94년 체계조차 잡혀있지 않는 전대기련 전북지부 지부장을 맡아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전북지구를 일궈 나갔다. 나아가 96년부터는 전대기련 중앙집행위 활동을 하면서 대학언론의 올바른 방향을 잡고, 학교 측에서 자행하는 대학언론탄압을 막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중 동지는 ’97년 9월 1일 밤 11시부터 새벽 5시까지 한양대에서 기자들과 간담회를 마치고, 9월 2일 오후 1시부터 새벽 5시까지 외대에서 중앙위원회 회의를 준비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대학언론탄압문제로 힘들어하고 있는 원광대 후배들을 만나기 위해 피곤한 몸을 이끌고 긴급히 내려가게 되었다. 당시 동지에게 출발 직전 손이 떨리고 말이 더듬거리는 뇌졸중 초기 증세가 나타났으나 피곤해서 그럴 것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강남터미널로 출발했다. 그러나 동지는 새벽 7시 강남터미널 경부선 승차장 쪽 보도블럭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렇게 쓰러진 지 19일간 의식불명 상태였던 동지는 9월 21일 새벽 1시 20분경에 운명하고 말았다.

 

 

장진수 (자료 없음)

 

장창옥 (자료 없음)

 

장현구 95.12.14 (당시 26세) 김영삼정권 학생열사

학내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정부의 시녀로 전락해버린 학교 당국으로부터 터무니없는 고소, 고발로 같이 활동하던 몇몇 간부들과 같이 성남 경찰서에 고발당했다. 제자를 고소, 고발한 교수들에게 심한 정신적 상처를 입고 갈등하던 동지는 구속영장이 발부돼지 않았으나 당시 성남 경찰서장과 담당 경찰관들은 직무를 남용하여 48시간 이상 구금했고 가혹행위 등 고문수사를 해 정신적 충격을 받게 했다. 재판에서 징역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받고 수감 3개월 만에 석방됐으나 ’93년 3월 부정입시관련 비상학생총회 중 교수, 직원에 의한 집단 구타를 당해 육체적·정식적으로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이후 정신적 충격으로 몇 차례 자살을 기도했고, 결국 ’95년 12월 4일 온몸으로 학내민주화를 위한 삶의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전응재 07.01.23 (당시 43세) 노무현정권 노동운동

택시노동자들이 겪는 참혹한 노동조건은 지금까지 20명의 분신노동자를 낳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택시노동자들은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기본급을 받으며 12시간 맞교대 장시간 노동으로 서민의 지친 몸을 실어 나르는 발이 되고 있다.

동지는 택시노동자 생존권 쟁취를 위해 2002년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며 63일 동안 파업을 이끌어 월급제 쟁취, 연월차를 유급화시켜 내었다.

이후 사측은 2005년 ‘택시월급제 사수를 위한 비상모임’ 활동가 3명을 해고하고 2006년 임금삭감안을 반영시킨 임금협약을 체결하여 탄압하였다.

이에 동지는 “임금삭감은 절대 안 된다”고 분노하며 “해고를 막지 못해 미안하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2007년 1월 23일 분신, 운명하셨다.

 

전용철 05.11.24 (당시 46세)노무현정권 농민열사

전용철 동지는 1962년 충남 보령군 출생으로 대천중학교 졸업 후 인천직업훈련원을 거쳐 철도청에서 일했다. 1989년에 귀농하여 최근까지 16년 동안 농업에 종사하면서 보령농민회 주교면 지회장으로 일하며 우리네 척박한 농업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2005년 11월 15일, 쌀협상 국회 비준을 저지하기 위한 전국농민대회에 참가한 전용철 동지는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에 폭행당해 9일간 투병하다 끝내 목숨이 소진되었다. 폭력진압을 부인하던 경찰은 시민과 농민회의 끈질긴 진상규명 노력에 굴복하였으나 이미 귀중한 동지의 생명은 운명을 다하고 말았다. 전용철 동지는 홍덕표 동지와 함께 범국민장으로 영결식을 치렀다.

 

전태일 70.11.13 (당시 22세) 박정희정권 노동열사

1948년 8월 26일 경북 대구시 남산동 출생

1963년대구 청옥 고등공민학교 입학 후 가정 사정으로 그만둠

1965년 가을 평화시장내 삼일사에 견습공으로 취직한 이후 한미사 재단보조, 재단사로 일함

1969년 6월 평화시장 내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 조직함

1970년 4월~8월서울 삼각산의 ‘임마뉴엘수도원’건물 신축 공사장에서 4개월가량 잡역부로 일하며, 이 시기에 평화시장의 형제자매들 곁으로 돌아가고자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림

1970년 9월 바보회를 투쟁단체인 ‘삼동친목회’로 새롭게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됨

1970년 10월 8일 삼동회 대표들이 (주)평화시장 사무실에 찾아가 다락방 철폐, 노조결성지원 등 8개항의 요구를 제출함

1970년 10월 24일 근로조건 개선 시위를 기도했으나 실패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경 평화시장 앞길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면서 분신, 밤 10시경 성모병원 영안실에서 불꽃같은 짧은 삶을 접음

 

동지는 ’4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동지는 16살 때부터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시다로 노동자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봉제공장의 열두어 살 소녀들이 하루 열네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손발이 마비되도록 일해도 생계마저 위협받는 청계천 여성노동자들의 비참한 모습을 본 동지는 착취와 혹사에 대한 분노를 갖게 되었고 나아가 이를 없애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다. ’69년 6월부터 재단사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바보회’모임을 조직하고 밤이 새도록 ‘근로기준법’조문을 뒤지며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은 노동운동을 시작하였다. 많은 고민을 거듭하다가 ‘바보회’를 ‘삼동친목회’로 바꾸고 청원과 진정 대신 더 적극적인 투쟁방법을 계획했다. 직접 청계천 노동자들에게 설문조사를 하고 이를 토대로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조건개선 진정서’를 만들어 삼동회원과 노동자 90여명의 서명을 받아 다시 노동청에 제출하였고, 이것이 경향신문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근로조건 개선없이 업주들의 횡포와 노동부 등 정부당국의 멸시가 이어지자 동지는 삼동친목회를 소집하여‘70년 10월 20일과 24일 시위를 계획하지만 실패한다. 마침내 동지는 11월 13일 청계천 노동자들 앞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의 의미를 담아 오후 1시 30분경 시장 골목에서 몸에 석유를 붓고 불을 당겼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치며 산화하였다.

 

정성범 99.01.30(당시 31세) 김대중정권 노동열사

동지는 ’87년 명지대학교에 입학하여 6월 민주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에 참여하면서 민주화운동에 첫 발을 내딛었다. 동지는 ’89년 제17대 명지대 총학생회 학술부장으로서 6공정권의 공안정국 조성과 공안합수부의 공안통치에 대하여 적극적인 반대투쟁을 펼쳤다.

’92년 대선을 경과하면서 동지는 ’95년 전노협 총무부장으로 노동자들의 기초적인 권익 보호와 산별노조 건설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자본과 권력에 맞서는 전노협은 공권력의 끊임없는 탄압을 받았고, 전노협 주요 간부에 대한 구속수배조치로 인한 동지의 활동은 매우 불안정한 생활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었다.

오랜 비합법활동과 전노협 상근활동을 해오면서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폐결핵을 앓게 되었으나 ’95년 11월 민주노총 결성시까지 열정적인 활동을 하였다. 전노협 해체 후 ‘전노협 백서 발간위원회’에서 발간사업을 진행하던 중 군복무(공익근무)를 하게 된 동지는 공익근무중에도 ’97년 민주노총 충남서부협의회 조사통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동지는 ’98년 명지대학교 4학년에 복적하였으나 건강악화로 곧 휴학하고 투병생활을 하던 중 ’99년 1월 30일 새벽 운명하였다.

 

정유미 08.07.26 (당시 45세)이명박정권 사회열사

1962년 전라도 함평 출생

1976년 시카고로 이민

1980년 일리노이 주립대-회계학

1983년 시카고 인근지역 한인 대학생 및 청년 조직인 석암회원 활동,

1989년 재미한국청년 연합 "한청" 활동,

1990년 시카고 청년교육문화원 원장 및 한청 시카고 지부 국제연대위원,

1991년 Nkrumah Washington 교육센터[흑인청소년 교육 자립센터] 이사,

1994년 동포사회를 위한 시카고 모임 국제연대 위원장,

1995년 동포회의 자주연합으로 개칭 국제연대 위원장,

2000년 전민특위 공동사무국 사무부총장,

2005년 전민특위 공동사무국 사무총장

 

미주지역 청년회 미 전민특위 사무총장 활동 중 위암으로 운명

 

정태수 02.03.03(당시 34세) 김대중정권 사회운동

동지의 생애는 장애인의 권리와 인간다운 삶을 위해 당당히 투쟁한 투사의 삶이었다. 동지의 투쟁은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을 다니던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싹틈동문회’에서 발행한 소식지를 복지관측에서 압수한 사건이 발생했다. 소식지에는 ‘복지관을 졸업한 학생들의 90%이상이 실업자로 살아가고 있고, 그나마 취업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6개월 이상 실습이라는 명목으로 5 만 원 이하의 교통비도 되지 않는 돈을 받으며 노동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는데 복지관은 서울시에 수료생들의 취업률을 90%가 넘는다고 보고했었다. 동지는 이 사실을 밝히는 농성투쟁에도 결연히 참여했다. 동지는 대학을 준비하던 중에도 불의에 항거하기 위해 정립회관 시설비리 투쟁에 참여했고,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 없는 장애인들이 먹고살기 위해 노점상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발생한 최정환 열사의 분신과 이덕인 열사의 의문사 투쟁에 헌신했다. 동지는 장애인의 문제가 단순히 장애인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집단이기주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자본의 세상에서 장애인이 소수자로서 차별받는 근본적인 문제제기와 세상을 바꾸는 투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정해진 07.10.27 (당시 46세)노무현정권 노동열사

인천 전기원 총파업도중 수차례에 걸쳐 협상을 요구했으나 사측은 ‘협약을 체결하면 영업권과 경영권을 빼앗겨 이익은 노조에만 있고, 회사에는 이윤이 없어진다’며 노동조합과의 교섭을 회피했다. 동지는 2000년부터 2007년까지 근무했던 (주)상신전기에서 받았던 힘없는 노동자들의 서러움을 알기에 총파업투쟁의 선봉에서 투쟁했다. 총파업 투쟁도중 각 회사 사장들의 회유와 협박, 생활고에 못이겨 노조인원이 줄어들었으나, 남아있는 동지들은 끝까지 민주노조를 사수하자고 결의했다. 그러나 어느곳에서도 동지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지않자 총파업투쟁 131일차 총력집회에 참가해 선두에서 투쟁을 하고, 경찰과 대치하던 중 대오 후미에서 달려오며 전기원파업의 정당함을 외치며 분신 운명하였다. “투쟁하지 않는 요구는 구걸이다!”

 

정형기 09.04.10 (당시 51세) 이명박정권 노동열사

동지는 84년 기아자동차에 입사해서 운명할 때까지 현장노동자로 살아왔다. 입사 후 엄혹한 군사정권하에서 당시 어용노조를 민주화하기 위한 현장투쟁을 전개해 민주노조를 만들어냈고, 그 때문에 구속과 해고, 그리고 수배를 당했다. 동지는 해고중에도 ‘기아자동차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와 ‘전국 해고자 복직투쟁위원회’결성을 주도하는 등 현장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또한 95년에는 자동차연맹 사무처장, 민주노총 준빙위원회 집행위원을 맡아 민주노조운동을 바로 세우는 일에도 앞장섰다. 96년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에 복직한 후에도 현장조직을 결성하고 현장조직화를 위해 앞장섰고, 기아자동차노조 교육위원을 맡아 전국의 노동현장 교육활동을 전개했다. 나아가 단위 사업장을 넘어서는 현장조직운동을 전개하는데 앞장섰고, 이를 위해 전국 단위 현장활동가 조직인 ‘기아그룹 민주노동자회’, ‘민주노동자전국회의’, ‘현장실천노동자회’ 건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또한 동지는 2000년 민주노총 1기 노동자 통일선봉대 대장을 직접 맡는 등 노동자통일선봉대 활동과 매향리 투쟁을 비롯해 노동자들이 자주통일투쟁에도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2006년 ‘산별노조 건설, 현장권력 쟁취, 비정규직투쟁 승리를 위한 현장공동투쟁위원회’ 소집권자를 맡아 기아자동차 화성비정규직 투쟁을 모범적으로 전개했다.

이후에도 현장에서 현장조직화 활동과 함께 지역과 전국의 노동현장을 방문해 교육활동을 열정적으로 해 오던 중 2009년 4월10일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에서 생을 마감했다.

동지는 기아자동차 민주노조운동의 역사를 개척하고, 자동차 연맹과 민주노총을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현장조직운동과 노동자 자주통일투쟁, 그리고 비정규직투쟁에서 새로운 모범을 만들어왔다.

동지는 활동에서는 가장 원칙적인 사람이었지만, 대중에게는 항상 겸손했다. 모든 활동에서 “현장이 생명이다”는 원칙과 “노동운동은 사회변혁의 영도계급으로 나서야 한다”는 신념을 평생 실천해 왔던 진정한 노동운동가였다. 그리고 함께 했던 동지들에게는 훌륭한 지도자였다. 평생을 노동현장에서 민주노조운동과 현장조직운동을 개척해왔던 동지는 조국통일과 노동해방 세상 건설의 신념과 열정으로 불꽃처럼 살았던 영원한 노동자였다.

 

제종철 03.11.20 (당시 35세) 김대중정권 사회운동

대학시절부터 이 땅의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청춘을 불사르던 동지는 대학 졸업 후에도 경기북부지역에서 청년단체를 만들고 일꾼들과 함께 노동단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노동단체를 통한 열성 일꾼을 만들어 내고 지역을 확대했다.’02년 온 나라가 ‘월드컵 4강’ 열기에 취해 미군장갑차에 의해 희생된 미선이와 효순이의 죽음에 침묵할 때, ‘의정부 청년회’ 창립멤버로 활동하던 동지는 미선이와 효순이의 언니들이 다니던 의정부여고 학생들과 함께 눈물의 촛불집회를 조직해 미국을 반대하고, 미선이 효순이의 죽음에 분노하며, 미국에 강하게 항의하는 시민들의 뜨거운 함성을 모으는 큰 역할을 했다. 이것은 여중생의 부모님을 설득해 투쟁의 공간에 나서게 하는 등 동지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이렇듯 짧은 생애를 뜨거운 열정으로 불태우던 동지가 차가운 주검으로 발견된 것은 ’03년 11월 20일 경기도 의정부시 가능동 미 2사단 캠프 레드클라우드 앞에서 미군 무죄평결 1주년 기념 촛불집회에 참여한 뒤 집으로 돌아오던 의정부역 철길 위에서였다.

경찰은 동지가 철길에 누워 있다 달려오던 열차에 치였다며 자살 또는 사고사로 결론 냈지만, 당시 동지가 많이 취하지 않았고, 열차 하체 바닥이 인체에 닿으면 형체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시신이 훼손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고 사고가 나기 30분 전쯤에 부인과 일상적인 통화를 한 점으로 미루어 동지의 죽음에 의문점이 남아 있다.

 

조영관 07.02.20 (당시 51세) 노무현정권 사회운동

동지는 1957년 함평에서 태어나 1976년 서울시립대에 입학해 당시 태동해 나가던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함께 했다. 교내 사회과학 써클이었던 <청문회>를 통해 활동하며, 변혁적인 사회운동과 문학의 결합을 고민했으며, 1984년 졸업 이후 사회과학출판사였던 <일월서각>에서 진보적인 출판문화운동을 고민하다, 당시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노동운동에 함께 할 것을 결심하고, 구로공단 등에서의 학습모임 등을 지나, 1986년 인천지역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1988년 인천 부평 소재 동미산업(주)에 노조를 세우고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해고 이후 1989년부터는 인천지역에 건설일용노조를 세우는 일에 함께 하고, 그때부터 운명할 때까지 인천, 수원 등지에서 용접공, 제관공 등 일용노동자로 살아왔다. 2000년 <노나메기> 창간호를 통해 노동자시인으로 대외적인 활동을 시작하고 2002년 <실천문학> 가을호 신인상을 받은 후, 노동문학운동을 하며 노동문학, 민중문학 진영의 통일단결을 위한 사업 구상에도 함께 했다. 2004년 부터는 인천, 경기 지역 노동자들로 구성된 노동자생활공동체 <햇살>을 창립하고 주도적으로 활동을 했다. 2006년 10월, 경춘고속도로 교각공사장에서 일하던 중, 갑자기 정신을 잃으며 실족. 병원에 실려가서 간암 판정을 받은 후,투병 끝에 2007년 2월 10일, 부천순천향병원에서 영면했다.

 

조영래 90.12.12(당시 43세)노태우정권 사회운동

동지는 서울대 재학 중 한일회담 반대, 삼성재벌 밀수 규탄, 6·7부정선거 규탄, 삼선개헌 반대, 교련반대, 공명선거쟁취 등의 학생운동을 주도했으며,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된 후 6년 가까이 피신생활을 하던 중 민주화운동에 주력했다. 특히 3년여에 걸친 각고 끝에 전태일 평전 ‘어느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집필하는가 하면,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망원동 수재사건, 대우어패럴사건, 이경숙 사건 등을 변론하였고, 변호사협의회 인권보고서를 집필하기도 하였다. 또한 보도지침사건, 박길재 사건을 담당했으며, 노동, 빈민, 공해, 학생운동 관련사건 등 인권변호에 전력하던 동지는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을 만들고 활동하는 과정에서 지병인 폐암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을 뒤로 한 채 운명했다.

 

조용술 04.11.15 (당시 84세)노무현정권 사회열사

동지는 한국근현대사의 격변기를 온몸으로 헤쳐오면서 민족통일의 앞날을 밝히고 겨레의 아픔을 치유한 참된 하느님의 일꾼이었다. 전북 익산에서 태어난 조용술은 한신대를 졸업하고 전북 옥구, 익산, 군산 등에서 목회활동을 했다. 1982~84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회장을 맡았고, 기독교방송재단 이사, 기독교농민회 전국연합회 이사장, 한국기독교원로회의 의장 등을 지냈으며, 1990년 범민족대회 공동본부장으로서 독일 베를린에서 북쪽 대표들과 접촉한 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등 노구를 이끌고도 민주·통일 운동에 앞장섰다.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상임고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고문, 한반도 통일 범민족대회 공동본부장,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상임고문 등을 지냈다. 조용술 동지는 겨레의 운명과 개인의 운명을 일치시키려 애쓰며 한평생을 살면서, 통일의 중요한 고비마다 길을 만들고 이어온 이 땅의 스승이자 진정한 목회자였다

 

조정식 89.05.24 (당시 25세)노태우정권 노동열사

동지는 ’82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하여 학내 써클인 ‘물리과학회’와 ‘사람과 과학’에 가입하여 일본교과서 왜곡사건과 전두환 군사정권 반대 집회 등에 적극 참여하였다. 노동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동지는 ’84년 학교에서 제적된 뒤 인천의 범아산업과 (주)진도에 위장취업하여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등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다. ’87년 9월 5일 국가보안법위반, 소요, 집회 및 시위법 위반으로 징역3년을 선고 받고 순천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였다. ’88년 8월 14일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다시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89년 5월 10일 서울 성동구의 영전기계에 위장 취업하여 현장에서 노동운동을 하고자 하였으나 5월 24일 3시 반경 드릴작업을 하던 중 동지 뒤에서 작업하던 선반공이 시간에 쫓겨 선반의 속도를 높이는 순간 공작물 균형을 위해 고정시켜 놓았던 기계의 바란스용 중심추(약 30kg)가 튕겨 나와 동지의 뒷머리를 때려 병원으로 옮기던 중 운명하였다.

 

조현식 98.12.28 (당시 34세) 김대중정권 노동열사

동지는 ’97년 IMF사태로 극심한 실업의 고통에 처한 건설일용노동자들의 권리와 생존권을 보장받기 위해서 경기도 광주지역에 건설일용노동조합의 초대위원장을 역임해 건설노동자들을 위해 노력했다. 또한 조합원들을 조직하기 위해 새벽 인력시장 등을 찾아다니며 설득과 조직화를 위해 동분서주했고 조합원들과 함께 체불임금해결과 노동조건개선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기도 했다. 동지는 조합원들의 먹고살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던 중 마침내 산림청과의 협상에 성공하여 숲 가꾸기 사업에 노동조합의 참여를 보장받았다.12월 25일, 모든 사람들이 성탄절로 들떠 있던 당일, 조합간부들과 숲 가꾸기 사업설명회를 준비하던 중 사무실에 원인불명의 화재가 발생해 병원에 입원 증 운명했다.

 

주우길 (자료 없음)

 

진철원 96.04.06 (당시 20세) 김영삼정권 학생열사

동지는 ’95년 대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원대학교 도시계획학과에 입학하였다. 이후 동아리 민족사 연구회 ‘한얼’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경원대는 ’91년 최원영 재단이 새롭게 들어서면서 고질적인 사학비리와 ’95년 108명 제적 등 무리한 학생 징계, 고발로 사회적 물의를 빚어왔는데, ’95년 12월 4일 분신 운명한 고 장현구 동지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한 투쟁이 4달째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경원 7천학우들은 울분에 차 있었고 동지는 주변선배와 동기들이 고생하는 것을 많이 안타까워했다. ’96년 4월 6일 동아리 회원들과 그간 진행되어온 장현구 열사 투쟁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헤어진 후 고교선배(고 장현구 동지)의 분신사망과 동아리, 학과의 선배들이 제적, 고발 등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괴로워하다가 최원영 재단의 살인적 학원운영에 항거, 총여학생회실에서 분신, 운명하였다.

 

차봉천 08.09.04 (당시 63세)이명박정권 노동열사

947년 경남 남해에서 출생하였으며, 1974년 부산시에서 공무원을 시작했다. 1981년부터 국회사무처로 옮겨 일을 했는데, 승진과 개인의 영달에 연연하지 않고 부정부패 척결과 공직사회 개혁에 앞장섰다. 동료들로부터 잘못된 일은 못 참는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 ‘단칼’과 ‘차폴레옹’이었다.

정권의 하수인이라는 굴종과 굴욕의 시대를 끝내고 진정으로 국민의 공무원으로 거듭나기 위하여 공무원노동자들의 권리와 단결을 위해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발전연구회,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총연합회,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을 건설하고 치열하게 실천하였다. 이러한 헌신적 투쟁과정에서 정부의 극심한 탄압이 있었다. 고인은 암 투병 중 말기에 이르러서도 노동자와 민중의 권리를 위한 투쟁을 중단하지 않고 활동하다가 2008년 9월 4일 22시 18분 동지들에게 남은 투쟁을 맡겨둔 채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잠들었다.

 

천덕명 02.11.22 (당시 39세) 김대중정권 노동열사

동지는 경남 고성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농사일을 돕다가 스무 살에 인천으로 상경하여 합판공장에서 공장생활을 시작하였다.

’93년 경인운수의 전신인 영화교통에 입사한 동지는 입사 초부터 노동조합의 대의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여 회계감사를 역임하며 노조간부로서 활동하는 가운데 누구보다 노동자의 권익확보를 위해 열성적으로 투쟁하였다.

특히 택시노동자들의 염원인 완전월급제 쟁취를 위한 민주택시연맹 인천본부의 65일간의 총파업에 빠짐없이 참석했으며 긴 파업기간동안 동지들이 흐트러지는 것을 막아내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사측은 부당한 불성실근무 제재와 임의적인 성과급 감산, 개인택시 경력을 축소 조작하는가 하면 급기야 징계위원회에 회부하고 동지에게 참석을 통보하였다. 평소 남에게 상처주는 말을 하지 않았던 동지는 “이렇게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회사가 해도 너무한다”, “회사를 가만히 두고만 봐서는 안 된다”며 분개하였다.

결국 동지는 개인택시 수령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상태에서 회사 측의 부당한 노동탄압에 맞서기 위해 새벽 0시 30분 경 회사 내의 차고지에서 자신의 차량에 신나를 끼얹고 분신하여 운명하였다.

 

천세용 91.05.03 (당시 20세) 노태우정권 학생열사

동지는 어려운 집안사정으로 인해 낮에는 일용직 건설노동자, 세차장 등의 아르바이트를 해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하고 밤에는 야간강좌를 들으면서도 누구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당시 동지는 강경대 치사사건과 박승희, 김영균 동지의 분신으로 전국적으로 규탄집회가 잇따르는 가운데서도 경원대 학생들이 축제와 체전 분위기에 들떠 집회에 참석하는 수가 점차 줄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동지는 이같이 어려운 학교 상황에서 학생들을 깨우쳐 일으킬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하게 되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결론을 내렸다.

’91년 5월 3일, 동지는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4만 학도 결의대회’가 시작되자 국기 게양대 난간에서 신나를 뿌리고 몸에 라이터를 갖다 댄 뒤 “6천 경원대 단결 투쟁 노태우정권 타도하자”고 외치며 6m아래 바닥으로 뛰어내렸고 끝없는 민중 사랑을 온몸으로 보여주며 산화해갔다.

 

최웅 93.10.26(당시 29세)김영삼정권 노동열사

동지는 ’83년 서강대학교에 입학하여 장구장단을 맞추는 ‘탈’에 가입하였다. ’84년 영등포에서 노동절 가두투쟁으로 붙잡혀 훈방이 되는 등 적극적인 민주화운동에 투신하였다. ’86년 말 역사에 대한 진보의 희망을 노동자계급에서 발견한 동지는 병역을 거부하고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준비했다. ’87년 경동산업에 입사, 풍물패 활동과 민주파 모임인 ‘디딤돌’의 열성적인 회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동지는 서강대에서 풍물패 활동을 하였던 경험 덕분에 경동산업의 노동조합 민주화 조직인 ‘디딤돌’과 풍물패 활동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활동하던 동지는 회사 측의 탄압으로 ’89년 봄, 결국 해고되고 말았다. 그러나 회사는 동지에 대한 해고에 그치지 않고, 디딤돌 자체를 와해시키려고 하였고, 노동조합 대의원 선거를 앞두고 디딤돌 회장단에 대한 징계회부를 자행하였으며, 이에 디딤돌 회원들과 조합원들의 농성으로 결국에는 두 명의 동지가 분신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동지는 ’90년 초까지 인천지역해고자협의회 실무자로 근무하며 복직투쟁을 전개했고, ’90년 초 인천민중교육연구소와 ’92년 인천민중연합 상담실 실무자로 근무했으며, 병역징집 거부투쟁을 계속했다. 이로 인해 노동조합 방문조차도 커다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어려운 지경에 놓였다. 이후 결혼식을 올리며 노동자의 삶을 결의하던 동지는 신혼여행에서 불의의 조난사고를 당하여 운명했다

 

최응현 90.11.08 (당시 21세) 노태우정권 학생열사

동지는 ’69년 경북 울진에서 출생하였다. 동지는 한양대에 입학한 이후 학생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88년에는 전방입소 반대 특위 부위원장으로 활동 중에 6월 구속되어 11월에 집행유예로 출소하였다. ’89년 복학을 하였으나, 가정형편상 다시 휴학과 복학을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변혁운동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고 있다가, ’90년 11월 8일 한양대 교내 건물 옥상에서 민주화투쟁에 제대로 복무하지 못함을 자책하는 유서를 남기고 투신하여 운명하였다.

 

최종길 73.10.19 (당시 42세) 박정희정권 사회운동

’72년 10월 유신이후 유신반대투쟁이 조직되고, ’73년 8월 김대중 후보를 납치하는 사건이 일어나 세계의 이목이 박정권과 중앙정보부에 집중되자 국내외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고자 중앙정보부는 ’73년 10월 ‘유럽거점 대규모 간첩단’을 적발하였다고 발표했다. 그 명단에는 ’73년 10월 19일 중앙정보부에서 의문사한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도 들어 있었다. 유럽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73년 10월 16일 오후 2시경 중앙정보부 남산 분청사에 동생(당시 중앙정보부 요원)과 함께 임의 출두해 조사받던 중, 출두 3일 만인 19일 조사과정에서 고문으로 사망했다. 은폐 조작하기 위해 중앙정보부는 조사 중 고정간첩으로서 자신의 가족과 국내 조직망을 보호할 목적으로 감시가 소홀한 틈을 이용 7층 화장실 창문을 통해 투신자살했다고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88년 검찰은 진정사건에 대해 자살이나 타살의 증거도 없고, 간첩여부를 입증할 증거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종결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은 증거 없이 간첩 혐의를 두고, 잠 안 재우기, 모욕 심한 구타 등 고문을 해 자백을 요구했고 간첩으로 단정하는 일련의 문서는 사후에 작성했고 현장검증도 조작했다. 감찰실 조사결과 차모씨 등에 의해 고문을 가한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중정은 조직적으로 은폐했다.

 

최진욱 00.08.26 (당시 29세) 김대중정권 노동열사

동지는 ’93년 경기 수원시 권선구 의료보험 조합에 입사하여 당시 전국지역의료보험노동조합총연합(의보총련) 경기지역의료보험노동조합에 가입하며 노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동지는 갓 입사한 신입사원 임에도 노동조합에 가입하여 지부 총무부장, 경기노조 중앙운영위원을 역임하여 노조활동을 벌였다. 의료보험통합 과정에서는 전국사회보험노조의 전국대의원으로서 통합투쟁의 선두에서 각 집회와 토론회·공청회 투쟁을 모범적으로 수행했으며 ’00년 박태영 이사장의 노조 무력화 시도에 선봉에서 투쟁하였다. 그러나 파업이 진행 중이던 한여름, 공안탄압 분쇄를 위한 민주노총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수원 화서 전철역에서 상경하면서 깃대를 펼치던 중 감전으로 인해 20여일 병상투쟁을 마감하며 운명하였다. 그 후 박태영의 노조말살정책은 부패와 비리로 얼룩진 공단을 만들기 위한 파렴치한 행각이었음이 밝혀졌다.

 

하재승 10.10.26 (당시 58세)이명박정권 노동열사

특수고용노동자로 살아온 레미콘노동자 하재승 동지는, 10여년동안 인천에 소재한 동양레미콘 공장에서 일해 오면서 노조깃발을 지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조합원. 비조합원 가릴 것 없이 전체 노동자들의 단결을 위해 노심초사 하며 지샌 밤이 수없이 많다. 동양레미콘 인천공장이 10년이 넘게 조합원에 게 회유와 협박하며 노조탈퇴를 강요하고 해고 등 노동자들에게 상시적인 고용불안을 조장하면서 조합원과 비조합원간의 갈등을 조장했다. 하재승 동지는 이런 과정에서 노동조합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다 노조탄압으로 사망했다.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한경석 02.05.21 (당시 40세) 김대중정권 노동열사

동지는 현재 부천시흥 민주노총의 모체인 부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를 8년이라는 긴시간 동안 투쟁적인 조직으로 일구고 사수했던 부천노동운동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지도자이자, 운동가였다. 지역노동자들의 단결과 연대를 위한 열정적인 활동으로 동지는 부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를 결성하고 8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지역의 노동운동발전을 위해 쉬지 않고 투쟁해왔다. 그러나 지역의 투쟁사업장마다 찾아다니며, 공권력의 투쟁에 맞서기 위해 밤을 새며 고민하고 활동하던 과정에서 자신의 몸을 돌볼 여유가 없었던 동지에게 무서운 병마가 찾아들었다. 동지들의 간절한 바램을 뒤로하고 동지는 결국 ’02년 5월 21일 5시경 운명하였다.

 

한상근 97.02.13(당시 26세) 김영삼정권 학생열사

동지는 평소 “나는 조국과 연애하고 조국과 결혼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는데 의협심이 강해 항상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사람으로 ’96년 일본의 독도 망언이후 민족의 자존심과 자주권을 지키고자 일본 대사관 항의 방문 시 홀연 대사관 담을 넘어 한국 청년의 기개를 보여 주기도 했다.

동지는 동아리 연합회 회장으로 밤낮없이 뛰어다녔고 ’97년 용인대가 ‘대학종합평가’를 받게 됨에 따라 총학생회 학원자주화 추진위원회 산하 ‘대학종합평가인정제소위’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학우들의 권익을 실현하기 위하여 학생회의 요구를 무시하는 학교당국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2월 10일 새벽 4시 30분경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호소하기 위하여 분신을 기도했다. 동지는 병원 이송 중에도 동료 학우들에게 “운동을 열심히 해달라! 괜찮으니 너무 걱정마라!”를 계속적으로 외치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뚜렷한 유서나 구호를 남기지는 않았으나 동지의 숭고한 조국사랑, 학원사랑, 민중사랑의 정신을 표현한 것이었다.

 

한희철 83.12.11 (당시 22세) 전두환정권 학생열사

동지는 ’79년 서울대학교에 입학 후 동아리인 가톨릭학생회 활동을 시작해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고, 민주화와 민중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주민등록증 일제 갱신 시기여서 수배중인 운동권 학생들이 도피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도와주려다 이 사실이 보안사에 발각되어 휴가복귀 후 부대근무 중 ’83년 12월 6일 보안사령부로 연행 이 사건으로 군부대 녹화사업을 받게 되었다. 입대 전 학생시절의 민주화운동과 야학연합회 사건 관련 혐의로 전기고문을 당하면서 5일 동안 취조를 받고난 후 12월 10일에 석방돼 부대에 복귀했고 그 다음날인 12월 11일 새벽 4시 30분경 동지는 부대 내 문서 보관창구 앞 보초서는 자리에서 가슴에 3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보안사의 불법적인 연행, 조사 및 폭행 가혹행위와 죽음이 인과관계가 있어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한 사망으로 인정했다.

 

허광만 11.11.21 (당시 39세) 이명박정권 노동열사

동지는 전국철도노동조합 서울지방본부 부곡기관차승무지부 지부장으로 2009년 전국철도노동조합 파업을 주도하였다. 국방부조차 '합법파업'으로 인정한 철도노조의 파업이었지만, 이명박 정부는 끝내 이 파업을 '불법파업'으로 규정하고, 철도공사는 단순 파업 참가자를 포함한 11,588명 전원 징계라는 사상 초유의 징계사태를 가져왔다. 동지는 이때 파업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해고 징계를 당하였다.

당시 전국철도노동조합의 파업은 합법파업임이 국정조사에서 드러났으나, 파업으로 인해 해고된 노동자가 2012년 200명이나 되고 있다. 해고자들의 원직복직은 동지의 바램이었다. 항상 밝은 사람이었고, 궂은일을 마다않고 앞장섰던 동지는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2011년 11월 21일 복직을 염원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허세욱 07.04.15 (당시 54세) 노무현정권 노동운동

1953년 5월 9일 경기 안성에서 9남매 중 다섯째로 출생 중학교 때 서울로 상경, 막걸리, 꽃, 박카스 등 온갖 배달 일을 함. 1991년 한독운수 입사, 택시 운전 시작 1994년 40이 넘어 봉천동 철거투쟁으로‘운동’

 

홍근수 13.10.07(당시 77세)박근혜정권 사회운동

동지는 목회활동과 함께 평생을 민주화 통일운동에 헌신하다 운명. 평통사를 창립하였다.

저서로는 『기독교와 정치』(1987), 『지금은 통일할 때』(1990), 『통일의 길, 십자가의 길』(1991), 『밝은 전망, 예측되는 미래』(1993), 『기독교는 민족의 희망인가?』(1995), 『역사의 부활』(1995), 『민족통일의 비전』(1998), 『평화와 통일의 실천마당』(2003), 『홍근수 목사가 걸어온 길: 나의 걸음』(2003), 『예수와 민족(내가 살아온 삶의 발자취)』(2004), 『양키고홈』(2006), 『전환기 한미관계의 새판짜기 2 홍근수 목사 고희 기념문집』(2008) 등이 있다.  

 

홍민희 (자료 없음)

 

홍성엽 (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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